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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원 Oct 11. 2023

붓글씨와 첫사랑은 그렇게 함께왔다.

염불보단 잿밥

전혀 적성에 맞지않는 학과에 진학을 하고 늘 불만스러워하던 대학신입생이었던 나는 그날도 여전히

알아들을 수없는 수업이 종강된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가방을 정리하던 그때,

강의실 문을 열고 두명의 남학생이 들어왔다.일어나려던 어수선한 학생들을 집중시키며 그가 말을 꺼냈다.

서예 써클을 홍보하러 왔다며 관심있는 학우들은 지하 102호실(내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로 찾아오라고 했다.그뒤의 부연설명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고 안내를 이어가던 그. 써클회장이라던 그에게 시선이 고정되었다.그때부터 그가 나의 남자보는 눈높이가 되었다.첫눈에 "와.. 잘생겼다.안그래"?우리과의 유일한 여학생이었던 그녀와나.그녀에게 동의를 구했다.그녀역시 "그러네.."하며 그를 바라보았다.그가 강의실을 빠져 나간뒤

그녀에게 같이 가보자고 했다. 모든것에 의욕이 없었던 그녀는 억지로 나에게 끌려갔다.나는 적성에 맞지않아서,그녀는 좀더 좋은대학을 가지못해서,각자의 불만을 가지고 같은과에서 서로 의지가 되었었다.내가 서예를 알게 된것은 바로 그시점이었다. 써클 회장을 처음본 그날,서예에 관심이있었다기 보다는 그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본의 아니게 내인생 모토가 되어버린 염불보다 잿밥 컨셉이 아마 이때부터 시작이었나보다. 그때부터 무료하던 학교생활은 조금씩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염불보다 잿밥덕분에.

나에게는 동아리라는 단어보다 써클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하고,그때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그리고 남자던 여자던 선배는 무조건 "형"이라고 불렀다.내가 서예써클에 가입한 이후부터 그는 내게 "형"이라 불리웠다.

의욕없던 그녀도 억지로 써클에 가입시키고 연습하기위해 그녀와 함께 자주 써클실을 찾았다.

그때마다 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보이지않으면 서운했고,어쩌다 보게되면 너무좋아서 말도 걸지못했다.다행이 형은 우리과여서 나와그녀에게 좀더 친절한듯 했다.좁은 써클실에 여기저기 걸려있던 화선지와 문을 열자마자 코끝으로 전해진 진한 묵향,아마 지금을 예견했는지 그것들이 모두 좋았다.나는 한글서예를 하고 있지만 그때는 서예는 무조건 한자라는 개념이 확고했을 시절이었다.내가 처음배운 "옥안"이라 불리우던 한일 자를 기억한다.내등뒤에서 내가잡은 붓을 같이 잡아주며 한일 자를 써주는 형식이었다.어떤 형은 숨소리가 유난히 커서 우리가 질색을 했었다.그러나 등뒤에서 내붓을 잡아주는 사람이 그였다면 얘기는 완전 로맨틱소설이된다.남자형제 없이 여동생만 둘인 우리집은 금남의 집이었고,그당시에 딸이셋이라는 것은 아들을 낳으려다 실패한 표식이기도 했다.우리역시 그랬다.나와 동생은 아버지가 직접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막내는 이름을 지어주지않아 엄마가 지었다며 지금도 안계신 아버지를 향해 눈을 흘기실때가 있다.그만큼 남아선호사상이 투철했던 아버지로 인해 엄마는 적지않은 자격지심을 갖고 계셨고 그래서인지 우리를 키울때 극도로 예민하셨다.아버지 말고는 남자를 대해본적이 없었던 나는 남학생들과의 교류도 쉽진않았다. 물론 그에게도 좋은 감정과는 달리 어떻게 대해야 하는건지 어렵기만 했다.아침등교길에 내앞을 걸어가던 그의 뒷모습이 아직 생생히 기억난다.심쿵!! "돌아보지마 제발..나는 아직 준비가 안됬어!"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이불킥 오천번 감이다.그렇게 그는 나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 되었고 서예라는 이름과 함께 운명처럼 내게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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