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그래도 사랑해

by 구민성

단편-그래도 사랑해

“야, 이 더러운 새꺄! 니가 인간이야? 엉? 대답해 봐, 이 개자식아!”

동수는 눈이 뒤집어졌다. 중환자실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누워 있는 변장일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평소에 온순해서 순둥이로 통하는 동수의 눈에서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니 그것은 당장 사람을 죽이기라도 할 것 같은 살기였다. 몸이 온통 붕대로 둘둘 감긴 변장일의 핏발 선 눈에는 공포감이 비쳤다. 그는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저, 고객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분은 중환자라서 위험합니다.”

젊은 의사와 남자 간호사가 겨우 뜯어말렸으나 동수는 여전히 거친 호흡을 주체하지 못했다. 주먹을 부르르 떨고 어금니도 꽉 악물고 눈물까지 줄줄 흘리는 것이었다. 그의 말과 몸짓은 광기에 가까운 흥분 상태였다.

“실례합니다. 경찰에서 환자분 조사차 나왔는데요.”

정복 입은 중년의 경장이 의사에게 말했다. 그러나 의사가 뭐라 하기도 전에 동수가 먼저 나섰다.

“여보시오, 경찰관. 저 새끼 당장 연행하시오.”

“뭐, 뭐라고요? 댁이 뭔데 그런 소리를 합니까?”

“나요? 나는 남부검찰청의 안동수 검산데 내 말 듣고 저 새끼 연행하시오.”

동수가 호흡을 겨우 고르면서 말을 하자 경장이 거수경례를 붙이고 말했다.

“검사님,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근데 지금 저분은 중환자라서 의사의 허락이 없으면 절차상…….”

“절차는 인간에게 필요하지, 저 새끼는 인간도 아니야. 그러니 얼른 잡아가시오.”

동수가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일갈했다.

“하지만 검사님, 여기서는 의사의 허락이 없으면…….”

“에이, 지기미!”

동수는 벌컥 화를 내면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복도를 한참 서성거리던 그는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호흡 조절하려고 애썼다. 겨우 마음이 조금 가라앉아서 다시 중환자실로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자 간호사가 입구를 막아섰다.

“안 됩니다. 환자분은 혼수상태에서 오늘 겨우 깼습니다. 지금은 절대 안정이 필요하니 나가 주십시오.”

“아니, 잠깐이면 됩니다. 이제 조용히 할게요.”

남자 간호사와 동수는 되느니 마느니 실랑이가 길어졌다. 남자 간호사가 동수의 가슴을 밀어내자 분위기는 더 험해졌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동수는 남자 간호사의 팔을 물어버렸다. 남자 간호사가 팔을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하는 틈에 동수는 변장일에게 달려가서 욕을 뱉으며 머리를 때렸다. 그는 이성을 잃은 광인처럼 날뛰었다.

“이 씨발놈아! 우리 마누라 살려내!”

남자 간호사가 동수를 제지하니까 주먹을 휘두르며 폭언을 퍼부었다. 사람들 중에 있던 키 작은 할머니가 말했다.

“경찰 아저씨, 저 사람 좀 어떻게 해요.”

다른 사람들도 동조했지만 경장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분은 피해자의 남편이시고 더구나 현직 검사님이라…….”

“검사든 판사든 저렇게 미친 행동을 해도 그냥 둬요?”

목소리 걸걸한 중년의 사내가 거들고 나섰다.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리니까 경장이 마지못해 동수에게 다가갔다.

“저, 검사님. 좀 진정하시고…….”

동수는 경장의 뺨을 후려치면서 악을 썼다.

“야, 인마. 너 같으면 마누라 죽인 놈을 용서하겠어?”

“거, 검사님. 그게 저…….”

“씨불이지 말고 저리 비켜, 이 새끼야!”

동수는 경장을 거칠게 밀어내고 다시 침대로 달려가서 변장일을 때리기 시작했다. 변장일이 속수무책으로 몇 번의 주먹질을 당할 때였다. 모두들 겁을 먹고 발만 구르고 있는데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 달려들었다. 청년은 등 뒤에서 동수를 껴안고 크게 말했다.

“경찰 아저씨, 빨리 이 사람 수갑 채우세요.”

하지만 경장은 머뭇거렸다.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체포하라고 소리 지르자 경장도 마지못해 수갑을 채웠다. 힘 좋은 청년이 뒤에서 동수를 껴안고 있으니까 어렵지는 않았다.

“검사님, 죄송합니다. 환자와 간호사의 보호를 위해…… 공무 집행 방해와 특수 폭행 현행범으로 체포하겠습니다.”

경장은 미란다 법칙도 말해줬으나 동수의 발악 소리에 묻혀버렸다.

그날의 험악한 현장은 대충 그렇게 수습되었다.


동수는 실력 있는 젊은 검사였지만 지금은 파면을 당하고 구속까지 되어 있다. 특수 폭행과 공무 집행 방해, 공갈 협박, 기물 파손, 공직자 품위 손상 등 몇 가지의 죄목이 중첩되었지만 판사는 징역 1년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형량을 선고했다. 동수의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하여 내린 판결이다.

그러나 동수는 재판부의 선처에도 불구하고 분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1년 후에 석방되면 반드시 변장일에게 복수하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동수는 속으로 칼을 갈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동수는 교도소 안에서도 매일 악몽에 시달렸다. 온몸이 피범벅 된 아내가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악몽이 반복되었다. 술 취한 변장일이 껄껄 웃으며 비웃는 꿈도 몇 번이나 꾸었다. 그때마다 동수는 치를 떨고 가슴을 쳤다. 하지만 수감 6개월 정도가 지나면서 마음이 좀 바뀌었다. 그동안 석문호흡 지로사의 헌신적인 지로 덕분으로 명상에 집중했다. 지로사는 동수에게 누구를 향한 원망과 복수심을 지워야만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고 했다. 평상심을 되찾기 시작한 동수는 차분한 마음으로 지난 시간을 반추해 보았다.

재약산을 물고 있는 경남 밀양시 단장면이 동수의 고향이다. 그는 산골 출신답게 아주 순박한 남자다. 그의 부모는 남의 집 소작인이었고 암소 배내기 등의 부업으로 근근이 풀칠이나 하는 빈농이었다. 동수의 형제들도 중학교만 겨우 마치고 막일이나 시골 이발소에서 일하며 가난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세 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듣던 동수는 워낙 공부를 잘해서 안선필이 계속 밀어줬다.

“동수야, 니는 열심히 공부해서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워라. 아부지는 니만 믿는다.”

장날이면 안선필은 장터에 나가서 막내아들 자랑하는 것이 큰 낙이었다. 애가 똑똑하다는 사실은 단장면 전체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슬하에 1남 2녀를 둔 김상길 면장이 미래의 사윗감으로 동수를 탐냈다. 그는 안선필에게 막걸리도 자주 샀고 취기가 오르면 사돈이라 부르기도 했다.

동수는 안선필의 소원대로 서울법대에 차석으로 합격했고 면사무소 앞에는 축하 현수막이 걸렸다. 김 면장은 우리 면의 기쁨이라면서 자비로 돼지 한 마리를 잡고 축하 잔치까지 열었다. 뿐만 아니라 김 면장은 동수에게 철마다 토종꿀이나 보약을 보내고 격려금도 수시로 보냈다.

동수는 대학교 졸업하는 그해에 사법고시를 합격했고 고향에는 4년 전보다 더 많은 현수막이 걸렸다. 이번에는 농협 이동식 뷔페로 잔치를 열었다. 물론 기념 타월까지 포함한 비용 일체는 김 면장이 부담했다. 노랑이 김 면장의 통 큰 결단에 사람들이 수군거렸지만 그는 딸의 장래를 위해서 기꺼이 돈을 썼다.

