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ck(6)
1.
이 작품은 "멋진 악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얼핏 이해되지 않는 제목이다.
악몽이란 불쾌하거나 짜증나는 것인데, 어째서 멋지다고 말하는걸까? 악몽은 흔히 좋지 않은 것이라 여겨지곤 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숙면에 이르지 못하고 악몽을 꾸고나면, 불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망쳐버리는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서적 경험은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므로, 오히려 멋진 것이 아닐까?
이 노래의 화자는 사랑이 좌절된 상태를 겪고 있으며, 더 나아가 만족에 이르지 못한 상태이다. 꿈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의 현실은 마치 악몽과 같다. 그런데 이 악몽은 다른 편에서 보면 삶 그 자체이기 때문에, 오히려 멋진 악몽이라는 말로 삶 그 자체를 긍정하는 태도가 엿보이는 곡이 되어버린다.
세계는 투쟁의 장소이다. 나의 욕망을 세계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남의 욕망을 짓밟고 올라서야만 한다. 이러한 목숨을 건 투쟁의 과정을 통해 주인과 노예가 구분된다. 그런데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가치관을 세계에 투사한다. 자신의 가치관을 담아낸 노동행위를 통해 산물을 만들어내는 노예는 오히려 세상을 만들어가는 주도권을 쥐게 된다. 반면에 주인은 노예의 노동에 의존해서, 그 산물을 향유하며 살아가므로 세상을 만들어가는 주도권을 놓치게 된다. 이로써 진정으로 세계를 만들고 창조해나가는 주체는 노예적 의식이 된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장에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거론하는 내용은 위와 같다. 노예의 삶은 악몽과 같은 것이지만, 오히려 그렇게 살아가면서 자신의 산물을 창조하고 불만족스러운 시대를 자신의 의도를 통해 만족하는 시대로 바꾸어 놓는다. 역사를 발전시키는 힘의 원동력은 노예의식인 것이다. 노예는 세상을 불만족스럽게 생각하므로 만족스러운 세상으로 바꾸기위해 자신의 가치관을 투입하는 노동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 결과 노예의 의식에 따른 노동에 의해서 세계가 변해가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부분을 과잉해석하여 역사를 이끌어나가는 주체로 "프롤레타리아"를 상정하고 그들의 의식화를 통해 세계가 새로운 사회로 변해갈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을 내어놓는다. 프랑스의 헤겔 주석가인 알렉상드르 코제브 또한 이 부분을 과잉해석하여 역사를 지배하는 법칙으로서 규정하고, 역사의 종말을 주장한다. 역사의 진보가 가능한 시대에는 놀라운 생각이었겠지만, 지금처럼 역사의 진보가 끝나버리고 황금시대를 보완하며 살아가는 때에는 이러한 생각이 주는 파급효과가 크지 않다.
2.
현대인에게 중요한 것은 삶이 악몽과 같은 것이 되어버린 때, 어떻게 삶 그 자체를 긍정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현대인의 삶은 악몽 그 자체이다. 불만족스럽고, 꿈조차 보이지 않으며, 사랑은 커녕 삶 그 자체도 버거운 상황이다. 그런데 악몽이 삶 그 자체임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그러므로 악몽 속에서 한 순간의 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보자는 태도가 들어있는 것이 이 곡이다. 악몽도 삶 그 자체이기 때문에 긍정적 요소가 조금은 있을지 모른다는 태도가 숨어있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또한 현대인들에게, 미약한 정신이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가 되어 마침내 승리하리라, 와 같은 거대한 역사 이데올로기로 읽히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 생각을 다르게 보면, 힘겹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발화공간을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 자본이 만들어놓은 "플랫폼"의 발전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다각도로 발표할 수 있는 세상에서, 현대인의 "악몽"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면 미약하게나마 세상이 변화할 수 있는 틈새 하나는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악몽은 안정적이며 변함이 없는 질서정연한 이 세상에 "파문"을 던지기 위해 나타난 노래이다. 파문 하나로 안정이 무너지고 혼돈이 찾아온다면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엇을 하든 열심히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악몽을 꾸더라도 열심히 꾸어야하는 것이다.
2021-10-18 수정
제목과 소제목을 바꾸었습니다.
문단을 나누었습니다.
그외의 수정된 것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