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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1- 원수가 이렇게나 가까이 있을 줄이야

 Chapter Ⅳ 

   학교에서 근무하다가 방학이 오면, 나는 잠시동안 내 고향 대구로 내려가 있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그날도 나는 방학이라서 대구 본가의 내 방에 있었다. 그때 주방에는 정수기 필터를 교체하는 사람이 방문해 있었고, 엄마랑 그 사람은 같이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같았지만 나는 방 안에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엄마가 나한테 거실로 나와보라고 하셔서 거실로 나갔다.


   여전히 주방에서는 정수기 필터를 교체하는 가운데, 엄마가 나한테 말하셨다.


  엄마: 진영아, 지금 정수기 필터 교체하는 총각이 알고 보니까 너랑 동갑이야. 이 총각이 아빠 공장에 있는 정수기도 필터 교체하러 와서 엄마랑 예전부터 이야기를 좀 했는데, 여태까지 이 총각이 살아온 동네가 우리랑 비슷해. 그래서 엄마가 조금 전에 어느 학교 나왔냐고 물어보니까 너랑 같은 초등학교 나온 거야. 그럼 너도 알 것 같아서 나와 보라고 했어. 동창이잖아.

  나: 그래?

  그: 혹시 ㅇㅇ 초등학교 몇 반이었어요?

  엄마: 동창끼리 무슨 존대를 해요? 그냥 편하게 말하면 되지

  그: 사모님 그렇죠? 너 몇 반이었어?

  나: 나 6학년 때 2반이었는데.

  엄마: 총각 필터 교체 다 했으면 거실에 앉아서 같이 이야기해 봐. 과일 좀 줄게요.

  그: 감사합니다.

  그: 야 나도 6학년 2반이었는데 그럼 ㅇㅇㅇ선생님이 담임 선생님이었지?

  나: 응 맞아

  엄마: 같이 과일 먹으면서 이야기 해요

  그: 우와 반갑다. 너 지금 뭐 해?

  나: 나 지금 중학교에서 애들 가르쳐

  그: 어디서?

  나: 수도권에서

  그: 정말? 그럼 정교사야? 그 힘들다고 하는 임용고시 합격해서?

  나: 응 임용고시 합격해서 수도권에 있는 중학교 발령받아서 일하고 있어

  그: 근데 오늘 평일인데 어떻게 대구에 있는 거야?

  나: 방학이라서 잠시 대구 왔어

  그: 아 그렇구나. 너무 잘 됐네. 근데 나는 너를 잘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나: 네가 나를 모르면 안 될 건데. 나는 너 이름 들으니까 기억이 나는데

  그: 그래? 기억해 줘서 고맙네

  나: 당연히 기억나지. 6학년 때 같은 반 애들 대부분이 내 몸 불편하다고  괴롭히고, 불편한거 따라하면서 놀리고, 내가 지들 쳐다봤다고 때리고, 지들 물건에 내 옷이 닿았다고 때리고, 그냥 가만히 있어도 발로 차고 때렸는데 그것도 1년 동안 계속. 그런데 나를 괴롭혔던 애들 이름을 내가 기억 못 하면 안 되지 (내 얼굴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 순간 내 마음은 분노와 다시 대면하게 된 벅참이 뒤섞여 타들어갈 듯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나는 계속 웃으며 엄마가 가져와 주신 과일을 아주 질근질근 씹어 먹으면서 말했었다. 그때 엄마도 옆에 같이 계셨다.)

  그: (내 말을 듣던 순간 과일을 집으려고 들었던 포크를 다시 내리며 표정이 갑자기 상기되기 시작하면서 짧은 한마디 말을 했다.) 그렇구나...

  그: (짧은 한 마디의 그렇구나를 말하고나서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사모님 저 이만 가봐야 될 것 같습니다. 과일 잘 먹었습니다.

  엄마: 과일 좀 더 먹고 가지

  그: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진영아 나 갈게.

  나: 응. 잘 가

  

   그 사람이 가고 나서 엄마는 쟤도 너를 괴롭힌 애였냐고 물으셨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다 몇 분 후에 집으로 초인종이 울려서 엄마가 문을 열어보니 그 사람이 다시 왔었다.


  그: 사모님 제 차 트렁크에 생수가 있어서 이거 한 박스 드리려고요.

  엄마: 아니에요. 이걸 왜 줘요?

  그: 이거 500ml라서 나가실 때 하나씩 가지고 가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부담 갖지 마세요.

  엄마: 아니 이것도 총각이 돈 주고 사는 거잖아. 돈 줄게요 이거 얼마예요?

  그: 진짜 괜찮아요. 그냥 편하게 생각해 주세요.

  엄마: 알겠어요 그럼, 고맙게 잘 마실게요.

  

   나는 500ml 생수가 20개 담긴 박스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말하면 안 되냐? 그땐 나도 어려서... 어렸다는 걸로 변명이 될 순 없겠지만, 정말 미안했어 지금이라도 사과할게 미안해 진영아라고 말하면 안 되는 거였냐? 넌 그저 물 뒤로 숨어 버린 거네...'


   이후 엄마한테 그 사람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물론 내가 먼저 물어본 건 아니었지만, 아빠 공장에 정수기 필터 교체하러 오는 사람이 바뀌어서 엄마가 전에 하던 총각은 어디 갔냐고 물었다고 했다. 그러자 그 총각은 이 일을 그만뒀다고 정수기 필터 교체하러 온 새로운 사람에게 전해 들었다고 엄마가 말씀해 주셨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언젠가 또 너를 보게 될 줄은 모르겠지만, 평생 미안해하면서 살아라'라는 생각이 들었고, 기분이  유쾌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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