동수는 사법고시를 합격하자 그동안 연기해 왔던 군대에 갔다. 그는 입대 하루 전날 서울까지 찾아온 미애와 함께 잤다. 농협에 근무하는 미애는 이틀 휴가를 얻어서 상경한 것이다. 그 밤에 두 남녀는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다. 소위 말하는 입영전야의 짜릿한 의식이었다. 공부만 하던 동수로서는 여자를 처음 안았던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그의 손길은 몹시 급하고 서툴렀지만 무슨 위대한 과업을 이룬 것처럼 뿌듯한 성취감을 느꼈다.

동수는 제대하고 사법 연수원에 들어갔으며 좋은 성적으로 검사 발령을 받기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다. 그 사이에도 미애와 사랑을 나누며 행복한 결혼을 설계했다. 꿈에 부푼 그들은 적은 월급이지만 맞벌이로 건강한 가정을 만들자고 몇 번이나 맹세했다.

계산적으로 접근하는 김 면장과 달리 미애는 진심으로 동수를 사랑했다. 미애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남의 말을 잘 믿는 성격이었다. 천성이 그래서 그런지 친구들의 장난질 거짓말에도 많이 속았다. 그래도 미애는 친구들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않는 편이었다.

<2>

동수는 비서의 인터폰을 받고 윤두현 검사장실에 들어갔다.

“검사장님, 부르셨습니까?”

“오, 우리 안 검사 왔는가? 이리 와서 앉게.”

“뭐, 시키실 일이라도…….”

“이 사람 보게. 그냥 편하게 앉으라니까.”

동수는 윤 검사장이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지만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자네, 내일 퇴근하고 나와 함께 저녁 한 그릇 하겠나?”

“저, 저녁 말씀입니까?”

“왜, 시간 없는가?”

“아, 아뇨. 그게 아니고…….”

“그럼 됐네. 내일 내 차로 함께 퇴근하자구.”

다음 날, 동수는 검사장을 따라서 장안의 최고급 요정에 갔다. 종업원의 안내로 들어간 방에는 TV 뉴스에서만 보았던 명진 그룹의 박광일 회장이 먼저 와 있었다.

“오, 윤 검사장. 어서 오시오.”

“아이고, 선배님. 먼저 오셨네요. 퇴근 시간이라 차가 어찌나 밀리는지……”

“허허. 괜찮아요. 나도 방금 왔는데 뭐.”

“참, 선배님. 말씀하신 젊은 친구 데려왔습니다.”

검사장의 소개로 동수는 박 회장에게 인사를 했다. 동수는 이렇게 어려운 자리는 처음이라서 술잔을 받는 손이 가볍게 떨렸다.

“자자, 긴장 풀고 한 잔 드시오. 내가 우리 윤 검사장에게 좋은 젊은이 하나 소개해달라고 부탁했소이다. 그러니 안 검사가 내 젊은 친구가 되어주겠소?”

그렇게 해서 박 회장과 동수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며칠 후, 동수는 검사장의 부름을 또 받았다. 검사장은 동수의 주말 일정을 물어보더니 바로 전화를 했다.

“선배님, 안 검사 이번 주말에 시간 된다고 합니다. 네네,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검사장이 동수에게 말했다.

“안 검사 자네, 이번 주말에 박 회장님 댁에 가서 점심 식사하게.”

“네? 왜요?”

“뭐 별 일은 아니고 회장님께서 자네가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야. 하하.”

검사장은 만면에 웃음을 담으며 박 회장 자택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토요일 약속 시간에 찾아 간 박 회장의 집은 매우 크면서도 차분한 분위기의 한옥이었다. 점심은 평양댁 할머니가 직접 빚은 만둣국과 냉면을 먹었다. 박 회장은 언제나 평양댁의 음식이 최고라고 자랑한다.

박 회장은 15년 전에 부인과 사별하고 혈육이라곤 외동딸 주희뿐이다. 주변에서 재혼을 권하는 사람도 많았고 심지어 대학교 동창인 김성배 총리가 중매를 해준다고 해도 손사래를 쳤다. 그는 재혼할 경우에 재산 중 절반이 새 아내의 몫이 될 것이고 후처와 전처 자식의 갈등 구조도 예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과 딸과의 관계에도 틈이 생기기 쉽고 그것은 견디기 힘든 불행이라고 생각했다. 오직 사업에만 집중하면서 인생의 보람을 느꼈다.

박 회장은 귀한 손님이 오면 딸에게 차를 내어오라고 시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손님에게 딸을 인사시킨다. 이것은 훗날 자신의 사후에 딸이 잘 살 수 있도록 울타리를 만들어주는 일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외출했다가 돌아온 주희가 차를 준비하여 앞에 앉았다. 동수는 갑자기 거실이 확 밝아 보일 정도로 주희가 예쁘다고 느꼈다.

박 회장은 동수에게 주희를 소개하면서 상당히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안 검사. 다음에 우리 주희에게 혹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잘 좀 돌봐주시오. 얘가 아직 철이 없어요.”

“아닙니다, 회장님. 제가 무슨 능력으로 따님을 돕겠습니까?”

“그래도 사람 일이란 뒷날을 다 알 수 없으니 내 미리 부탁하는 것이오.”

대충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동수와 주희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주희의 눈에도 동수가 괜찮아 보였다. 키도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눈빛이 살아있어서 강한 에너지를 느꼈다. 경상도 억양이 약간 촌스럽기는 해도 음성은 좋았다.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몇 번 만났는데 시간과 장소는 주로 주희가 정했다. 동수는 이견없이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두 여자를 만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차차 스스로 합리성을 만들어 나갔다. 미애는 결혼할 신붓감인데 반해서 주희는 박 회장의 당부처럼 법적인 문제가 생기면 챙겨봐 줄 지인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기 최면과도 같은 허술하고 일방적인 논리였다.

동수는 처음부터 주희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다. 키가 크고 생머리인 주희는 드문 미인이면서 매우 이지적인 여자였다. 외모나 지성이나 배경 등이 모두 훌륭한 여자였다. 성격도 상당히 외향적이며 적극적이었다.

동수는 두 여자를 완전히 따로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도 모르게 비교를 하게 되었다. 미애는 맥주 한 잔을 겨우 마시는데 비해서 주희는 소주 한 병을 어렵잖게 마셨다. 모텔에 들어갈 때도 미애는 조신한 표정으로 한 걸음 뒤에 따라 가지만 주희는 밝게 웃으며 팔짱 끼고 나란히 걷는 편이다. 미애가 따뜻한 여자라면 주희는 뜨거운 여자였다. 주희의 키스는 매우 격정적이었고 잠자리에서도 리드미컬한 여성 상위를 좋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일 크게 비교되는 것은 양쪽 집의 배경이다. 미애의 아버지는 시골의 면장으로 퇴직했지만 주희의 아버지는 재벌 그룹의 현역 회장이다. 3남매인 미애는 아버지 재산에서 3분의 1을 상속받겠지만, 주희는 엄청난 재산을 혼자서 상속받는다. 시골 부자와 재벌 총수를 비교하던 동수는 자신의 속물근성이 낯설게 느껴져서 약간은 놀랐다.


<3>

사귀기 시작한 지 3개월 정도 되었을 때 동수는 다시 박 회장의 부름을 받았다. 회장실은 아주 넓고 호화로웠다. 차 마시는 동안에 박 회장이 다소 진지한 얼굴이어서 동수도 꽤 긴장되었다.

“자네 우리 주희를 사랑하는가?”

“네? 아, 네. 그, 그렇습니다.”

“결혼도 생각하고 만나는가?”

“네. 그렇습니다.”

단도직입적인 질문과 패기 있는 대답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김 면장의 따님을 정리할 수 있겠나?”

