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때 조선에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일본인 관료나 경찰들의 통제를 받으며 살았다. 우리말도 쓰지 못했고 '創氏改名'이라고 해서 이름도 일본 이름을 사용해야 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쌀배급도 받을 수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는 말들이 나온다. 하지만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고 독립을 부르짖던 사람들을 고문한 사람들도 있었고 끝까지 일본에 저항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만일 내가 일제 강점기 때 조선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할 정도의 강심장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일본제국의 개로 살진 않았을 것 같다. 모르긴 해도 싫지만 일본이 시키는 대로 일본말을 하면서 조선이 일본의 속박에서 벗어날 날만 손 모아 기다렸을 것 같다.
나는 목숨을 걸고 투쟁을 했던 김구나 정치력을 발휘해 대통령이 되었던 이승만의 존재로 인해 해방 후 정국에서 뜻을 펴지 못하고 반대세력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송진우, 장덕수와 여운형 같은 정치인들과 한국전쟁 때 납북되던 중 병사한 김규식과 같은 민족지도자들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조선이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1919년 3.1 운동이 있은 후 일본의 힘은 갈수록 강해지자 국내의 지식인들은 일본에 저항하는 게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느끼며 親日로 돌아섰다. 일본이 싫어 조선을 떠났던 사람들은 만주, 중국, 연해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변절자의 상징이 되어버린 이광수나 최남선 외에 국내와 해외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면서 옥고도 치렀던 지식인들이 더러 있었다.
해방이 되고 나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문제를 놓고 '美蘇공동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국내에서는 '左右합작'이란 걸 통해 극우와 극좌 간 충돌을 막고 민족의 통합에 힘쓰던 중도파 여운형이 피살되며 결국 남북은 분단을 맞이했다.
해방 후 조선의 운명을 놓고 美蘇가 이해관계를 조율할 당시에 소련은 '贊託'이 아닌 조선을 바로 독립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당시 여론이 70%가 사회주의를 원하는 걸로 나왔기에 바로 독립시키는 게 자기네들에 가장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소련이 贊託 입장이라는 걸로 오보가 되었고 그게 잘못된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던 한 사람이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언론인이자 교육자였던 '송진우'이다. 그다음에 비슷한 입장을 견지하며 미군정과 말이 통했던 한 인물이 집에 찾아온 제복을 입은 경찰에 의해 카빈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 후 미국과 소련의 중요회담을 앞두고 그것도 경찰서 앞에서 한 인물이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는 김규식을 도와 '美蘇공동위원회'와 '좌우합작'에 힘을 쏟던 '여운형'이다.
현재 한반도의 분단은 그 역사가 70년이 지나고 있다. 贊託과 反託으로 시작된 분열이 고착된 것이다. 권력쟁취 과정에 이데올로기가 깊이 침투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앞으로 언젠가는 남북간 통일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 북한의 정치 지도자들은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를 세웠기에 남북이 분단되었다는 주장을 강하게 펼지 모른다. 우리는 그때 어떻게든 민족의 분단은 막기 위해 남한의 정치지도자 두 명이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삼팔선을 넘어 북에 협상을 하러 올라갔다는 사실로 반박해야 하리라 본다. 이는 일본이 실패로 끝났다고 말할지 모르는 민족의 거국적 저항운동인 '3.1 운동'만큼 무서운 힘을 가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