종양표지자에 대한 소고
“암수치가 얼마에요?”
“.... 지난번보다 조금 올랐네요...”
“그러면 어떡해요? 더 나빠지는 것 아닌가요?”
“꼭 그렇게만 볼 순 없고, 그 수치만으로 병 상태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진료실에서 많이 나누는 대화다. 환자마다 다른데, 종양표지자 (tumor marker)를 빠짐없이 챙기는 분들이 있다. 종양표지자는 종양에서 분비되는 물질을 혈액으로 검사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으로는 CEA (대장암, 위암, 폐암), AFP (간암) CA19-9 (췌장암, 담도암), CA125 (난소암), PSA (전립선암) CA15-3 (유방암)등이 있다.
종양표지자는 암의 진단과 치료 결정에 도움이 되는 검사이지만, 많은 경우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종양표지자를 실제 환자 진료에 사용하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으며, 이것만 믿고 결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의과대학에서 배우는 상식이다. 그러나 이것을 환자들에게 이해시키기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고, 종종 의사소통에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흔히 맞닥뜨리는 질문. 종양표지자가 올랐는데 암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 상당수의 건강검진 프로그램에서 종양표지자를 포함시키고 있으나, 이로 인해 발생하는 혼란과 비용을 생각하면 사실 좀 심란해진다.
종양표지자는 암 진단에 쓰이는 검사가 아니다. 예를 들어, PSA는 전립선암의 진행 상태나 치료 반응을 비교적 정확하게 반영하는 수치이지만, 암이 아닌 전립선비대증에서도 올라갈 수 있다. CA125 역시 난소암에서 상승될 수 있지만 암 이외의 다른 원인으로 인한 복수가 찰 때에도 올라갈 수 있다.
적지 않은 분들이 건강검진결과 종양표지자가 올라갔다며 종양내과 진료실을 찾는다. 다른 영상검사나 내시경을 해보지만 이상이 없는데, 이게 왜 올라갔느냐며 불안해한다. 종양표지자는 암 말고도 다른 원인의 영향을 상당히 받지만, 그 다른 원인을 일일이 다 규명할 수는 없다. 결국 수 개월, 수 년간 추적관찰해보는 수밖에 없다. 대개 종양표지자 수치는 큰 변동이 없이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당신의 종양표지자 수치가 높은 것은 사람마다 키가 다르듯 개인차일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답답하겠지만, 이것이 현대의학이 내놓을 수 있는 답의 전부다. 결국 수 개월, 수 년간의 불필요한 진료와 검사을 받는 셈이 된다. 의사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건강인에 대한 검진프로그램에서 종양표지자가 모두 제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종양표지자를 무엇에 쓰는가? 건강인에서 암 진단을 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암으로 치료받는 환자에서 치료효과를 판정하기 위한 자료로 쓴다. 수술이나 항암치료 후 수치가 떨어지는지를 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 수치가 암의 진행 또는 호전 여부를 항상 정확히 반영하는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항암치료 후 종양표지자가 상승했다가 떨어지면서 비로소 치료반응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보통 flare 라고 부르는데, 항암치료로 인해 종양세포가 깨지면서 종양표지자가 되는 물질을 분비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올라갈 수도 있는 것이다. 반면 암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종양표지자는 큰 차이가 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경우도 상당히 많이 본다. 이런 경우 종양표지자만 믿고 기존 치료를 유지한다면, 환자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방치하게 될 것이다.
더 흔한 경우는, 치료하면서 떨어졌던 종양표지자가 슬금슬금 계속 올라가는데 영상에서는 큰 변화가 없고, 환자의 증상도 안정적으로 유지될 때이다. 환자는 불안해한다. 병이 나빠지는 거냐고.
“몸에 퍼진 종양의 일부에서 내성이 생기고 있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소위 net로는, 종양의 상태는 조절되고 있는 상태이므로 현재의 치료를 지속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봅니다.”
“아니 그래도 나빠지는 기미가 보이는데 대책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환자도, 의사도 서로 답답하다. 그러나 이것은 질병치료의 목적 자체가 환자가 생각하는 것과 의사가 생각하는 것이 다른 데서 오는 근본적인 갈등이지 않을까 싶다. 환자는 암을 뿌리뽑기를 원하고, 의사는 암을 없애지는 못하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 아무리 처음에 치료의 목적이 완치가 아닌 조절에 있다고 설명해도 그렇게 받아들이기는 힘든 것이 사람의 심정이 아닐까.
그러나, 그래도 의사의 판단을 믿으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의사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약간의 진행 의심 소견을 가지고 약을 바꾼다면 나중에 쓸 약이 훨씬 더 빨리 소진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의사는 우리가 쓸 수 있는 무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 무기를 어떻게 최대한 쓸 수 있을지 수없이 고민하는 사람이다. 종양내과의사가 받는 수련은, 신무기를 개발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무기로 얼마나 잘 싸울 수 있는지를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질병의 성질을 알고 다스려본 경험이 있는 자를 믿으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우리가 날씨를 판단할 때 어떻게 하는가? 인터넷의 날씨 정보를 보고 오늘의 기온, 습도, 풍향 등을 보고 파악하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그날의 하늘을 올려다 보는 것이다. 밖에 나가서 그날의 공기를 느껴보는 것이다.
암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영상검사, 종양표지자, 간과 신장기능, 조혈상태를 반영하는 여러가지 수치를 보고 판단하고, 환자를 직접 진찰해서 파악하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 본인이 어떻게 느끼느냐이다. 항암치료를 받고 어떤 증상이 있었는지, 구토가 얼마나 심했는지, 피로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매일 일기로 적어보자. 몸이 힘든 것이 지난주가 10점 만점에 5점이었다면 이번주는 3점, 이런 식으로 점수를 매겨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 상태를 담당의사에게 가능하면 정확히 전달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종양표지자는, 예를 들면 그 말의 날씨를 파악하는 데 습도 정도의 중요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습도는 날씨를 파악하는 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날씨를 판단하지는 않는다. 같은 습도여도 기온에 따라 날씨가 천차만별이지 않은가. 바람의 세기에 따라 바깥 풍경과 우리의 기분은 너무도 달라지지 않는가.
종양표지자가 1-2정도, 많게는 50-100까지 오르고 내리는 것도 환자의 상태에 따라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무슨 선문답같지만, 사람의 몸은 기계가 아닌 만큼 숫자 하나로 다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종양표지자의 추이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본인의 몸 상태와 기분을 하루하루 체크해보고 돌보는 데 집중하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