“네? 그… 그 아가씨는 고향 후배…….”

“후배 선배는 상관없고 즉시 정리할 수 있겠는가?”

“네. 조심… 아니, 당장 정리하겠습니다.”

동수는 자신의 뒷조사를 당했다고 생각하니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됐네. 그 약속만 지키면 나도 주희에게 말하지 않겠네. 이건 남자끼리의 약속일세.”

“네. 감사합니다.”

“참고 삼아 말해두는데 내 사위가 되면, 아니 사윗감이라는 말만 있어도 세인들의 시선을 피하기 어려울 걸세. 내가 조사를 시키지 않아도 기자들의 안테나가 좀 많은가? 그러니 각별히 언행을 조심하게.”

“내, 어르신. 명심하겠습니다.”

박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가만히 생각했다. 재산을 딸에게 오롯이 남겨주고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유능하면서도 충직한 사위가 필요하다. 평생 동안 죽을 고생 다 해서 이룬 재산인데 씀씀이가 헤픈 딸을 시원찮은 놈에게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사람을 잘 다듬어야 한다. 박 회장은 최근에 이런 생각을 세 번이나 되풀이했다.

동수는 두 손으로 찻잔을 받쳐 들고 아주 조금씩 마시면서 생각만은 큰 폭으로 했다. 박 회장의 사위가 되면 굴지의 재벌 그룹과 미모의 아내를 모두 잡는 것이다. 또 현직 총리를 비롯해서 이 나라의 상층부 인맥과도 손이 닿을 것이고 어쩌면 최연소 검찰총장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의 소원대로 우리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다. 박 회장을 잘 잡아야 한다. 동수는 가슴이 뛰었다.

며칠 후에 동수는 미애를 만났다. 일식집의 깔끔한 방에서 마지막 식사를 나누고 싶었다. 식사 마치고 여러 가지 말로 빙빙 돌리던 동수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미애야. 우리…… 그만 만나면 안 될까?”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왜, 내가 싫어졌어?”

“그게 아니고…… 저어…… 그러니까…….”

“됐어. 싫지 않은데 그만두자면 더 좋은 여자 생긴 거네.”

“미애야, 내 말 좀…….”

“그만해. 더 듣고 싶지 않아. 이게 그러니까 최후의 만찬이네.”

“미애야, 저 정말 미안해.”

미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덕담도 악담도 아닌 딱 한 마디만 했다.

“각자 제 갈 길로 가자.”

미애는 집에 와서 동수에게 카톡을 보냈다.

-그동안 즐거웠어. 그리고 마지막에 양다리 걸치지 않아서 고마워.-

-미애야, 정말 미안해. 다음에 찬찬히 말할게.-

-아니, 그만해. 마지막 인사는 짧을수록 좋아. 안녕……. -

미애는 금요일 퇴근하면서 간단히 챙겨 여수로 떠났다. 여수 밤바다 노래를 들으면서 차를 천천히 몰았다. 누구의 연락도 받기 싫어서 휴대폰마저 집에 두고 나섰다. 그녀는 마음을 빨리 정리하고 싶었다. 변한 음식을 버리듯이 변한 남자도 빨리 버리자고 생각했다. 해변을 걸으면서 동수에 대한 사랑도 미련도 파도에 쓸려 보냈다. 조신하고 수동적이던 그녀가 이 문제만은 얼음처럼 냉정했다.

최 여사는 월요일 새벽에 돌아온 딸의 냉랭한 표정이 걱정되어 계속 캐물었다. 미애는 동수와의 절교 사실을 엄마에게만 살짝 말했다. 최 여사는 비밀을 약속했지만 이틀이 지나자 남편에게 말을 해버렸다. 그녀는 그냥 덮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울화통이 터진 김 면장은 안선필을 찾아가 격렬한 다툼을 벌였고 두 집안의 관계는 아주 험해졌다.

김 면장은 동수의 직장에도 찾아와 분노의 감정을 다 토해냈다. 동수가 열심히 사죄했으나 김 면장은 울분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돌아갔다. 김 면장은 사흘 낮밤이나 화술을 마시다가 자리에 눕고 말았다.

주말에 동수는 안선필의 연락을 받고 시골집으로 갔다.

“동수 이놈아. 넌 도대체 처신을 어떻게 하기에 온 동네를 시끄럽게 만드나? 사내자식이 책임감도 없이 말이야.”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안선필 앞에서 동수는 사포댁의 팬터마임 같은 몸짓에 따라서 무조건 빌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제가 해결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뭘 어떻게 해결해? 김 면장은 널 혼인빙자 간음죄로 고소하고 공무원 밥줄을 끊는다고 하잖아, 시방!”

“아버지, 그건 아니고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놈아! 김 면장이 고소한다고 이를 갈고 있는데.”

남편과 아들의 눈치만 살피던 사포댁이 나섰다.

“여보, 그만해요. 동수가 알아서 한다잖아요.”

“당신은 가만 좀 있어. 뭘 안다고 나서, 나서길.”

“왜 몰라요. 아, 그리고 법이라면 서울법대 나온 검사가 잘 알지 면장 밖에 안 했던 촌 영감이 알면 얼마나 알아요?”

사포댁도 물러서지 않고 따졌다. 나이가 들수록 사포댁의 말에는 힘이 실린다.

“검사검사 하지 마. 그래 검사면 남의 처녀 집적거려 놓고 배신해도 되는 거야?”

“아버지. 집적거린 것이 아니고 둘이 사귄 겁니다. 그리고 배신이 아니라 서로 안 맞아서 헤어진 것이고요.”

“뭐가 어째? 오냐 이놈아. 뭐? 사귀다가 헤어졌다고? 그러면 김 면장은 왜 저래? 그 양반이 니한테 얼마나 기대 걸고 후원했냐? 니가 받았으니 니가 더 잘 알잖아!”

“아버지. 후원은 후원이고 사랑은 사랑이지요.”

“이놈의 자식이 뭘 잘했다고 꼬박꼬박 대꾸야.”

안선필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물그릇을 냅다 던졌다. 바로 그때 김 면장이 대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섰다.

“그래, 잘 난 검사님 왔다니 얼굴이나 좀 보자. 이제 우리 미애 어쩔 텐가? 대답해 봐.”

“어르신,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끼리 잘 수습하겠습니다.”

“수습이라고 했나? 어떻게?”

“제가 위로금이라도 좀 넉넉히…….”

“위로금? 돈으로 끝내겠다고? 자네 돈 있으면 얼마나 있어?”

“저… 그게 아니고, 그렇게 해서라도 제 진정성을 보여드리고…….”

철썩! 바로 그 순간 김 면장이 동수의 빰을 후려쳤다. 김 면장은 숨을 씩씩거렸고 동수는 숨이 턱 막혔다.

“그래, 진정성 있는 놈이 여자를 그렇게 취급해? 사랑을 원수로 갚아? 에라이, 썩을 놈아!”

“어르신, 정말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를…….”

“아니, 얘야. 그만 빌어. 그리고 면장님도 너무 하시네요. 요즘 사람들 결혼해서 애 낳고 살다가 이혼도 하는데, 그래 젊은 애들이 사귀다가 안 맞아서 헤어지는 것이 무슨 죽을죄라도 됩니까?”

흥분하면 말이 빨라지는 사포댁이 참다가 나선 것이다. 그녀는 아들이 검사까지 되었다고 사람들이 하도 추켜세워서 그런지 이젠 남에게 기죽기 싫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안선필은 아내를 끌어당기면서 가만히 있으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김 면장에게 거듭 고개를 조아렸다.

씩씩거리던 김 면장이 이번에는 사포댁에게 소리 질렀다.

