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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음 Apr 28. 2021

TV 없었으면 육아 어쩔번봤냐

29살 삼촌의 육아일기 #04

    “TV 보여줘도 된다고?”


누나한테 육아 인수인계를 받을 때, 내가 했던 말이다. 나는 육아는 잘 모르지만, 애기한테 TV를 보여주는 게 왠지 찜찜했기에 되물었다.


    “보여줘. 안 그러면 네가 너무 힘들 거야.”


누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만약 애가 생기면 거실에 TV를 없애고, 책장을 놓아서 책을 들여야지!'


애를 갖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누구나 종종 '만약 애를 낳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공상에 빠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거실에 TV를 놓지 말고, 책장을 들여 책을 놓고 싶었다.


TV나 뉴스에서 나오는 내용들을 잠깐 인용하자면, 활자에 흥미가 생기기도 전에 미디어에 익숙해지면 독서가 어려워지고, 이는 요새 아이들의 독해력 부족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사실 나도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독서는 인위적인 행동이다. 몇 시간 동안을 일부러 집중해야 독서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습관이 없으면 독서하기가 참 힘들다. 근데 뉴스에서 보도되는 것처럼, 독서 습관이 들기도 전에 미디어에 익숙해지는 게 대부분의 현실이다. 그래서 만약 애를 갖게 된다면, TV를 없애는 것도 좋은 교육 방법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오늘도 조카에게 TV를 보여주고 있다.



현실 육아에 부딪히니 TV는 참 고마운 존재였다.


누나 말대로 였다. TV를 보여주지 않으면 너무 힘들었다. 고등학교 국어 수업시간에 한국 고전소설을 배우고 있었는데, 거기에 “몸에 좋은 것을 밝히시는 진사 댁 어르신이 새벽마다 어린아이 오줌을 받아오게 해 드셨다”라는 구절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때는 '몸에 좋다고 애 오줌까지 마셔?'라고 생각했는데, 육아를 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천년 묵은 산삼처럼 애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에너자이저였다. 


하원 해서 누나네 집까지 가는데 1시간 정도 걸린다. 물리적으로 거리가 먼 게 아니다. 성인 기준으로 5분이면 닿는 거리다. 그런데도 오래 걸리는 이유는 1) 어린이집 나와서 꽃구경하고, 2) 지나가는 개미들 구경하고, 3) 차 밑에 있는 야옹이랑 인사하고, 4) 나무 밑에 나뭇가지 찾아서 검투사 놀이하고, 5) 놀이터 지나가다 미끄럼틀 한번 타야 하고, 6) 빵집 보이면 들려서 단팥빵 하나 사야 하고, 7) 마트 보이면 뽀로로 보리차 하나 사야 하고 등등 하원 해서 집에 오기까지 애기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1시간 동안 애기랑 돌아다니다 집에 오면 녹초가 된다. 그래도 애기는 팔딱팔딱거린다. 집에 오자마자 손을 씻기고 옷을 벗기면, 배가 고프다고 아까 산 빵이랑 물을 달라고 한다. 한 차례 맥이고 나면, 에너지 충전이 됐는지 장난감 방으로 나를 끌고 가서, 장난감 총 한 자루를 쥐어준다. 그리고 전쟁놀이로 2차전이 시작된다.


전쟁놀이가 마무리됐다 싶으면, 다시 한차례 우유를 먹으면서 에너지 수혈을 한다. 우유를 다 먹으면 역할놀이를 시작한다. 장난감 의사 가방을 꺼내와서 내 귀에 억지로 장난감 체온계를 집어넣는다. 아프다고 말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이런 식으로 다시 1시간 정도 놀아준다.



아이랑 2시간 정도 놀면 정말 뻗는다. 물리적 강도는 몸을 쓰는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그 외 비슷한 일을 하는 것보다는 낮다. 그런데 혼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 몸이 축축 쳐지고 입에서 양파맛 같은 게 난다. 그렇게 지쳐갈 찰나, 애기는 이제 TV를 틀어달라고 한다.


이때 TV 시청은 정말 가뭄의 단비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도 잠잠해지고, 계속 따라다니던 어른도 쉴 수 있다. 뽀로로 채널을 틀어주고 아이가 거기에 빠지면, 녹초 된 심신에 안정이 찾아온다.




어쩌면 누군가는 ‘애한테 TV를 왜 보여줘? 애 보는 게 그렇게 힘들어? 어린이집도 갔다 오는데?’라고 생각하며, 아이에게 TV 시청을 시키는 사람들을 싫어할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물리적 노동 강도 자체가 강한 편은 아니다. 하루 종일 물류 터미널에서 택배를 나르거나, 편의점이나 피시방에서 온갖 일을 하거나, 하물며 사무실에서 9시간 정도 앉아있는 일이 더 힘들 수도 있다. 또 일하면서 여기저기 부딪히는 인간관계 스트레스도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아는 힘들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육아의 힘든 점은 ‘노심초사’라는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 다른 일들처럼 직접 몸을 쓰거나 머리를 쓰지 않지만, 신경을 곤두세워 아이가 다칠까 계속 지켜봐야 한다. 이것은 흡사 옛날 재미없는 4시간짜리 흑백 무성영화에서, 주인공이 언제 죽을까 초단위로 기록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별거 아닌 일 같지만, 하고 나면 정말 질린다는 게 어떤 뜻인지 알게 된다.


그 속에서 TV 보기는 예민해진 신경을 안정시켜주는 고마운 일과다. 물론 애기한테 TV를 안보여주고 함께 계속 놀아주는 게 더 좋기는 하겠지만, 나는 아직 그럴 내공이 안된다. 그래도 양심상 찔려서 1시간 정도만 보여주고 있다. 종종 힘들 때 그날 하루 내내 TV를 보여주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만, 애한테 못할 짓 같아서 마음을 다잡고 1시간만 보여준다.   


전까지 TV를 육아의 악으로 규정했던 나는, 현실 육아에 부딪히면서 TV의 고마움을 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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