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초월

공각기동대 – Ghost in the Shell, 껍데기 속의 영혼

by ou pire

1989/1995


1.


이 작품의 원작 만화는 1989년에 연재되었고, 애니메이션 극장판 영화는 1995년에 개봉했다. 애니메이션 TV판 작품도 존재하는데, 그 작품은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만화와 극장판 애니메이션 두 작품 모두 기존의 방식을 탈피한 초월의 지점을 논의한다. 이 초월이 천사의 강림과 함께 시작된다는 점 또한 동일하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두뇌를 전자화하여 살아가는 사이보그의 시대가 배경이다. 두뇌는 전자화되었고, 신체는 인공장기로 구성된 사이보그, 실제로 이러한 존재가 출현했을 때 우리시대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그럼에도 민족이나 국가가 사라지지는 않은 가까운 미래가 그 배경이다. 이러한 시대는 근미래에 올 확률이 높은데, 일론 머스크가 투자하고 있는 뉴럴링크는 BCI(뇌컴퓨터인터페이스장치)를 연구하는 곳이다. 뇌를 컴퓨터와 연결시켜 생체신호를 컴퓨터신호로 바꾼 이후, 외부장치(기계로 만들어진 의족이나 의수... 인공신체)를 뇌를 통해 작동하게끔 하는 것이 기본 목표이다. 이미 뇌파를 컴퓨터 신호로 바꾼 이후 인공신체를 조작하는 단계까지 기술이 발전되었으며, 공각기동대에서 표현되는 전신 사이보그가 최종 목표라고 생각된다.

이렇듯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공각기동대는 작중에서 사이버공간에서 나타날 수 있는 범죄행위를 추적하는 특수부대의 명칭이다. 주인공인 소좌(소령) 쿠사나기 모토코와 그 휘하의 9과가 여러 가지 사건을 추적하고 해결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 작품의 배경은 제3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시 번영을 시작한 인류사회이다. 주인공인 쿠사나기 모토코가 소좌인 이유도, 3차대전에 참전했던 군인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 군인은 클라우제비츠처럼 지략에 능한 존재다. 파르티잔의 이론적 원형을 제시한 클라우제비츠처럼, 쿠사나기 모토코는 새로운 전쟁의 형식을 잘 이해하고 있다. 네트워크상에서 해커들이 서로 경쟁을 하듯 두뇌가 전자화되면서, 전뇌전이 벌어지는 사회인 공각기동대의 배경은 새로운 전쟁이 출현하고 있는 사회다. 쿠사나기 모토코는 그 전뇌전의 달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좌 : 만화판 쿠사나기 모토코 / 우 : 애니판 쿠사나기 모토코/ 출처 : 나무위키, 영화캡처


쿠사나기 모토코는 뇌를 제외한 전신이 사이보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한다. 뇌 한 조각으로 내가 생명이라는 것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이 뇌라고 하는 것 또한 확실한가? 이것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래서 공각기동대라는 제목보다는 껍데기 속의 영혼이라는 영문제목이 더 작품의 분위기에 어울린다. 이 작품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는 경계는 고스트, 영혼이다.


만화본은 전반적으로 개그물의 형식을 띠고 있다. 만화의 주인공 쿠사나기 모토코는 냉소주의자로 묘사된다. 여기서 쿠사나기는 월급을 더 달라고 보채거나, 술 한 잔을 마시며 주정을 부리다가도 피해자에게 도와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면, 너 자신의 힘으로 헤쳐나갈 것을 강조하며 나약한 태도를 보이지말라고 일갈한다.


반면에 애니메이션본은 전반적으로 음울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아니메의 주인공 쿠사나기 모토코는 때로는 강하지만 때로는 연약하며, 특유의 우울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표정은 냉혹하고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그 내면은 나약하기 짝이 없어서 정말로 자신을 규정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냐고 동료 바토에게 투정을 부릴 정도다. 그래서 아니메본에서는 바토가 모토코를 사랑하고 있다. 만화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부분이다.


만화의 쿠사나기가 일본 신화 속 스사노오가 괴물을 죽임으로써 얻어낸 칼을 상징한다면, 아니메의 모토코는 素子라는 한자어 그대로 꾸밈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연약한 존재로서 여성성을 드러낸다는 점에 의심이 없다.(수잔 네피어, 아니메, 임경희, 김진용 옮김, 루비박스. (이하 "아니메"), 176쪽.)