“뭐요? 안 맞아서 헤어져요? 안 맞아서 다투고 삐질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 사람을 헌신짝처럼 버려요? 우리가 지금까지 동수에게 공 들인 게 이런 꼴 당하려고…….”

“그래요. 우린 지금까지 동수에게 손찌껌 한 번 안 하고 키웠어요. 그런 아이에게 빰을 때려요? 면장님이 무슨 권리로 이런 꼴을 만드세요?”

“아이고. 빰 한 대가 그렇게 분하면 마음에 비수 찔린 아이는 어쩌누? 그래, 빰 맞았으니 폭행죄로 날 잡아가지요. 마침 저 녀석이 검사니까 체포도 잘하겠구먼.”

두 사람은 비슷한 말로 계속 입씨름을 했고 안선필은 김 면장에게 빌면서 동시에 사포댁에게 눈을 부라렸다.

최 여사는 며칠 째 드러누워서 현관 밖으로는 출입하지도 않았지만 남편이 안 보여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 아이들에게 아버지를 찾아보라고 일렀고 잠시 후에는 미애와 철호가 와서 김 면장을 말렸다.

두 집안은 이웃이었다가 사돈이 될 뻔했다가 이젠 원수처럼 되어버렸다.


<4>

동수는 사무실에서도 일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자잘한 실수가 종종 생기고 보고서마저도 허술했다.

“어이, 안 검사. 이거 무슨 보고서가 이래?”

변장일 검사가 손가락으로 서류를 톡톡 치면서 말했다. 회식 자리에서는 호탕하게 잘 웃는 그가 업무적으로는 무척 깐깐하다. 특히 동수에게는 더 까다롭다. 동수가 검사장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정보를 아는 그로서는 일종의 질투심도 갖고 있던 터였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다시 올리겠습니다.”

동수는 제 자리로 돌아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서류를 다시 살펴보니 몇 곳에 오탈자와 맞춤법 오류가 눈에 띄었다. 평소에 동수는 어휘력과 문장력에 자신감이 강했지만 요즘 며칠은 마음이 어수선하고 안정되지 않아서 실수가 잦다.

그는 서류를 수정하여 다시 결재 올리고 생각을 정리했다. 기왕지사 김 면장의 회오리도 지나갔으니 이젠 빨리 결혼식을 올리자고 마음을 굳혔다.

동수는 주희에게 청혼하고 둘이 함께 박 회장을 찾아가서 결혼 승낙도 받았다. 양가 상견례와 결혼식까지는 불과 두 달 밖에 걸리지 않았다. 예식장도 예약이 꽉 찼으나 박 회장이 요로에 부탁하여 일찍 구할 수 있었다.

결혼식 당일에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안선필은 버스를 한 대 대절했지만 일가들 몇 사람 외에는 동네 사람들이 거의 타지 않았다. 참석한다고 말했던 사람들도 대부분 축의금 봉투만 보내고 버스를 타지 않았다. 사람들은 직접 혹은 간접으로 연결된 김 면장과의 유대 관계가 신경 쓰였던 것이다. 김 면장은 퇴직했지만 아직도 시골에서 그의 존재감은 상당했다.

그런데 정작 김 면장 본인은 결혼식장에 참석했다. 그는 자리가 많은 버스를 마다하고 다른 차편으로 왔다. 그는 안선필 부부와 신랑에게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축의금만 냈다.

신랑 측 객석의 맨 앞줄에 앉은 김 면장은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뚫어질 듯이 신랑과 혼주들을 노려보았다. 그것은 경멸과 저주를 담은 싸늘한 눈빛이었다. 마치 얼마나 잘 사는지 두고 보자는 앙심이라도 품고 있는 듯했다. 신랑은 잔뜩 굳어있었고 혼주들도 바늘방석이었다. 그래도 예식은 별다른 문제없이 차분한 분위기로 끝났다.

박 회장은 딸을 신혼여행 보내고 나서 갑자기 허전함을 느꼈다. 지인들은 축하 인사를 하지만 그의 마음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든든한 사위가 생겨서 좋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애지중지하던 주희의 옆에는 아빠보다 더 가까운 남편이 서 있는 것이다. 주희가 유럽으로 떠난 3주 동안은 집이 빈 들판처럼 황량했다. 거의 매일 보내오는 여행지의 사진도 반갑지 않았다.

그는 20년이나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윤 검사장을 만나 술도 많이 마셨고 어떤 날은 젊은 여자를 호텔로 불러서 욕정을 풀기도 했다. 그러나 박 회장은 아내를 떠나보낸 후에 처음으로 겪는 큰 상실감과 묘한 감정 변화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만사가 시들하고 의욕이 없었다. 혈압은 치솟고 혈당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복용하던 약도 안 먹고 주치의가 입원을 권유해도 일축해 버렸다. 그의 표정과 행동은 마치 스스로 무너지기를 선택한 사람처럼 변해갔다.

한편,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동수는 한껏 밝은 얼굴이었다. 신혼의 달콤함과 좋은 직장에서의 일상도 행복한데 처가도 엄청 부자이니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이런 것이 진정한 행복이려니 생각하며 직장 동료들에게 밥도 자주 샀다. 사람들은 재벌 사위인 그를 부러워하면서 넙죽넙죽 잘 얻어먹었다.

다만 변장일은 안 그랬다. 그는 동수의 초청에 잘 나가지 않았다. 처음부터 동수를 마뜩잖게 생각했는데 요즘엔 더 거슬린다. 특별히 뒤틀릴 일은 없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에는 내 것 안 줘도 미운 놈 있잖은가. 변장일은 남모르게 동수를 경멸했다.

‘흥, 졸부 장인 물더니 아주 펄펄 날아요 날아. 촌놈의 새끼가 겁대가리도 없이…….’

변장일은 업무상 까다롭게 대하는 것이 무슨 자위 수단이라도 되는 양 생트집을 종종 부리곤 했다.

그런데 공연히 미웠던 놈이 확실히 싫어질 일이 이번에 생겼다.

검찰청 정기 인사에서 동수가 3년 선배인 자신을 뛰어넘어 좋은 자리로 먼저 발령받은 것이다. 사무실 내에서는 검사장이 안동수를 많이 챙긴다는 소문이 조용히 돌아다니던 터였다. 검사장이 안동수 검사를 박 회장에게 추천하고 중신아비 역할도 했다는 수군거림이 파다했다. 추월까지 당한 변장일이 동수를 저주할 명분이 생긴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변장일의 분노가 폭발할 일이 또 터지고 말았다. 회식하던 날 동수는 꽤 많이 취했다. 그가 화장실에서 소변보는데 동기생 양경규 검사가 들어와서 옆에 섰다.

“어이, 안 검사. 너 변 검사랑 무슨 감정이라도 있어?”

“아니, 별로 없는데…… 왜?”

“그냥…… 변 검사가 널 보는 눈길이 좀…….”

“상관없어. 이제 발령 따로 났으니 더 볼 일도 없잖아.”

“그래도 사람 일이란 게 뒷일을 모르니…….”

“괜찮아. 그보다 그 인간 왜 하필 변 검사야? 소변 검사일까 대변 검사일까?”

“글쎄. 그러고 보니 좀 그렇네. 변 판사나 변 변호사는 몰라도 변 검사라 하니 어쩐지 이상하네.”

두 친구는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면서도 키들키들 웃었다. 바로 그 순간 변장일은 맨 안쪽 화장실의 양변기에 앉아서 주먹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뛰쳐나가지 않고 한참 동안 숨을 고른 후에 술자리로 다시 갔다.

“어이, 안 검사. 이제 보니 그 넥타이 디자인이 참 멋지네.”

변장일은 가슴속의 서릿발을 숨기고 봄바람 같은 얼굴로 말했다. 동수도 방금 화장실에서의 악의적인 뒷담화는 덮어두고 화답을 했다.

