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걸음걸이 때부터 주변의 또래들과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기싸움이 시작되고 학교에 입학하면 시험을 통해 경쟁은 본격화된다. 그러한 틀은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할 때나 대학원에 가서 석박사 학위를 받을 때도 별반 차이가 없다. 박사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자격시험과 학위논문을 통과하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며 직장생활에서도 업무성적인 고과에 따라 진급이 결정되기에 마음을 내려놓고 제대로 푹 쉬기조차 어렵다. 사실 평가라는 건 1등에서 꼴찌까지 가리는 것이지만 어찌 보면 처음부터 결과는 대충 정해지는 건지도 모른다. 결과는 반드시 노력한 만큼 나오는 건 아니다.
평가 말고도 인간을 괴롭히는 게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이다. 누구나 인간이라면 자신만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 하지만 때로는 불편한 인간관계 속에서 표현도 잘 하지 못하며 부자연스럽게 지낸다. 얼굴을 맞대기도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함께 지내는 일은 부부간에도 존재한다. 학교나 직장에서도 이런 일은 끊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돌아보더라도 과거 불쾌했던 일이 기쁘게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기는 어렵다. 살면서 맞이하는 이러한 곤혹스러움을 떨치는 방법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라고 한다.
결국 피할 수 없는 경쟁과 인간들 사이의 부자연스러움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참고 일하는 것 말고 별 다른 방법이 없다. 특별한 대안도 없이 중간에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일했던 직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부정적인 기억들이 더 많을지 모른다. 상사란 이에게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던 일, 위에서 별로 하고 싶지도 않던 일을 시킬 때 싫은 내색도 하지 못했던 일, 구조조정 얘기가 나올 때 초긴장감속에서 불안해하던 일 등이 그러하다.
시간이란 건 호수처럼 고여있는 물이라기보다 끝없이 출렁이며 오고 감을 반복하는 파도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른다. 또한 인생이란 그 물결 위에 배를 띄우고 방향에 맞도록 노를 저으며 전진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어디론가로 방향을 정하면 그곳을 향해 가면 되지 뒤를 돌아본다는 건 사실 큰 의미는 없다. 살다 보면 왕년에 자신이 잘 나가던 시절의 일들을 자랑삼아 떠벌이는 이들도 있다. 현재 자신의 모습이 초라할수록 미래보다는 과거에 목을 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거쳐온 삶의 흔적이 머릿속에 마치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그러한 것들은 일부러 들춰내지 않는다면 아마도 시간이란 파도에 실려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어느 곳인가에 머물다 사라질 것이다. 한때 잘난 체하다 누군가에 의해 창피당했던 기억들, 지나치게 순수했다가 닳고 닳은 누군가에 의해 뒤통수를 맞던 기억들, 불안감과 초조함속에서 조마조마하던 기억 등도 시간이 흐르면 그런 때도 있었나 싶어 진다.
한평생을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살아온 사람이라면 남들이 알아주었든 그렇지 않든 되돌아보면 시간의 그림자 속에 묻힐 또 하나의 존재가 아니겠는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살다가 중도에 삶을 포기한 사람이라면 삶이 뭔지도 모른 체 사라진 존재일지도 모른다. 생과 사라는 건 인간이 선택할 사항은 아니기 때문이다.
군이란 곳에 입대하여 전역할 때 그간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실소를 금할 길이 없다. 신병훈련 때 학력에 열등의식이 있어 보이는 일병 계급의 어린 조교는 총검술 훈련 때 대학원을 마치고 늦게 입대한 자기 삼촌나이의 한 신병을 표적 삼아 마치 신세한탄이라도 하듯 온갖 욕설을 퍼붓는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멀찍이서 이를 지켜보던 선임 조교 하나는 힘들어하는 늙은 신병에게 "힘들지 않아?"하고 묻고는 "힘들면 말해"란 말을 슬쩍 건넨다.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달아놓아도 간다고 시간은 흘러 전역일이 되어 군복을 벗으면 군에서 만난 이들은 사회에서 볼 일도 없고 군에서 있었던 일들은 뿌연 먼지가 되어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다.
이렇듯 삶의 흔적은 지워지는 것이기에 지나간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과거의 일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니 마음이 이렇게 편할 수 없다. 눈을 감고 세상과 이별을 할 때에는 더욱 마음이 편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