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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on de Madame Saw Mar 12. 2021

내 사주에는 귀인이 없다.

그리고 이 글은 유서가 아니다.


내 사주에는 귀인이 하나도 없다. 물론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사주는 마치 내 삶의 모든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어떤 말을 하고 어떤 글을 써야 좀 괜찮아지고 문제가 해결될까? 지금껏 아무 말도 안 하고 아무 글도 쓰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문제들 같아서 말도 못 하고 글도 쓰지 못했다. 물론 글도 썼고 말도 많이 했지만 그것들 말고 정말 말하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그것들 말이다. 말하고 쓴다고 나아지긴 할까? 말하고 쓰기까지 했는데 더 나아지지도 않을까 봐 언제나 지금처럼 겉돌기만 할 뿐이다.


누군가에겐 지금 쓰는 글이 마치 유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 왜냐하면 나는 죽음의 고통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보다 더한 부정적인 영향이나 누군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남에게 씌울 일도, 지인들로 하여금 사실 별로 걱정은 안 되지만 걱정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냉정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고민하게 만들 필요도, 걱정하는 척 기회 엿보는 이들과도 엮일 일이 없으며 너보다 힘든 사람 많다는 얘기 들을 일도, 나에게 고작 그깟 일로 유난 떤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 무너진 나를 보면서 쌤통이라 느낄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그럴 용기가 있는 사람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까? 하긴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었다면 세상에 괴로울 사람이 어디 있겠나. 어떻게 보면 조금 부러운 용기인 것도 같다. 살아남은 자, 죽은 자의 곁에 있던 이들이 힘들 뿐 정작 죽은 자가 뭘 알겠는가. 숨만 끊어지고 나면 굳이 남에게 고충을 털어놓거나 해명하거나 부정할 필요도, 굳이 그걸 받아들이고 극복하려 애쓸 필요도, 그러다 실패하여 더 좌절할 일도 없을 게 아닌가. 적어도 미래엔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하고 결국 나는 어디로 가게 될지 걱정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고 또 실패해서 괴로움이 배가될지 몰라 두려워서 잠을 설칠 일이 없이 푹 단잠에 빠질 수는 있겠다.


죽은 다음에 내 시신은 언제쯤 발견이 되고 어느 정도 처참한 모습일지, 남은이들이 나로 인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될지, 장례식 때 어떤 이들이 오고 오지 않을지, 죽기 전 내 물건들은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유서는 또 어떻게 써야 할지, 장기나 시신은 기증을 할 것인지, 괜히 못다 한 말을 가기 전에 해볼까 해서 남들에게 쓸데없는 연락을 하여 추가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을지, 또는 그러다가 내가 더 상처 받진 않을지, 오해를 풀지 못하고 가게 되어 누군가에게 왜곡된 추억을 심어주는 건 아닌지, 나를 증오하거나 나를 먹잇감으로 여기던 누군가를 승자로 만들고 내가 패자가 되는 건 아닌지 등등의 이 모든 것을 걱정하고 고민할 필요가 있냔 말이다. 내 컴퓨터와 휴대폰 저장공간에 꽁꽁 숨겨둔 나만 알고 싶었던 비밀이 만천하에 공개되고 혹시 10년쯤 후엔 도저히 오글거려 지우고만 싶게 될지 모르지만 스스로는 더 이상 지울 수 없도록 sns의 글과 사진들이 영원히 인터넷에 박제된들 죽은 자가 알 바인가.


그런데 그들보다 더 대단한 사람은 죽기 전에, 아니면 죽지 않고 그것들을 남에게 말하고 쓸 용기가 있는 사람들인 것 같다. 약점을 노출했을 때 혹여나 그걸 빌미로 누군가에게 이용당할 수도 있지만 무려 그럴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이라니. 얼마나 철이 없고 결핍이 심하며 지금껏 얼마나 많은 잘못된 선택들을 해왔는지를 까발림으로써 얻을 쪽팔림을 감수할 용기라니. 나약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남들이 우습게 보거나 또는 한심하게 생각하거나 중2병 관심종자로 보고 비웃음 당할 걱정 따위 씨 발라먹는 인생이라니.


무엇이 그들에게 이런 힘을 북돋아주었을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그들이 나쁜 일을 당했을 때 무조건 자신의 편이 되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가족들일까? 하소연을 하고 도움을 청했을 때 수치스러워하거나 상처 주는 말로 되려 비난하지 않고 굳건히 그들의 곁을 지키고 힘이 되어준 연인이었을까? 혹시나 소식을 듣고는 괴로워할까 봐, 또는 괜히 미안해질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맷집 강한 친구들일까?


나는 나에게 괴로움을 털어놓거나 단순히 투덜거리는 사람들을 나약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들으면서 매우 고통스러웠으나 나는 그들보다 강하니까 말하거나 쓰기보단 많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듣는 자가 힘이 되는 존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그들만큼 강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나는 앞서 말한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그들처럼 내가 지금 괴롭고 좌절감이 느껴지고 매우 슬프고 우울하다는 말을 하거나 눈물을 보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괴로웠던 이유는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악역이 되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언제부턴가 그것을 부정했지만 그것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반대의 길을 걷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고통받은 이유는 나에게 고통을 안겨준 타인을 싫어하면서도 그들에게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타고난 운명이란 없고 지금 나에게 닥친 모든 것은 내가 만든 결과물이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이 바로 나에게 귀인이 없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에겐 죽을 용기가 없다. 딱히 살고 싶은 의지도 없고 삶의 이유도 모르겠고 의미도 없고 이 모든 게 너무나 지쳤고 과거는 암담하고 미래는 캄캄하며 진심으로 그만 살고 싶지만 나는 쫄보라 그럴 일은 없을 테니 혹시라도 걱정했다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봤자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으니 언제나처럼 내 인생은 그렇게 그저 흘러갈 것이다. 글을 마치고 난 후에 집 앞에서 사 온 피자로 오늘의 첫끼를 먹으면서 알바몬을 뒤질 것이고 내일은 사람들을 만나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들고 고마움과 즐거움을 느끼면서도 속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할 것이며 언젠가는 다시 일을 하고 또다시 적을 만들고 적과 싸우고 또다시 사랑을 하고 상처를 받고 이별을 할 것이다. 또다시 상처 받고 고통받고 가라앉고 마음의 문을 열고 닫고 그렇게 나는 계속 살아가겠지. 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그냥 그럴 거라고 예상한다는 말이다.  


이왕 살기로 한 것 앞으로의 다짐을 한번 해본다. 나는 앞으로 다시는, 역시나 나의 아픔을 남에게 털어놓는 용기는 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단지 설명으로라도 남에게 성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 이후로 절대로 하지도 듣지도 않을 것이며 그런 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죽지도 못하니 살아야 하기에 여기에서 더 떨어지고 싶지는 않다.


 사주에는 귀인이 없다. 대신 도화살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남들로부터  모든 아픔을 감당할 만큼의 사랑과 관심을 원했던 적이 없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그러니 나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2021. 03. 21, 정소연(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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