“네, 변 선배님. 고맙습니다. 근데 이거 보기보다 싼 겁니다.”

“그래? 역시 안 검사는 옷걸이가 좋아서 뭐라도 멋지구만. 참, 재벌 사위님인데 최고 비싼 넥타이 정도는 매야 되는 거 아냐?”

“아이고, 선배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영감님이 얼마나 빡빡하신지 저는 매일 긴장 모드입니다. 하하.”

두 사람의 외형상 좋은 분위기 뒤에 감추어진 악감정을 다 아는 양경규로서는 속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막연한 불안감도 느꼈다. 변 검사는 표리부동한 사람인데 어쩌면 안 검사가 되치기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변장일은 동수의 과거는 물론이고 박 회장과 명진그룹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더구나 동수의 부인에 대해서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동수의 주변을 은밀하게 조사하는 일에 검찰청 출입 기자도 한 명 손잡았다. 변장일은 공병도 기자에게 약간의 용돈을 주며 모종의 역할도 주입시켰다.

마침 그때 명진 자동차의 중국 부품 공장에 대형 화재가 났다. 공장은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고 현지 근로자도 세 명이나 사망하는 큰 사고였다. 박 회장은 주치의가 만류해서 현장에는 가지 않고 고문 변호사와 사고 수습 문제에 매달리고 있었다. 최근에 몸이 크게 상한 박 회장은 이 문제만으로도 엄청난 피로감을 느꼈다.

게다가 울산 공장에서는 근로자들의 파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노조에서는 회장과의 직접 대화를 요구했지만 전무이사가 박 회장의 병원 진단서까지 갖고 나와서 양해를 구했다. 그런데 조금 수그러들던 노조의 시위는 민노총이 개입하면서 갑자기 더 격렬해졌고 심지어 분신자살을 하겠다는 협박도 나왔다. 식욕을 거의 잃어버린 박 회장은 자택에서 링거주사로 버텼다.

뿐만 아니라 강성 노조에 겁먹은 사우디의 최대 기업이 합작 투자계획을 무기한 연기해 버렸다. 또 러시아에 진출해 있던 명진 전자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부도까지 맞았다.

엎어진 놈 밟고 가는 것처럼 박 회장과 유명 배우의 섹스 스캔들마저 장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것이 루머라고 밝혀졌지만 이미 주가는 하한가의 늪에 빠지고 있었다. 노조위원장은 박 회장 나오라며 계속 시위하고 주주들은 임시 주총에서 박 회장의 퇴진을 촉구했다.

박 회장은 더 버틸 힘이 없었다. 다 놓아버리면 마음의 자유는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몇 번이나 했다. 모든 걸 포기하면 얼마나 편한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주먹을 쥐었다. 구명가게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50년 넘게 키워온 사업인데 왜 애착이 없겠나.

여기서 주저앉으면 사업도 끝이고 인생도 패배라고 생각했다. 또 노조원을 제외한 선량한 근로자들과 주주들은 모두 어떻게 되는가. 그의 고민은 나날이 깊어졌고 건강은 갈수록 나빠졌다. 누가 살짝만 밀어도 넘어질 정도로 체력이 바닥이었다.

결국에는 주희가 눈물로 호소하여 병원에 입원했다. 박 회장은 노조원 수백 명과는 맞서 싸우지만 하나뿐인 딸에게는 이길 수 없었다.

<5>

동수는 좋은 자리로 옮겼으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면초가에 빠진 장인에게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지 막막했다. 퇴근하고 병원에 와서 장인의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거나 의기소침한 아내를 격려하는 것 외에는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장인이 잠들자 동수는 병원 휴게실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그때 후배 검사로부터 카톡이 왔다.

-안 선배님. 지금 TV 뉴스 보세요. 빨리요!-

-무슨 일이지?-

-급하니까 뉴스부터 보세요.-

동수는 휴게실의 TV를 보았다. 화면에는 ‘서울 남부지검 안 모 검사 불륜 의혹, 신혼 3개월에 파경 맞을지도’ 등의 뉴스가 자막과 함께 되풀이되고 있었다.

간이 철렁해진 동수는 병실로 달려갔다. 장인은 뉴스를 잘 보는 편인데 얼른 TV를 끄지 않으면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가 병실에 들어가도 뉴스는 계속되고 있었다. 다행히 박 회장은 아직 자고 있었다. 화면에는 ‘안 모 검사는 명진 그룹의 외동 사위, 명진 그룹에 악재 겹쳐, 박 회장은 현재 지병으로 입원 중, 그룹의 기업들 주가 폭락,’ 등의 자막이 본사 사옥과 함께 어지럽게 흘러갔다.

그리고 화면이 바뀌면서 동수와 어떤 여자가 웃고 있는 사진이 나왔다. 동수가 유심히 보니 장소는 조선호텔의 켜피숍이었다.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은 분명히 나왔지만 여자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수는 직감적으로 미애인 것을 알았다.

동수가 채널을 돌리려고 리모컨을 잡으니까 주희가 말했다.

“TV 그냥 둬. 자기 멋지게 나오고 분위기도 좋으시네.”

“아… 아니, 저건 뭔가 잘못 됐어. 저건 말이지 가짜 뉴스…….”

동수가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니까 주희가 재빨리 파고들었다.

“가짜 뉴스라고? 그럼 저 여잔 가짜 애인이야?”

“저… 오해하지 말고……. 잠깐 휴게실로 나가서 이야기해.”

동수는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면서 다른 손으로는 박 회장의 침대를 가리켰다.

“싫어. 휴게실에는 남들도 있잖아. 여기서 말해. 그래, 저 여잔 누구야?”

“그게… 저…. 옛날에 사귀던 여잔데…….”

“옛날 여자를 왜 지금 만나? 신혼 초부터 바람 펴?”

“아니. 저건 아마…… 옛날에 찍힌 사진…… 일거야.”

주희는 날카로운 창이고 동수는 넝마 수준의 방패가 되고 있었다. 동수는 그 와중에도 아내를 놓치면 모든 것을 다 잃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이 떨리고 입도 바싹 말랐다.

“옛날 사진이 왜 지금 방송에 나와?”

“그게 저……. 아버님 깨시기 전에 밖으로 좀 나가서…….”

그때였다. 박 회장이 무겁게 말했다. 그는 호흡이 가빠왔지만 겨우 참고 있었다.

“나, 안 자고 다 들었어. 그러니까 자네, 계속 말하게.”

“아 네, 저……. 저 여자는 옛날에 알던…….”

“내가 정리하라고 했잖은가?”

“네. 다 정리했습니다. 아마 저 사진은 파파라치가 찍어서 돈을 요구하거나…….”

“지금 저 사진이 파파라치 소행이라고? 그럼 왜 협박이나 돈 요구는 하지 않고 방송부터 타게 하나?”

박 회장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느릿하게 말했다. 주희는 싸늘한 눈빛으로 동수를 노려보았고 동수는 지갑 잃어버린 사람처럼 허둥댔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맹세코…….”

“자네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 믿고 기횔 줬는데……. 알았네, 내가 주희에게 할 말이 있으니 자넨 밖에 나가 있게.”

“저……. 아버님, 그러니까……. “

“그만해! 아빠 말씀에 토 달지 말고 나가 있어.”

주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고 동수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대화를 좀 더…….”

“네 이노옴! 당장 나가!”

박 회장이 고함을 지르며 옆에 있던 손소독제 통을 냅다 던졌다.

그게 끝이었다. 앞으로 몸을 숙인 박 회장은 움직이지 않았다. 의료진들이 달려오고 온갖 방법을 다 썼지만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치열하게 살아온 박 회장의 칠십 년 인생은 이렇게 끝난 것이다.

