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 삼촌의 육아일기 #05
여느 때처럼 조카를 하원 시키러 엄마와 어린이집에 가는 길이였다.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엄마는 아이를 데리러 갔다. 그런데 밖으로 나온 엄마의 얼굴이 좋지 않아 보였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애가 다른 애들에 비해 말이 좀 느리다네..."
"에이... 애들이라고 다 똑같나. 누구는 빠를 수 도 있고, 누구는 느릴 수도 있지, 뭘"
"그지?"
"그럼! 사람마다 다른 거지!"
아이가 말이 조금 느린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의사표시를 하고 말을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어, 엄마는 큰 걱정 없이 지내고 계셨다. 그런데 막상 어린이집에서 말이 느리다는 얘기를 들으니, 걱정이 되신 것 같았다.
"책을 좀 읽어주라네?"
"책? 그 나이에 무슨 책을 읽어. 그냥 노는 게 걔 할 일 아닌가?"
원장님이 말을 틔게 하려면 책을 좀 읽어주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조금 의아했다. 그 나이에 몇 명이나 책을 읽고 있겠는가? 보통 장난감 갖고 놀거나 놀이터에서 뛰어다닐 나이인데. 말이 느리긴 하지만 자기 속도에 맞춰서 말을 하는 거지,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또 책을 안 읽어서 말이 느린 거라면, 말을 잘하는 아이들은 책을 많이 읽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아이를 하원 시키고 누나네 집으로 왔다. 엄마는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줬다. 엄마도 누나에게 애가 말이 느린 것은 맞지만, 사람마다 다른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애기 책 좀 읽혀줄 수 있니?"
"책? 걔가 책 보자고 하면 가만히 볼까?"
"그래도... 한번 읽혀봐야 할 것 같아..."
아이가 문제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말이 느린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렇게 내 베이비 시터 역할에 책 읽혀주기가 추가됐다.
일단 누나네 집에 책 몇 권이 있으니 그것부터 읽혀보라고 했다. 다음날 아이를 하원 시키고 누나네 집에 가서 책들을 확인해보니, 너무 재미없는 책들이었다. 개미, 원숭이, 나비 등 과 같은 동물에 관한 책이었는데 나조차도 재미가 없어 책장이 안 넘어갔다. 그래도 책을 읽혀보려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1분도 집중하지 못했다.
"누나... 책이 너무 재미가 없다"
"아... 그래? 책을 새로 사야 하나?”
“이런 책들 말고 애들이 좋아하는 캐릭터 책 같은 거 사주면 좋아할 거 같은데...”
“혹시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그런 책 좀 알아봐 줄 수 있어? 돈은 누나가 따로 줄게!”
"음... 그러면 일단 내가 중고로 한번 알아볼게"
"그래 알겠어! 고마워!"
사실 그때 조카는 타요랑 뽀로로를 좋아했다. 말은 잘 못해도 “티브이 틀어줄까?” 물어보면, “뽀로로” 혹은 “타요”라고 말했다. 별 관심 없는 원숭이나 개미가 그려진 책 보단, 그래도 타요랑 뽀로로가 그려진 책을 좋아하지 않을까 해서 일단 관련 캐릭터 책을 주문했다.
역시 예상대로 책에 뽀로로랑 타요가 그려져 있으니, 조카는 뭔지도 모른 채 일단 신나서 책을 집었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면서 그림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또 어떤 책은 소리가 나기도 하고, 어떤 책은 팝업이 튀어나오니, 조카는 한동안 거기에 관심을 뺏겨 책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했다.
책을 사기는 했지만, 일단 책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아직 애기다 보니 책이 뭔지, 뭐에 쓰는지, 어떻게 읽는 건지 등 책에 대한 개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한 일주일 동안은 장난감처럼 책을 갖고 놀게 했다. 그림을 구경시키기도 하고 책에 달려있는 버튼도 눌러보게 하면서, ‘책이 어렵지 않고 재밌다’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읽는 것에 대한 친숙함을 갖게 했다.
그리고 그다음 주, 처음으로 책을 읽혀봤다. 신기하게도 아이가 앉아서 책을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말 반신반의했다. '애가 집중을 할까? 아직 글도 모르는데...'라는 생각이었다. 사실 성인들에게도 책 한 권을 끝까지 읽는 게 참 힘든 일인데, 비록 양이 작기는 해도 애가 그걸 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너무 잘 읽었다. 구연동화까지는 못해줬지만, 최대한 또박또박하게 읽어줬다. 요즘 책들이 스토리가 다 잘 짜여있어서 애기도 재밌어했다.
이제는 애기가 책을 잘 읽는다. 그렇지만 여전히 티브이를 제일 좋아한다. 그래도 발전이 하나 있다. 책을 읽기 시작했던 순간부터, 티브이를 보려면 꼭 책을 먼저 읽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처음에는 말을 잘 듣지 않더니, 어느 순간부터 티브이를 보고 싶으면 직접 책을 갖고 와 읽어달라고 했다. 또 내가 없을 때 누나나 매형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전보다 책에 많이 익숙해졌고, 습관도 잘 들어가고 있다. 덕분에 기분 탓일지는 몰라도 구사하는 단어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전문적인 베이비 시터도 아니고, 또 내 애기도 아니기 때문에 큰 사명감을 갖고 책을 읽어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막상 애가 잘 읽고 습관이 든 모습을 보니, 조카라고 해도 기특하고 대견하다. 그래서 요즘에는 서점에 갈 때 애기 책도 한두 권씩 사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