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건니생각이고 Jun 25. 2019

애 안 낳는다며?

딩크족에서 딸바보가 되기까지.

 저는 딩크족이었습니다. 물론, 혼자 결정했던 건 아니었고요. 결혼하면 '당연히' 애를 낳아야 한다는 사회 통념에 저항하고자 하는 반항아 기질 때문이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모든 결정은 제가 '더' 행복한 방향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아내도 마찬가지 생각이었고요. 각자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고, 여행도 자유롭게 다니는 그런 삶이 더 행복한 삶이라 믿었습니다. 아이가 생기면 많은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기에 아이는 낳지 않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였고요. 아이를 낳아보지도 않고 그런 성급한 생각을 한다고 아이 있는 인생 선배들이 지적했지만, 꿋꿋하게 딩크족 대열에 합류했음을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딩크족이라는 소신을 유지하기 위해 완벽한 관리를 한 건 또 아니었습니다. 딩크족에 발만 걸쳐놓은 세미 딩크족 정도였지 싶습니다.


'부모님에게 손주를 안겨 드려야 기뻐하지 않을까?'
'결혼을 했으니 아이 하나는 가져야겠지?'
'나중에 늙어서 아이가 없으면 외롭지 않을까?'


 자녀계획을 고민할 때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질문들입니다. 부모님을 위한 결정을 할 수도 있고, 자기 뜻보다는 대세를 따라 아이를 낳는 결정을 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런 결정이 과연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지 반드시 고민해 봐야 합니다. 전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해 아이를 낳고 싶지도 않았고, 별다른 이유 없이 남들처럼 그냥 그렇게 아이를 낳을 생각은 더욱이 없었습니다.


. 이었던 딸내미


아이가 생겼습니다.


 소신만 가득했던 세미 딩크족의 예견된 결과였을까요. 딩크족이라 주장한 지 채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아이가 생겼습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요. 딩크족 운운하던 짧은 과거는 까맣게 잊은 채, 어느덧 전 아이와의 삶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기뻐서 들떠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가족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아빠가 된다는 책임감까지 더해지니 막막할 수박에 없었던 겁니다. 뭐 근데 어쩌겠습니까. 아이가 생긴 건 이미 현실이고, 전 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를 다했습니다. 육아 관련 서적 중 도움이 되겠다 싶은 건 죄다 빌리거나 구매했습니다. 도움이 될만한 영상들을 찾아본 건 물론이고요. 특히,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는 전 편을 몇 번씩 반복해서 시청했고, 오은영 선생님의 가르침을 '머리'에 입력하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하지만요. 마음의 준비는 대체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고, 그게 또 준비한다고 되는 건가 싶기도 했습니다. 마음이란 모름지기 진심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건데 말입니다.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분만실에서의 상황을 생각해 보곤 했었습니다. '어떤 느낌일까', '난 눈물이 날까' 등. 현실이 되고 보니, 저의 감동 타이밍은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너무 대견하게 잘 견뎌내는 아내의 모습에 울컥했을 뿐, 정작 딸내미를 처음 안아보는 순간에는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하더라고요.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아이를 안아보는 동시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태어났고, 전 감정보단 노력으로 딸내미를 보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자라. 제발 자라. 제발..


 살면서 이토록 간절히 바라던 게 또 있었을까요. 아이가 신생아일 때의 저의 육아는 기승전-재우기였습니다. 비교적 잘 자는 아이였음에도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그 시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부성애의 한계를 체감하고 있던 시기에 육아로 인한 피로까지 누적되니 마음의 여유는 더 없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걱정이 되더군요. 이렇게 마음이 아닌 머리로 키워도 괜찮은 걸까 싶었죠. 아이가 말하기 시작하면 딸바보가 될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주변에서 얘기했지만 불안한 마음은 더 커져만 갔습니다.


난 아빠가 제일 좋아!


 아빠의 육아 제7편 <여보, 얘 뭐라고 하는 거야?>에서도 고백했듯이, 저 말을 듣는 순간 마법처럼 마음이 열렸습니다. 세미 딩크족이었던 터라 ‘아빠!’란 외침에도 반응하지 않던 제가 저 한마디에 와르르 녹아내렸던 겁니다. 그저 의무로 느껴지고, 기쁨보단 고됨으로 다가왔던 육아가 '행복'으로 변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와 비견할 만한 설렘을 다시 느꼈고, 보상을 바라지 않는 베풂이 가능해졌습니다. 사랑스러운 딸내미는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도 ‘고마워!, ‘사랑해!’를 연신 발사하며 녹아버린 제 마음이 굳을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너무 고마웠습니다.


 딸내미는 현실에 치여 잊고 있었던 행복이라는 가장 중요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사실, 수많은 행복은 이미 곁에 존재했을 겁니다. 제가 놓치고 있던 거겠죠. 얼마 전 아내가 그러더군요.


“오빠, 행복은 '해석력'이래.”


 그랬습니다. 같은 상황임에도 누구는 부정적인 면을 이야기하고 다른 누구는 좋은 점을 찾아냅니다. 해석하기 나름이란 거겠죠. 같은 상황 속 무덤덤한 저와 마냥 행복해하고 기뻐하는 딸내미를 보니 저도 예외는 아니었던 겁니다. 사소한 상황 하나하나를 행복으로 해석해 내는 딸내미가 부럽기도 했고 말이죠. 그래도 다행인 건 딸내미는 그 행복을 전파하는 능력까지 겸비했다는 겁니다. 딸내미 덕분에 저는 놓치고 있던 행복의 순간들을 인지하게 되었고, 주변에서는 그런 저를 ‘딸바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딸바보라서 행복합니다.


 참 기분 좋은 수식어입니다. 자꾸 들어도 질리지 않고 말입니다. 소신 운운하며 딩크족을 외치다가 어쩌다 보니 딸바보까지 되었는데, 그저 기분 좋고 행복한 요즘입니다. 가끔 딸내미와의 과한 애착으로 서운해하는 아내에게 미안한 것만 빼면 완벽합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제가 행복을 놓치지 않고 느끼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내도 더 행복해졌다는 사실을 말이죠. (여보, 맞지?) 딩크족이었던 과거를 회상하면 어떻게 이렇게 됐나 싶지만, 뭐 큰 상관있겠습니까. 과정이야 어찌 됐건 지금 이 순간 행복하면 되는 거죠.


 아이가 있어야 더 행복한 건 아닙니다. 딩크족에서 딸바보가 되어 더 큰 행복을 느끼고 있는 저이지만, 어디까지나 제 경우일 뿐입니다.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이 들긴 합니다.


 '딸내미가 없었어도 이렇게 행복했을까?'


 딸바보라서 너무 행복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