주희는 병원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목놓아 울다가 발작 같은 넋두리를 토해냈다.

“이 새끼야, 우리 아빠 살려 내! 전부 니 탓이야.”

“여보, 좀 진정해. 당신 마음은 알겠지만…….”

“알긴 뭘 알아, 이 더러운 새끼야!”

주희의 울분은 오랫동안 주저앉지를 않았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분노의 불길은 더 강해졌다. 동수는 울부짖는 주희를 달래려고 어깨에 손을 올렸다가 주희의 손톱에 얼굴을 할퀴었다.

그 와중에도 동수는 병원 측과 상의하면서 장례절차를 하나씩 진행했다. 박 회장의 사회적 위상에 걸맞게 조문객들도 많았다. 정관계, 재계, 동창회, 향우회인사들이 주로 많았으나 차차 검찰청 직원들도 많이 왔다. 직원들은 술을 한 잔씩 마시고는 한담을 나누었다. 누군가는 안 검사 부부가 재벌 상속인이 된다며 부러운 듯이 말하다가 다른 동료의 지청구를 듣기도 했다.

시끌시끌한 일행들 중에 변장일은 아무 말도 없이 술만 조금씩 마시고 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빈소의 주희를 넌지시 보고 있었다. 동수의 결혼식장에서 드레스 입은 화려한 모습을 처음 보았고, 오늘은 까만 상복 차람인데 더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비탄에 빠진 그 모습에 저릿한 연민도 느꼈다.

어느 순간 변장일은 이상한 장면을 보았다. 동수가 주희에게 가서 무슨 말을 하는데 주희가 화를 내는 거였다. 동수가 웃으며 손을 잡으려 하자 주희가 홱 뿌리치기도 했다. 변장일로서는 다소 의외의 부부 모습을 본 셈이다. 아직 신혼이고 더구나 이젠 남편이 유일한 보호자일 텐데 왜 저러는지 좀 의아스러웠다. 변장일은 달랑 둘 뿐인 상주 부부가 티격태격하는 상황에 적잖은 호기심을 느꼈다. 만약 부부 사이에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다면 이건 참 재미있어지겠다고 생각했다.

변장일이 다시 보니 주희는 역시 미인이었다. 그는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 빈소 쪽으로 갔다. 세 사람에게 운명적인 악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선배님,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습니까?”

“아니, 휴게실에 좀 가려고……. 안 검사도 커피 한 잔 할 텐가?”

“전 방금 양 검사랑 마셨습니다. 근데 커피는 명진건설 상조 팀들이 서빙할 텐데요”

“아, 뭐 그 사람들 바쁜데 커피까지 어떻게 부탁해. 그보다 부인이 무척 피곤해 보이는데 조금씩 쉬시게 하지 그래.”

“네. 안 그래도 방금 그 이야길 하던 중이었습니다. 참, 여보. 인사드려요. 전에 우리 팀장 변장일 검사님이셔.”

“어머, 그러세요?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주희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담아서 짧게 말했다. 동수는 남을 끌어들이더라도 아내의 말머리를 열게 하고 싶었고 변장일은 주희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느끼고 싶어 말을 이었다.

“이런 일은 아주 힘듭니다. 짬짬이 쉬시고 식사도 잘 챙겨하십시오.”

“네. 고맙습니다.”

“그럼 저는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변장일이 다른 말을 더 찾지 못하고 자리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선배님, 휴게실은 안 가시고요?”

“아, 그렇지. 휴게실에 가야지.”

변장일은 어색한 웃음을 짓고 휴게실로 향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는 주희를 다시 생각했다. 주희는 당장 미스코리아 선발전에 나가도 될 것 같은 미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은쟁반의 옥구슬이었다.

변장일은 갑자기 동수가 부러워졌다. 윗사람에게 인정받는 검사, 재벌 그룹의 상속인, 미모의 아내까지 다 가진 그가 부러웠다. 그러나 그 부러움은 금방 질투심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회식날 화장실에서 엿들었던 대변 검사와 소변 검사가 다시 생각나자 기분이 더 나빠졌다. ‘내 이 자식을 그냥, 확!’

변장일은 구체적인 방법은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지 앙갚음하리라 벼르기 시작했다.

밤늦게 안선필 부부가 왔으나 주희는 시부모님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피곤하다면서 빈소 옆에 붙은 상주 휴게실로 들어가 버렸다. 사포댁이 동수의 얼굴을 빤히 보면서 물었다.

“동수야, 얼굴에 왜 반창고를 붙였어?”

“아 네. 급히 다니다가 어디 좀 부딪쳤어요.”

“아이고, 조심하지 않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안선필은 빨리 집에 가자고 사포댁의 팔을 끌었다. 그들은 물도 한 방울 마시지 않고 며느리의 배웅 인사도 못 받고 나왔다. 동수도 역시 휴게실의 주희에게 부모님 나가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말했다가 무시당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사포댁은 다 키운 아들을 잃어버린 느낌이었고 안선필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쉬었다.

<6>

주희는 장례식에 이어서 49제까지 마치고 나니까 더 심한 상실감이 밀려왔다. 아빠의 빈자리가 너무나 커서 눈물 외에는 도저히 메울 길이 없었다. 남편이란 인간은 꼴도 보기 싫었다. 동수가 말을 붙이면 최대한 차갑게 잘라버리고 심지어 식사도 따로 했다.

주희는 그룹의 일을 전문 경영인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모 대학원에 등록하여 경영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혀 낯선 분야라서 공부가 쉽지 않았다. 괜히 시작 헸다는 마음도 들었으나 그래도 이론이나마 좀 알아야 임직원들과 최소한의 대화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포기하기도 애매했다.

아빠의 빈자리, 꼴 보기 싫은 남편, 생소한 공부까지 이런 모든 것이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한낮의 가을 하늘은 무척 깨끗했다. 주희는 대학교 도서관에서 밖으로 나왔다. 벤치에 앉아서 떨어지는 은행잎을 보니 아빠 생각이 갑자기 몰려왔다. 아빠는 생전에 사진 찍기를 좋아했고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많이 찍었다. 전국의 유명한 은행나무를 주로 찍었는데 경기도 용문사와 경북 적천사에는 주희도 따라갔었다. 평소에 과묵한 아빠도 카메라 들고 시골길로 나서면 아이들처럼 떠들고 좋아했다. 그때는 정말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가을 여행을 즐겼다. 아빠와의 추억에 잠깐 빠져있는데 저쪽에서 낯익은 남자가 걸어왔다.

“아니, 안 검사 사모님 아니십니까?”

“어머, 검사님. 안녕하세요?”

주희는 반색을 하면서 그가 친절한 남자라는 첫인상을 기억해 냈다.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네. 도서관에 뭐 찾아볼 자료가 있어서요. 검사님은요?”

“아 네. 전 선배님 좀 만나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 학교 법대 교수라서요.”

두 사람이 서로의 용건을 한 마디씩 문답하자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마침 점심시간인데 아직 식전이면 함께 들자고 변장일이 제안했다. 주희도 그러자고 해서 그들은 학교 앞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음식을 주문하고 변장일이 말했다.

“지난번 큰일 치르시면서 힘드셨죠? 이제 푹 좀 쉬십시오, 사모님.”

“네, 고마워요. 그런데 저… 사모님 호칭은 안 쓰시면 좋겠어요. 듣기가 좀 그러네요.”

사모님이란 누구의 부인임을 전제로 하는 존칭이다. 하지만 주희는 그 남편이란 인간 자체를 경멸하기 때문에 연결고리 같은 호칭이 듣기 싫은 것이다. 주희는 싫으면 싫다고 말하는 성격이다.