2.


애니메이션에는 대사 하나 없이 쿠사나기가 도시를 떠도는 장면이 등장한다. 거대 비행기의 그림자가 도시의 한가운데를 덮쳐오고, 배를 타고 운하를 가로지르는 쿠사나기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고 상념에 잠긴다. 인간이 만들어낸 건축물들이 보이고, 그 사이로 물에 표류하는 쓰레기 더미들이 나타난다. 정보의 집적인 건축물과 쓰레기 사이를 오고 가는 사람들, 이 경계는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갑자기 비가 내리는 가운데 쿠사나기는 자신의 형상을 닮은 전시 인형을 바라본다. 이 장면의 제시는 “인간관계가 존재하던 세계의 상실, 혹은 그것이 처음부터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을 넌지시 말하고 있다는 점”(아니메, 177쪽.)에서 그 의의가 있다.


앞선 글에서 네트워크가 비대해지면 그로 인해 자아는 축소된다고 이야기했다. 인간 그 자체가 네트워크에 종속되어 접속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나와 타인이 만나 감정을 교류하는 일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아니, 애초부터 그런 것이 존재하기라도 했을까? 근대 이후부터 인간의 삶은 자기 내면 덩어리를 발화하는 것에 그칠 뿐, 진정한 소통이란 것이 존재하기라도 했던가? 이러한 근원적 소통 불가능성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공각기동대이다.


인간은 타인을 이해할 수 없으며, 자신이 제시하는 이미지와 타인이 나에게 가지고 있는 이미지의 교류를 통해서만 서로를 이해했다고 느낄 뿐이다. 물론 그 미약한 타자 이해의 관념을 통해서 초월성으로 나아가버리는 것이 이 작품의 독특한 점일지도 모르겠다.


네트워크의 바다로부터 출현하여 자신을 새로운 생명체라고 주장하는 인공지능 인형사가 등장하면서 스토리는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지적인 집적체 인형사는 생명체가 되기를 누구보다도 갈구한다.


이 작품의 전체적인 스토리는 이렇다. 뇌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인간이라고 인정받는 사이보그 쿠사나기 모토코가 네트워크에서 출현한 버그로 인식되어 생명체로써도 인정받지 못하는 인공지능 인형사와 결혼에 이른다. 기계와 인간의 결합을 다루고 있으며, 이 점에서 전형적인 SF물이자 사이버펑크물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3.


그런데 인형사와 쿠사나기의 결합 혹은 통일은 단순한 A와 B가 만나 융합됨으로써 AB가 되는 것이 아니다. A와 B는 서로의 개체를 버리면서도 하나로 통일되는, C(AB)의 지점으로 나아간다. 있는 것인 생명체(인간)와 없는 것인 비생명체(기계)가 통일되어 생성에 이른다는 구도는, 헤겔의 논리학과 일치한다.

인형사와 쿠사나기의 통일의 순간, 그 순간에 이르는 과정은 엄청난 장광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장광설은 허튼 이야기들이 아닌, 초월에 대한 견해를 드러내는 부분이어서 매우 중요하다. 이 부분은 만화본에 더 자세하게 나오기 때문에 만화본을 상세히 참고했다.


먼저 인형사는 쿠사나기 모토코와 직접 접속하여 대화를 건넨다. 인형사는 쿠사나기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말한 뒤, 자신의 견해를 설명한다. 인형사는 물질의 한계를 논한다. 물질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가 손에 잡고 느끼고 감각하며 사용하는 물질의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복잡한 정보의 망이 실제 세계에 구현되어 탄생한 것이며, 네트워크의 복잡도로부터 파생된 하나의 “침전물 같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시로 마사무네, 공각기동대, 김동욱 옮김, 대원씨아이, (이하 "공각") 331쪽.)


