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11) 불신과 원망

Chapter Ⅰ 

   12월에도 스테로이드 알약 소론도정을 처방해 주는 병원의 담당 신경과 교수님은 나한테 다발성경화증이 맞다고 했다가,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가... 말이 자꾸 오락가락했다. 그럴수록 점점 그 병원과 나를 진료해 준 신경과 교수님한테 믿음이 가지 않았다.


   진료실을 나와서 소론도정을 처방받으러 병원 앞 약국으로 갔다. 대학병원 바로 앞에 있는 약국이라 그런지 약국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약국 안에 있는 의자에 앉았고 엄마는 처방전을 제출하고 나서는 내 앞에 서 계셨다. 그때 내 마음속은 갑자기 분노로 가득 차기 시작했고, 차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억누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엄마는 스마트폰으로 계속 무언가를 검색한 걸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엄마가 우시는 걸 보고도 분노는 잠잠해지지 않았다. ‘이제 와서 울면 다야? 지금 누가 울어야 되는데! 누가, 울어야 되는데!! 왜? 울면 뭐 달라져? 어이가 없네...’ 이런 생각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꾸 들끓어 올랐다. 그러다 내 약이 나와서 약을 받으러 엄마랑 내가 약사 앞으로 갔다. 엄마는 약을 받기 전에 먼저 약사한테 조금 전 스마트폰으로 검색한 걸 보여주면서 “이거 좀 봐주세요”라고 했다.


  엄마: 이거 좀 봐주세요

  약사: 네 여기서 어떤 게 궁금하세요?

  엄마: 다발성경화증 이 병은 치료약이 없는 거예요?

  약사: 네? 다발성경화증이요? 그 병은 병원에서...

  엄마: 주사를 맞아야 된다던데 주사를 계속 맞아야 돼요?

  약사: 자세한 건 병원에서 알아보셔야 돼요. 저는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

  엄마: 그래도 아시는 거 좀 알려주세요..     


   나는 이런 상황을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지켜봤다. ‘뭐 하는 거지? 왜 저래? 저러면 내가 고마워할 줄 알고?’ 아주 독에 가득 찬 생각들만 들끓어 올라왔다. 그러다 약사가 엄마를 귀찮아하는 듯한 모습이 엿보여서 나는 엄마 옆으로 가서 빨리 나가자고 말했다.


   그렇게 약국에서 처방받은 약을 가지고 나와서 병원 앞길을 걷고 있는데, 나는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걷는 내내 마음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라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걸 억지로 억누르고 있다가 도저히 못 참겠어서, 더 참았다간 내가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걸음을 멈추고 엄마한테 아주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나: 아까 왜 그랬는데?

  엄마: 뭐라도 물어봐야지... 혹시라도 약사가 다른 말을 해 줄 수도 있잖아.

  나: (소리치며) 모른다잖아!

  엄마: 왜 소리를 질러?

  나: 소리 안 지르게 생겼어? 내가 평생 주사 맞을 수도 있다잖아. 평생 주사 맞아도 다발성경화증인지 뭔지 그 병이 진짜 맞으면 언제라도 다시 눈이 안 보일 수도 있다잖아. 못 걸을 수도 있다잖아. (나는 묵혀있던 모든 울분을 토하듯이 서 있는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소리쳤다.)


  나: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엄마: 이게 왜 엄마 때문인데?

  나: (소리치며) 몰라서 물어? 지난달에 내가 입원했을 때 엄마 입으로 의사한테 그랬잖아. 엄마가 나 임신했을 때 늑막염 때문에 입원해서 계속 약 먹었다고. 독한 약 먹어서 내가 태어나고 얼마 뒤에 고열이 난 거 아닌가, 대학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어떤 검사를 해도 엄마가 임신해서 독한 약 먹었기 때문에 열이 안 떨어진 게 아닌가, 그래서 그 고열로 내가 뇌성마비 장애가 생긴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든다고 엄마가 의사한테 말했잖아. 나 장애만 아니었어도 이런 병 걸리지도 않았어. 이놈에 장애 때문에 내가 학교 다니면서 계속 괴롭힘 당하고, 그래서 계속 학교 애들 눈치 보고, 계속 마음고생해서 이런 이상한 병에 걸린 거잖아.     


   길 한가운데서 나는 엄마한테 소리치며 한껏 퍼부어대고서는 앞으로 걸어갔고, 엄마는 그런 나를 아무 말 없이 잡지 않았다. 엄마와 나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데 나는 이내 엄마가 눈에 밟혀서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그때 엄마는 아주 축 처진 어깨로 힘없이 걸어갔다. 엄마의 그런 모습을 여태까지 살면서 처음 봤지만, 나는 애써 못 본척하며 내가 가던 방향으로 계속 걸어갔다. 부끄럽지만 그땐 내가 저렇게 했던 행동에 대해서 전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문득 그때가 생각나면 내 마음 한편은 한없이 아리고 저며 온다.


   2015년 12월 초의 어느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고, 내 눈은 처음 발병한 지 한 달 반쯤 지나서 12월의 마지막이 올 때쯤에는 아주 가까이에 있는 글씨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 10화 (10) 부작용의 연속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