하여간 두 사람의 만남은 이렿게 우연처럼 시작되었지만 변장일에게 그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현직 검사의 정보망은 매우 정교하게 돌아가기에 변장일은 주희의 평소 동선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그렇게 우연인 듯 가볍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희로서는 그 만남이 가볍지 않았다. 우선 변장일은 다정다감했고 여성에게 따뜻한 남자였다. 변장일의 부드러운 분위기는 아직 아물지 못한 공허함과 남편에 대한 증오심을 달래주는 청량제 같았다. 더구나 변장일은 아직 미혼이라고 했다.

주희는 은연중에 남편과 변장일을 저울질하기도 했다. 물론 저울의 추는 언제나 변장일 쪽으로 기울었다. 무뚝뚝하고 촌티 나는 남편보다 세련된 서울 남자에게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또 변장일의 입장에서는 작업하기가 나무나 쉬웠다. 주희가 의외로 호의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 번째 만남에서 손을 잡았고 세 번째 만나서는 달콤한 키스를 했다. 그리고 네 번째 만난 날은 호텔에서 뜨거운 정사를 나눴다.

남자의 살맛을 알아버린 원숙한 여자가 마음에 드는 외간 남자에게 온통 넘어가는 중이다. 아직 총각인 변장일로서는 미모와 함께 엄청난 재산을 가진 여자가 생긴 것이 넘치는 행운이다. 그렇게 시작한 그들의 일탈은 거칠 것이 없었다.

주희는 동수와 이혼하리라 마음을 먹었고 그렇게 결심하니까 더 대담해졌다. 어떤 날은 술 마시고 집에 왔고 또 어떤 날은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녀의 일상은 피부 관리와 백화점 쇼핑이 전부인 것처럼 되었다.

며칠 전에는 밤 10시가 넘어서 외출하려는 주희에게 동수가 물었다.

“여보, 이 시간에 어디 가려고?”

“왜 간섭하고 지랄이야! 남이야 어딜 가든 냅둬!”

이렇게 남편에게는 공격적이었다. 동수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의 수상한 행동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밖에서 누군가를 만날 것이고 생각했다. 다만 그 상대자를 아직 알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일단은 모른 척했다. 범인 체포할 때처럼 덮치는 순간을 잘 포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설프게 잡으려다 놓치는 경험도 더러 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잠복하면 확실한 증거가 잡힐 것이고 그때 덮쳐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검사 아닌가.

그러나 덮치기 전에 자신의 결백은 알리고 싶었다. 불상사의 발단이 된 미애와의 사진 문제는 꼭 말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몇 번 시도했지만 자신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잘라버리니까 대화가 되지 않았다. 동수는 궁리 끝에 편지를 썼다. 호텔 커피숍에서 찍힌 사진은 과거에 만났던 여자인데 지금은 깨끗이 정리가 되었다고 했다. 과거의 사진이 어떤 경로로 TV 뉴스에 나왔는지는 정말 모른다고 했다. 어쨌거나 장인어른의 별세는 말할 수 없이 마음 아프다고 했다. 매일 자책하고 있다면서 사과의 말도 잊지 않았다. 이제 그만 마음 풀고 대화 나누면서 살자는 말로 길지 않은 편지를 마무리했다.

새벽에 들어온 주희는 동수가 출근할 때까지 계속 자고 있었다. 동수는 편지를 화장대 위에 놓아두고 조용히 나왔다. 검찰청 앞 분식점에서 토스트와 커피로 아침을 해결하고 사무실에 들어왔다. 그러나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가슴만 답답했다. 어쩐지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이 몰려왔다.

동수가 퇴근하고 돌아오니 주희는 외출했는지 집이 조용했다. 우선 그는 무척 피곤했다. 손가락도 까딱하기 싫고 목이 칼칼했다. 몸살 기운을 느낀 그는 일찍 누우려고 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자신의 베개 위에 찢어진 종잇장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아침에 자신이 두고 간 그 편지였다. 또 그 아래에는 절반으로 접힌 다른 종이가 깔려 있었다. 그것을 펴보니 딱 한 줄의 글이 있었다. 붉은 립스틱으로 쓴 글씨는 굵고 강렬했다.

-- 헛소리하지 마! --

동수는 공들여 쌓은 돌탑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누웠으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시바스 리갈을 반 병이나 마셨다. 그리고는 곯아떨어졌고 아침까지 주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동수가 사무실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여기저기 모여 서서 쑥덕거리던 사람들이 동수를 보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는 동수에게 후배 검사가 다가왔다.

“저어, 선배님. …… 아직 뉴스 안 보셨습니까?”

“뉴스? 아니 안 봤는데, 왜?”

“그럼 경찰에서 연락은 없었는지요?”“그게 뭔 소리야? 아무 연락 없었는데?”

동수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휴대폰을 봤다. 서초 경찰서의 전화가 여섯 번이나 왔었다. 그러고 보니 동수는 어젯밤에 푹 자려고 전화를 무음으로 돌려놓았고 그 사실을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아, 폰을 무음으로 해뒀네.…… 그래, 무슨 일이지?”

“선배님, 놀라지 마시고 마음 크게 잡수세요.”

“이 사람 왜 이래? 무슨 일인데 아침부터 사람 속 태워?”

“선배님, 저어…… 형수님이 오늘 새벽에 교통사고로…….”

“뭐? 뭐라고? 우리 집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해?”

“네, 지금 삼성병원 응급실에…….”

동수는 눈앞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그다음부터는 무슨 말을 들었고 어떤 대답을 했는지 몰랐다.

동수가 응급실에 도착하니 아내는 5분 전에 숨을 거두었단다. 이번에는 눈앞이 먹빛으로 덮혔다. 허망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다만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뭐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넋을 놓고 앉아있는데 경찰관이 와서 사고 경위를 말해주었다.

주희의 승용차 벤틀리는 인천 방향의 국도에서 대형 화물차와 충돌했단다. 주희의 혈액 검사에서 마약 성분이 검출되었고 운전자는 만취 상태였다고 했다. 운전자도 역시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운전자의 신원은 수사 과정상 밝힐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동수는 운전자가 어떤 건달 놈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뉴스를 보고 싶지도 않았다.

장례식과 삼우제를 마칠 때까지도 사고 운전자를 몰랐다. 다 죽어간다는 그놈이 누군지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저절로 알게 되었다. 많은 조문객 중에 변장일을 본 기억이 없었다. 동수는 후배 검사에게 뚜벅 물었다.

“운전자는 변장일 검사인가?”

“저어……. 선배님 그건……. 저도 아직은 잘 모르고…….”

후배는 난감한 태도를 보였을 뿐 대답을 피했다. 동수는 변장일의 휴대폰으로 전화했지만 지금은 받을 수 없다는 녹음 멘트만 들렸다. 하지만 근무처로 전화한 끝에 그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서 치료받는 중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동수는 자신이 친구이며 문병을 가려고 한다는 구실로 둘러대서 서울아산병원 응급실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동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차를 몰았다.

변장일 이 새끼가 그놈인가. 조선호텔 사진도 네놈이 방송국에 줬구나. 그래서 우리 장인을 죽게 만들고, 이젠 내 아내까지 죽였지. 그런데도 넌 아직 살아있어? 좋아, 내가 널 죽여주마. 이 개새끼!

동수는 운전하는 동안에도 치를 떨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나 병원 응급실에는 변장일이 없었다. 중환자실로 옮겼다는 말을 듣고 찾아낸 동수는 미친 듯이 난리를 피우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7>

교도소 안에도 봄은 오는 법이다. 동수는 거기서 석문호흡 지로사를 만나 수련에 몰입했다. 처음에는 억지로 했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호흡이 깊어졌고 마음의 얼음도 녹기 시작했다. 몸은 비록 구속되어 있으나 정신은 자유로웠다.

