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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가 술집 주인이라면?

by 최봉기

술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밥보다는 뒤에 나왔음에 틀림없다. 당장 먹을 것도 없는데 술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먹고살만할 때는 술이 늘 함께 하며 또한 먹을 게 있을 때 식욕과 흥을 돋우워 주는 게 술이다. 따라서 東西古今 할 것 없이 인류의 역사에서 술이 없었다면 삶이 무척 냉랭했을지도 모른다. 이토록 술이 인간의 삶과 밀접한 걸 보면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감정을 소유하며 그 감정은 술과 나름 가까운 관계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과거에 잠시 알던 한 여자는 나랑 관계가 나쁘지 않을 때 술에 관해 말을 꺼내자 술이란 건 없이도 사회생활은 할 수 있다고 했다. 그 후 그녀는 나의 처지가 어려워져 헤어질 때가 됐을 때에는 무척 차갑고 이기적이며 위선적인 모습까지 보였다. 그 후 내가 결혼한 후 일부러 연락을 한 적이 있었는데 한번 보자고 했더니 과거 위선으로 가득 차 당당하던 모습은 오간데 없고 켕기는 데가 있는지 징징 짜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술이란 건 어찌 보면 차가운 이성 속에 자리하는 인간의 따뜻한 마음을 가늠하는 하나의 척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후 나는 그 여자의 흔적을 나의 삶 속에서 아예 지워버렸다.


세상에 존재하는 술은 종류가 무척 많다. 서양의 위스키와 맥주, 중국의 고량주와 마오타이, 러시아의 보드카, 일본의 사케, 멕시코의 떼낄라, 우리나라의 소주와 막걸리 등이 있는데 각각의 술은 나라별 자연환경이나 식습관과도 관련이 있다.


술마다 술과 잘 어울리는 음식이 있다. 毒酒는 야채나 생선보다 고기가 잘 어울리며 고기를 먹을 때는 야채가 필요하다. 술의 재료로는 포도 등 과일을 비롯 쌀, 호밀, 감자 등 곡식과 꽃 혹은 선인장까지 다양하다. 각종 재료는 술의 향을 좌우하기도 한다. 날씨도 술에 영향을 주는데 화창한 날에는 생선회에 소주, 비 오는 날은 파전에 막걸리 등이 어울리기도 한다.


술과 밀접한 직업군으로 우선 문인이나 예술가가 떠오른다. 이들은 술을 마시면 감성적이 됨에 따라 창작활동이 왕성해진다고 한다. 고인이 된 소설가 이외수는 늘 술에 쩔인 채 작업을 했고 양주동교수도 알아주는 주당이었다. 대학교수나 교사는 분필가루를 늘 마시고, 건설노동자나 군인은 먼지 속에서 활동하다 보니 퇴근 후 술과 돼지고기로 목을 씻어내는 일이 많다. 또한 의사들은 몇 시간 동안 긴장해서 수술을 하고 난 다음 술을 찾는 일이 많다고 한다.


만일 내가 술집주인이라면 어땠을까? 술집은 돈벌이하기가 음식점보다 나아서 잘만 하면 돈도 꽤나 벌 수 있다고 생각된다. 밥은 한 공기면 배가 부르지만 술은 어떤 이는 혼자서도 여러 병을 마시며 술과 함께 안주도 먹기에 매상이 밥보다는 많아지게 된다. 과거에는 외상거래가 많아 미수로 낭패를 봤지만 지금은 카드로 결제하기에 그럴 위험도 없다. 술집은 메뉴나 분위기 또한 중요하지만 일단 한잔이 들어가면 알코올의 흥분효과로 누구나 기분이 좋아짐에 따라 말리지 않아도 알아서 늦은 시간까지 먹고 마시므로 물장사는 꽤 좋은 사업이란 생각이 든다.


술집은 어찌 보면 인생 喜怒哀樂의 축소판일지 모른다. 사업이나 투자를 해서 돈을 벌었거나 자녀가 대학입시 혹은 취업시험에 합격한 경우 기분이 좋아서 거하게 한턱을 내기도 하며 반대의 경우에는 위로주도 마신다. 또한 失戀을 당했거나 이혼을 한 경우 맨 먼저 찾는 곳은 술집이며 최근 사회적 이슈와 정치, 연예 관련 가십거리와 스포츠 등 관련 화제들이 웃음 혹은 넋두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올라가기도 한다.


2004년 EBS의 24부작 '명동백작'이란 드라마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명동의 뒷골목에서 막걸리를 기울이던 문인들과 건달에 관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시인 박인환, 김수영, 오상순을 포함해 전혜린, 김붕구와 명동의 주먹패 신상사와 이와룡 등이 나오는데 비록 가진 건 없지만 당시 문인들의 고뇌 혹은 애환과 함께 낭만 주먹들의 모습도 그려진다. 과거 명동 뒷골목 허름한 술집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현재 풍요로운 삶 속에서 느낄 수 없는 순수한 인간들의 숨소리와 함께 끈끈한 정을 보여주었다.


부자가 고급술집에서나 마시는 '밸런타인 30년 산'과 같은 고가의 양주는 목에 넘어갈 때 여유로움을 느끼게 할지 모른다. 반면 서민들이 옹기종기 앉아 나누는 소주나 막걸리는 그 기운이 온몸으로 퍼질 때 인간들 간의 무거운 장벽을 허물고 거액의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인간들 간의 교감을 만끽하게 해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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