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薄紗 고깔에 감추오고"로시작하는 시가 조지훈의 '僧舞'이다. 나는 절을 찾아 禮佛을 올려본 일도 없고 찬불가를 불러본 적도 없다. 어려서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주일마다 빠지지 않고 미사에 참여했다. 그 이유는 주일 미사를 빠지면 '大罪'가 되어 죽으면 마귀들이 괴롭히는 지옥에 간다고 배워왔기에 그러하다. 그후에도 신앙생활을 줄곳 했지만 주일에 거룩한 척한다고 올바른 신앙인이 되는 건 아니란 생각에 지금은 주일에도 교회에 나가지 않고 조용히 지내고 있다.
나는 살면서 불교와 우스꽝스러운 인연이 있다. 고 1 때 수학시험을 망치고는 머리를 빡빡 밀어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교실에 갔더니 갑자기 별명이 '스님'이 되어버렸다. 스님 앞에 내 이름까지 붙여 '봉기스님'혹은 '봉기대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영어 수업시간에 무기명으로 존경하는 인물을 적게 했을 때 장난 삼아 '원효대사'라고 적었는데 선생님이 쪽지를 펴서 "원효대사?" 하며 얄궂은 표정을 짓자 반 친구들이 전부 나를 보면서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그러한 에피소드 외에 딱히 불교와 관련된 인연은 없었는데 대학교 때 법정스님의 '서있는 사람들'과 '無所有'란 책을 보며 인도 철학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인도 철학에서는 우리가 흔히 중시하는 '論理的인 사고' 즉 "뭐가 낫고 못한 지" 등을 놓고 따지는 知識 단계의 사고를 매우 하찮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한 낮은 단계에서 知慧라는 단계로 올라가면 뭐가 잘나고 못난 지 등을 따지는 것은 별 의미도 없고 모든 게 하나로 통합 내지 포용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이 소위 말하는 '道"의 단계가 아닐까 싶다.
최근 유튜브를 통해 '죽음학'에 관한 내용을 접한 적이 있다. 죽음학에 심취했던 한 미국인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는데 죽음 관련해 前生에 관한 내용을 접하고는 성서를 다시 한번 샅샅이 정독해 보았다고 한다. 성서에는 어디에도 전생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전생을 부정하는 내용도 성서 어디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전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만일 내가 스님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절에 대학입시 합격 기원 5만 원, 승진 기원 10만 원, 사업성공 기원 20만 원 등과 같은 기복적인 것들을 없애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을 진정 따르는 사람이라면 야박한 세상에서 사업에서 실패하는 게 어찌 보면 불법에 맞지 않나 싶기도 하다.
또한 고승이 타계할 때 火葬하는 데 가서 사리의 수나 모양을 보면서 감탄하기보다 그 고승이 생전에 설법하신 내용을 떠올리며 실천하도록 하고자 했을 것이다.
지금 야당이 대표직 사임 관련해 당원들끼리 핏대를 올린다든지 북한이 핵실험을 하면서 남한을 협박하는 것도 법정스님 저서의 내용에 따르면 하찮은 단계에서 서로 잘났다고 우기는 짓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상반된 정치적 주장들도 진정 통합되고 포용되는 단계로 가고 세상의 살상무기를 모두 태평양 한가운데에 가져가 처분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이 곧 極樂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