이젠 변장일마저도 용서하기로 했다. 마음에 원망과 증오심이 있으면 평화를 얻을 수가 없다. 그렇게 마음을 고치고 나서야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느꼈다.

마음의 자유를 얻은 덕분인지 몸도 훨씬 좋아졌다. 출소하면 남을 위해 봉사하며 살리라 마음을 다졌다. 지금까지 모든 면회를 거부했지만 오늘부터는 면회자를 접견하기로 했다. 그것은 마음이 열린 첫 번 째 변화다.

처음 면회 신청자는 놀랍게도 미애였다. 동수는 미애를 피하고 싶었으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났다. 한동안 말이 없던 두 사람은 면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서야 짧은 인사에 이어 한 마디씩 나누었다.

“미애 널 보니……. 할 말이 없네.”

“……. 몸은 어때? 밥은 잘 먹고?”

“응, 괜찮아. 나 욕 많이 했지?”

“딴생각하지 말고 건강이나 잘 챙겨.”

서로 젖은 눈만 바라보다가 미애는 출소하는 날 다시 오겠다 하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정확히 50일 후에 동수는 출소했다. 하지만 미애는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마음이야 얼른 달려가서 손도 잡고 안기고 싶었지만 동수의 부모님과 형제들이 모두 있었기 때문에 나설 용기가 없었다.

미애는 출소를 축하한다는 인사도 카톡으로 보냈다. 동수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토요일에 밥이라도 한 번 먹자며 답글을 보냈다. 미애는 그러자고 답을 하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목요일 밤에 미애에게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미애가 얼굴 마사지를 받고 집에 오니 철호가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저어…… 미애야, 화내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

“뭔데 그리 심각해, 오빠?”

“사실은 말이야, 전에 그 사진은…… 내 후배가…… 방송국에 줬어.”

“그 사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미애는 쭈뼛거리는 철호가 답답했지만 겨우 억누르며 물었다.

“조선 호텔 커피숍에서…… 너랑 동수랑 찍은 사진……. 그걸…….”

“잠깐! TV 뉴스에도 나왔던 그 사진 말이야? 그걸 누구에게 줬다고?”

그제야 미애도 뉴스에서 봤던 그 사진을 기억해 냈다. 마을 사람들은 동수를 걱정했지만 모자이크 처리된 여인에 대해서는 쉬쉬하다가 흐지부지되었다.

“응, 그 사진 맞아. 근데 그걸 기자 생활하는 후배에게……. 네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한다는 조건으로…….”

“뭐, 뭐라고? 얼굴만 숨기면 끝이야? 그리고 그 사진은 어디서 구했어?”

“그게 말이야, 저……. 미애 니 휴대폰에서 캡처해 가지고…….”

“오빠 미쳤어? 그래, 내 휴대폰을 오빠가 왜 열어봤어?”

“그건, 저… 전에 니가 혼자 어딜 떠날 때 두고 갔잖아? 그때 나는 혹시……. 네게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되어서…….”

“그러니까 왜 남의 폰을 함부로 열어봤냐고 묻잖아!”

미애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마치 독수리가 병아리를 나꿔채듯이 재빠르게 쏘아붙였다.

“난 그냥 니가 걱정되어서…….”

“그럼 걱정만 하지 왜 남의 폰을 맘대로 열어?”

미애의 벌침 같은 공격과 철호의 궁색한 사과는 한참이나 이어지다가 최 여사가 들어오면서 그쳤다. 최 여사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왜 이렇게 시끄러우냐? 지금 아버지 심기가 안 좋으시니 집안에서 조용히들 해라. 그리고 미애 널 누가 좀 만나고 싶다는데…….”

“누가요?”

“으응, 재일 교포 사업간데 나이는 좀 많아도 아직 건강하고…….”

“엄마, 지금 그거 무슨 말……. 설마 내게 결혼하라는 거예요?”

“그래. 너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는 없잖니?”

“아니, 엄마까지 왜 그래요? 제발 나 좀 그냥 둬요.”

미애는 최 여사의 말을 무 자르듯이 잘라버리고 밖으로 나갔다. 강변 체육시설의 벤치에서 혼자 숨을 고르고 있는데 폰이 울렸다. 액정에 오빠라고 뜨기에 바로 끊어버렸다. 그러니까 1분도 안 되어 카톡이 왔다.

-미애야, 미안해. 오빠가 실수했어.-

-실수? 내 폰에서 사진 빼내어 후배에게 준 것이 실수라고?-

-그래. 내 잘못이야. 이해하고 용서해 줘.-

-아무 말도 하기 싫어. 카톡 보내지 마.-

미애는 가슴이 답답했다. 날마다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아버지, 이 와중에 딸에게 결혼하라는 엄마, 천방지축으로 헛발질이나 하는 오빠까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미애는 그 사진과 뉴스가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만들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 뉴스의 충격으로 동수의 장인이 사망했으리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철호는 동수의 빠른 출세와 성공에 대한 시기심도 컸지만 미애를 버린 배신에 더 분노했다. 그놈 혼자 웃고 다른 사람들은 가슴 치는 그 모순을 참기 어려웠던 것이다.

<8>

다행히 동수는 건강하고 여유도 있어 보였다. 미애가 좋아하는 한정식으로 식사를 한 그들은 조용한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기서도 동수는 진심 어린 사과를 했고 미애의 굳어있던 마음도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호텔을 찾았으며 뜨거운 몸을 합쳤다. 동수는 미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면서 말했다.

“미안해. 나 정말 나쁜 인간이지?”

“그래도 …… 사랑해.”

미애는 부드러운 손길로 동수의 등을 쓰다듬으며 나직이 말했다. 그 밤은 뜨거웠고 길었다.

동수는 유일한 상속인으로 그룹의 재산과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안동수 신임 회장은 계열사 사장단과 주요 임원들만 참석한 취임식을 간단히 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선대 회장님의 유지를 잘 받들어서 그룹을 내실 위주로 경영하겠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검사 출신의 젊은 회장에게 기대에 찬 박수를 보냈다.

동수는 고문 변호사와 임원들의 조언을 경청하면서 하루하루 일을 익혀나갔다. 집도 회사 근처의 오피스텔로 옮겨서 단출하게 정리하고 힘찬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 호텔 사진의 뉴스 문제는 덮어두기로 했다. 어떤 경로를 통해 방송국에 들어갔거나 이제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앞뒤 정황상 변장일이 사주한 것으로 보이지만 변장일은 이미 검사직에서 파면됨은 물론 마약사범으로 구속까지 되어있기 때문이다. 굳이 자신의 손으로 단죄하지 않아도 변장일은 추상같은 법의 처벌을 받고 있다 생각하며 물리적 복수는 덮어버렸다.

미애는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결심을 말했다.

“아빠, 저 이제 동수 씨와 결혼하겠어요.”

김 면장은 딸의 폭탄선언을 듣고 할 말을 잃어버린 듯했다. 그러나 잠시 후에 평정심을 되찾아서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니 문제니까…… 니가 잘 생각해서 처신해라.”

김 면장은 이번 일의 결정을 미애에게 맡기면서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응시했다. 네 식구가 웃고 있는 그 사진처럼 그의 분노도 스르르 풀렸다.

“미애 너…… 괜찮겠니? 그 사람을 믿어도 되겠니?”

최 여사가 조심스럽게 묻자 미애는 눈을 빛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철호는 재벌이 된 손아래 처남에게 품었던 묵은 적대감을 풀며 속으로 말했다.

‘동수는 엄청난 대어를 낚았고 미애는 그 낚시꾼 자체를 낚았네. 이게 모두 내 덕분이지. 흐흐흐…….’

-- 끝 --148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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