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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분노

Chapter Ⅰ

   다발성경화증의 경우 국내에서는 거의 드물고 잘 나타나지 않는 희귀 난치병이고, 재발과 완화를 반복한다. 나 같은 경우 눈으로 시신경염이 왔지만, 만약 또 재발이 된다면 어디로 재발이 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또다시 시신경으로 와서 안보일 수도 고, 운동신경으로 와서 못 걸을 수도 있고, 감각신경으로 와서 감각을 못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다발성경화증의 완치 약은 지구상에 없다. 병의 진행을 조금 늦추게 하는 약이 있는데, 제일 많이 쓰이는 약으로는 주사제로써 본인이 직접 일주일에 세 번씩 주사를 놓아야 되고, 평생 약제를 써야 되는 병이다.


   시신경척수염의 경우 척추 mri를 찍어보고 피검사를 하게 되면 확실히 알 수 있는데, 시신경척수염을 진단할 수 있는 피검사는 우리나라에서 서울삼성병원만 할 수 있다.


   나의 주치의는 시신경척수염 검사를 위해서 삼성병원으로 나의 피를 보내도 되는지 엄마랑 나한테 물어봤다. 검사 비용은 5만 원이라고 해서 엄마는 5만 원을 그 자리에서 바로 주치의한테 줬다. 나는 그 말을 들은 후부터는 계속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서 혼란스러웠고 그것이 눈물로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응급실 침대에 앉아서 울다가 순간 너무 화가 났다. '다발성경화증? 그게 뭔데? 내가 왜!! 내가 여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데...!!' 이런 감정들이 폭발해서 분노로 표출되었고, 그 분노는 나에게 다발성경화증이라고 말했던 주치의에게 표출되었다.          


   그날 저녁쯤 2층 응급실 데스크에는 간호사들과 내 담당 주치의가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링거를 들고 가서 주치의한테 다짜고짜 따졌다.

     

  나: 선생님 좀 전에 저한테 다발성경화증? 시신경척수염? 이런 거 같다고 하셨죠?

  주치의: 네. 아직 확진은 아니지만 의심은 돼요. 시신경척수염은 내일 오전 중으로 삼성병원에서 결과 나오면 확실히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있어요.

  나: 그럼 만약에 시신경척수염이 아니라고 판정이 나면요? 그럼 저는 다발성경화증이에요?

  주치의: 네. 그럴 확률이 많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다발성경화증을 가진 사람들이 극히 드물어서 일단 내일 삼성병원 결과 나오는 걸 기다려봐야죠.

  나: 만약에 제가 다발성경화증이면요? 그럼 어떻게 해요?

  주치의: 그럼 일주일에 3번씩 자가주사를 맞아야 돼요.

  나: 그거 맞아도 완치 안 된다면서요?

  주치의: 네 그래도 그걸 맞아야 재발의 진행을 늦출 수 있어요.

  나: 재발의 진행을 조금 늦추는 거지, 그게 재발이 안 오게 하는 건 아니잖아요?

  주치의: 네 그렇죠.

  나: 그럼 그거 왜 맞아요? 아니 왜? 선생님 저 진짜 너무너무 억울하거든요, 저요 저 원래 장애가 있어서 여태까지 진짜 힘들었거든요. 선생님도 제가 장애 있는 거 알잖아요. 저 여태까지 살면서 정말 너무너무 힘들었는데 이제 좀 괜찮아지려나 했는데, 다발성경화증? 그게 뭐예요? 나한테 왜 그런 거예요? 아니라고 말해 주세요. 다발성경화증? 시신경척수염? 저 그런 병이 있는 줄도 몰랐고, 선생님한테 처음 들었어요. 저 정말 그 두 개 중에 하나인 거예요?

  주치의: 네... 현재로서는 그게 크게 의심돼요... 그래도 치료 잘 받아야죠... 아직 이렇게 울 때는 아니에요. 울지 마요...

  나: 너무 억울해요...      


   조용한 응급실은 내 울음소리로 가득 찼고, 앞뒤 양옆에 누워 있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눈길은 다 나를 향해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 눈길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억울해서 미칠 것 같이 치밀어 오르는 화가 눈물로밖에 표출되지 않는 것이 답답할 뿐이었다. 주치의 선생님한테 다짜고짜 따지듯이 말하다가 엉엉 울면서 다시 내 자리에 갔고, 내 자리에서도 계속 소리 내서 엉엉 울었다. 그러다 울 힘도 없어서 어느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가만히 앉아있었다.


   밤 8시쯤이 되어서 주치의는 한 번 더 나에게 왔다.      


  주치의: 이제 좀 괜찮아요?

  나: 아니요... (다시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주치의: 울지 마요. 아직은 울 때가 아니에요... 눈 보이는지 다시 확인해 볼게요.    

   

   주치의 손으로 나의 보이는 한쪽 눈을 가려서 안 보이는 눈만 뜬 채로 주치의 손가락이 몇 개인지 말했는데, 손가락 하나는 맞췄지만, 서너 개씩 여러 손가락을 폈을 때는 맞추지 못했다. 그때 보이는 형상은 흑백 tv에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보이는 손가락은 회색으로 보였는데 손가락 테두리는 굵은 검은색 선으로 보였다. 그게 전부였다. 다른 것은 다 검게 보였다. 아직도 나는 암흑이었다.

    

  주치의: 그래도 처음보다는 나아졌으니까 좀 더 지켜볼게요.

  나: 선생님 저 그럼 만약에 다발성경화증이면 임신할 수 있어요? 평생 주사 맞아야 되면 임신해서도 주사 맞아야 돼요? 그럼 아기한테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주치의: 임신은... 지금 잘 모르겠는데, 제가 오늘 공부해서 꼭 알려줄게요.

  나: 선생님 저 아직 못 해 본 게 너무 많아요...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남들 해 보는 건 다 해 보고 싶어요...

  주치의: 남들 하는 거 다 할 수 있어요. 즐겨야죠. 남들처럼 즐기면서 살 수 있어요. 알겠죠?

  나: 네...     


   주치의 선생님이 가고 나서 한동안 나는 혼자 깊은 생각에 잠겼다.

‘즐겨? 남들 하는 거 다 할 수 있어? 내가? 뇌성마비 장애에 지금은 눈도 안 보이고 다발성경화증인지 뭔지 그거 때문에 평생 주사 맞을지도 모르는데, 이런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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