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라이팅 32.흔적

250910 프리라이팅

by 우주

18:59 프리라이팅 시작. 오늘의 주제는 흔적.


며칠 전부터 프리라이팅을 하는데 자꾸 머리를 싸매고 앉아 있는 나를 보게 된다. 글은 자신을 나타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약간이라도 고민한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 갈수록 시간이 더 걸리고 있다. 지금도 59분에 시작했다고 적었지만 벌써 7시 6분이다. 그냥 적으면 되는데 그 '그냥'이 쉽지 않다. 머릿속에 글을 퍼올리는 우물이 하나 있는데, 그 우물의 사방이 알 수 없는 것으로 꽉 막혀있는 기분이다. 대단한 문장을 적으려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는 걸까? 아무래도 브런치에 프리라이팅을 올리는 건 오늘을 끝으로 당분간 보류해야 할 것 같다.


내 방에는 나의 흔적이 가득하다. 지나치게 가득하다. 머리카락은 왜 이렇게 많이 빠지는 건지, 탈모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처방받은 알약을 먹고 치우지 않은 비닐봉지, 다 쓴 핸드크림, 유통기한이 지난 달까지였던 인공눈물. 알바할 때 챙겨 가려고 아무렇게나 급하게 뜯어둔 일회용 마스크, 실크 벽지와 어울리지 않게 촌스러운 분홍색 액자에 담긴 아기 때 찍은 사진. 무엇보다도 방에 딸린 베란다에 정신 없이 모여 있는 나의 쇼핑백과 에코백 속 짐들. 이렇게 나열해보니 내가 나름 무질서의 질서를 갖추고 산다고 생각했던 것에 의구심이 든다. 아빠는 굉장히 깔끔하신 스타일인데, 아무래도 내가 평균에 비해 어지럽히는 스타일인 것을 인정해야겠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태어난 인간은 죽을 때 역시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는데, 어째서 사는 동안 그렇게 열심히 '나 여기 살았소' 하고 흔적을 남기려고 하는 걸까? 죽으면 잊히기 마련인데 누군가 기억해주기를 바라서 그러나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살아있는 한 떠난 이는 죽어도 죽은 게 아니라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그냥 방을 마음대로 어지럽힌 채 살고 싶은데 너무 거창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지에 따라 이 많은 흔적들 중 몇 개는 미리 치워둘 결심을 할 수 있게 된다.


32일 동안 프리라이팅을 쓰면서 내가 남긴 흔적은 어떻게 기억될까? 이렇게 적고 또 내일 33일째 프리라이팅을 들고 올 지도 모르지. 일단 오늘도 무사히 프리라이팅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이 기쁘다.


19:27 마침.

(타이머 10:17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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