빡빡했던 시절

by 최봉기

최근 간간이 50여년전 10대 때의 얘깃거리들이 머리에서 꿈틀댐을 느끼곤 한다. 그 시절은 왜 그리도 생활들이 빡빡했을까? 지금은 토요 휴무지만 그땐 학교나 직장도 오전까지 정상적으로 운영됨에 따라 토요일 오후부터나 주말의 시작이었다. 일요일 외에 간혹 있는 휴일엔 새벽부터 놀러 가려는 인파들로 시내 곳곳이 북적거렸고 지금처럼 자가용으로 어딜 간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우리가 초딩때 고등학생 형들과 누님들은 하루 쉬는 날이 되면 삼삼오오로 기타와 배낭에 코펠, 버너, 과자 등을 넣어 남녀가 한 팀으로 움직였다. 개중엔 보이 스카우트이나 걸 스카우트 복장을 하고 환타나 사이다 콜라 등을 박스채로 들고 이동하기도 하였다. 나의 고향 부산에선 주로 가던 곳이 초읍의 어린이 대공원, 범어사, 동래산성 아니면 부산을 벗어난 양산의 통도사, 내원사, 덕평 계곡 등이 아니었던가?


서두에서 언급했던 '빡빡함'이란 의미는 그 밖에도 다양하게 느껴지는데 당시엔 63년생까지 베이비붐으로 집마다 자녀들이 서너 명 혹은 다섯씩 되었기에 친구들 집에 가보면 한방에 둘 혹은 셋씩 책상을 놓고 생활을 했고 어떤 경우엔 다락에까지 상을 펴놓고 공부를 하기도 했었는데 대개 다락엔 멸치나 메주를 보관하곤 하여 그 꼬랑한 냄새가 진동하기도 했다. 그래도 시험이 다가오면 그 공간에 백열등 스탠드를 켜고 앉아 늦게까지 공부를 했는데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앉으면 마치 녹음실처럼 소음 없이 집중이 잘 되어 최적의 독서실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엔 집집마다 어린애들이나 중고교생까지 쪽수가 많아 골목에서 축구, 야구를 비롯 복상에서 씨름 등 각종 스포츠를 비롯 연날리기에서 구슬놀이에 고무줄 놀이 등 온갖 놀이마당이 펼쳐지기도 하였다. 각 동네의 축구나 야구팀은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들로 구성이 되어 간혹은 옆동네의 팀과 돈내기 축구나 야구 시합을 하기도 했는데 내기가 걸릴 땐 서로 패배자가 되지 않으려고 눈에 빛이 번득이기도 하였으며 애매한 판정이 있을 경우엔 패거리로 싸움이 일어날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하였다. 지금처럼 구민 체육시설도 없었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해가 질 때까지 어찌도 그리 재미있게 놀았는지 이해가 안 되기도 한다.


그 시절엔 집에서 목욕을 한다는 것은 소수의 부잣집에서나 가능했기에 대부분이 일주일에 한 번 대중목욕탕을 갔고 명절 전엔 목욕탕에서 여러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우리들끼리는 몰라도 아버지에게 다른 친구 혹은 담임 선생님이 와 계신다고 하면 얼른 씻고 몰래 빠져나가려 하시기도 하였다. 당시엔 목욕비 아끼느라 한번 목욕을 가서는 본전 뽑느라 몸의 구석구석을 뻘건 이태리타월로 빡빡 밀어 피부에 반점 같은 자국이 생기기도 하였다. 내가 알던 한 친구는 집이 치과를 하며 부유하게 살았는데 기름보일러를 가동하며 자기네 집 목욕탕에서 목욕을 했는데 당시로서는 일반 주택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이상 당시의 빡빡했던 삶의 기억을 휴일 나들이, 공부방, 목욕 등으로 구분하여 스케치해 보았다.

지금 우리 자녀들에게 그 시절 얘기를 한 번씩 하면 애 엄마가 잔소리한다고 할 때도 있고 애들도 애써 듣는 척만 할 뿐이지만 진정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솔직히 며칠 전이 6.25일이었지만 우리들도 과거 어른들이 한국전쟁 때 피난 가거나 전쟁하던 끔찍한 얘길 할 때 제대로 귀를 기울였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과거의 빡빡함을 잘 견디며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려 노력했기에 지금과 같은 좀 더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엔 남다른 의미를 부여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만일 과거 70년대 '빡빡함' 체험 행사를 한다면 위에서 언급한 다락방 공부, 휴일 일찍 집 주변 벗어나기, 콩나물과 같던 대중목욕탕의 모습으로 재현해도 어색하지 않을 듯하다. 이밖에 만원 버스로 먼 거리 통학, 명절빔 사러 국제시장 갔던 일, 성탄 때 교회에 줄 서서 빵 받아 오든 일 등의 유사한 '빡빡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청소년 비행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