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한 친구를 만났다. 오랜만에 낮술도 한잔 하며 이야기를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가 나에게 말한다.
<가끔 너의 글이나 피드를 보면 대단하면서도 정말 네가 행복할까? 행복한 거 맞겠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아무리 미래를 위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행복한 것이 맞을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친구 주변엔 수입의 50% 이상 저축하며 사는 사람이 없다고, 나 같이 사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한다.
생각을 해봤다. 행복한가? 불행하진 않다. 그렇다고 안 힘든 것도 아니다. 돈을 아끼고 모으며 사는 게 쉬운 게 아니기에 늘 행복할 수는 없다. 내가 감당해야 할 부분임을 알기에 나는 기꺼이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오히려 계획 없는 소비가 나에겐 더 큰 스트레스라는 것을 내가 알기에 나는 지금이 싫다고 말할 수는 없다.
미혼인 친구와 결혼 4년 차 아이 한 명을 기르고 있는 나, 우리의 시선은 다를 수밖에 없다.
혼자일 때 바라보는 시선인 친구에게 나의 시선을 강요할 수 없듯이,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을 친구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누군가의 삶을 내가 직접 살아보지 않는 이상은 그 사람의 미래, 가치관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3인 가족 외벌이, 아이 한 명, 50% 이상 저축은 정말 빠듯할 수밖에 없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내가 꾸준히 하는 이유는 내가 나의 삶을 살아오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했을 때 쌓아지는 자산이라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다수가 <30대에 자산을 굴리기 위해 산다고? 돈이 다는 아니잖아?>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내가 부모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갈 때는 각박한 현실이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는 내가 부모의 곁을 떠나 독립을 해야 하는 시기가 올 수 있고, 부모가 내 곁을 떠나 내가 강제적으로 독립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말이다. 사회생활을 하며 독립을 할 수도 있지만 결혼이라는 울타리를 만들며 독립을 할 수도 있다.
나는 결혼을 하고 이 울타리를 내가 잘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에게 현실을 배제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혼자 감당할 때와, 내 새끼 내 배우자가 있을 때는 천지차이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돈이 다여서가 아니라, 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종잣돈을 모으고 자산을 지키고 늘려가고 싶은 것이다.
나는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는 종잣돈을 만들 수 있는 황금기라고 본다.
결혼하고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우리의 자산이 마이너스가 되었다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소용이 없는 것이구나 느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았던 우리였을지도 모른다. <저렇게 사는 게 행복할까?>라는 시선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안 힘든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게 없었다면 더 힘들었을 것 같다.
한 해 한 해 우리의 자산은 조금이라도 늘어났으니까,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30대에 의해 우리의 40대가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나는 지금 내가 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