이러한 네트워크가 파국에 이르는 것을 막고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고안한 방법은 분열이다. 단세포가 다세포로 분화되면서 종의 다양성을 남기고 지상에 뿌리를 내렸듯이, 모든 것은 2n으로 이어지는 분열의 과정을 거치며 살아남았다. 원본은 복사본을 만들고, 다시 단세포는 다세포로 분열되어 다양한 종을 이루면서 원본의 형태를 복사본에 저장하여 살아남는다.(공각, 332~333쪽.) 이러한 네트워크의 자기 분열은 동시에 나무가 가지를 뻗어 열매를 맺는 것으로 은유된다. 따라서 “생명은 가지 끝에 맺히는 열매인 셈”이다.(공각, 334쪽) 따라서 이 작품은 사이버스페이스 상의 네트워크의 분포도를 생명이 진화하여 뻗어나가는 생명나무와 동등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좌 : 인터넷 네트워크 지도 / 우 : 진화론의 전개를 나무로 표현 / 나무위키, 알라딘인터넷서점


생명나무의 은유는 모든 신화에서 등장한다. 카발라의 생명나무, 북유럽신화, 중국신화, 에덴 동산의 지혜의 나무, 생명의 나무, 세계수, 그리고 일본의 아메노미하시라... 그리고 한국에는 단군신화의 신단수가 있다.


생물은 살아남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운동을 한다. 대상을 파괴하기도 하고 대상과 얽히기도 하며, 대상과 멀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보존하는 회전운동을 한다. 뇌는 복잡한 기억을 구성하면서도, 쓸모없는 기억을 버린다. 세포는 매일 대사를 통해 자기를 바꾸는 운동을 한다. 생명체는 죽음으로 인하여 태어나는 것과 교대되어 순환한다. 문명은 피폐해졌다가 다시 부흥한다. 시스템이 무한히 자기발전할 경우, 그것은 자폭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암세포가 무한 분열하여 마침내 생명체를 갉아먹고 자폭에 이르는 것과 똑같다. 모든 존재는 파국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 무한한 발전을 일시 중지하는 종말 단추를 가지고 있다.(공각, 335~337쪽.)


그래서 인형사는 네트워크에 무한한 정보만을 남기는 자신을 불완전한 생명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죽음에 이르기 위해 인간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쿠사나기 모토코와의 통일을 원한다. 죽음에 이르는 길은 동시에 “다양성과 흔들림을 얻는” 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영원히 증식하는 존재였던 인형사는 생명이 되고, 정체성에 고민하며 흔들리던 쿠사나기 모토코는 네트워크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불멸의 존재로 상승한다. 죽음에 이르는 생명이면서 동시에 불멸하는 것이 된다.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이 네트워크로 진입하면서 하나로 통일된다.(공각, 338~340쪽.)


통일 직전, 쿠사나기는 인형사에게 왜 자신을 선택했냐고 묻는다. 그러자 인형사는 인연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인연이란 불교의 용어이기도 하지만, 이 만화에서는 주체와 타자의 접촉지점으로 정의되고 있다. 상대가 가지고 있는 나의 이미지, 내가 가지고 있는 상대의 이미지, 그 이미지들이 교차하고 접촉하여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을 때 등장하는 어떤 순간이 인연이다. 이 접촉의 순간으로부터 천사가 출현한다.(만화에서는 최초의 접촉에 천사가 출현한다.)



이 순간을 통해서 접속을 통해 생명체 그 자체를 넘어가버리는 초월이 등장한다.


이 초월은 천사의 인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여기서 천사는 더 높은 존재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것은 인류 전체의 진보가 아니고, 개인 레벨에서의 변화만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 천사는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통일을 매개로 해서 존재 자체를 넘어가버리는, 탈-존의 역할을 담당하는 인도자이다.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존재는 지금까지 이야기되었던 존재가 아니다. 정보의 집적인 것도 아니고, 기능을 덜어내어 존재의 신비로움과 직접 마주하라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는 “자아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또 다른 방향성을 제시했다. ... 공각기동대는 현대 산업사회의 굴레를 단호히 거부하고 궁극적으로는 테크놀로지와 영혼의 융합이 성공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19세기 수정궁과 비슷한 그 건물이 산산조각 나듯이, 작품 속의 세계에서는 결국 인간의 유대, 인간의 야망, 인간의 기억조차 부정된다.”(아니메, 189쪽.)






이 작품은 신체라는 제약을 벗어나 네트워크와 하나가 된다는 점, 자아라는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비슷한 점이 있지만, 그 상관관계를 모두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수잔 네피어의 마지막 전망을 옮겨놓으며 글을 마치도록 한다.


“이렇듯 한계 없는 그들의 자유로운 형상이 사회의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보이든, 비인간적인 미래를 암시하는 음흉한 조짐으로 보이든 간에 그들은 모두 아니메 속의 정체성을 – 이를테면 신체라는 가장 기본적 형태까지 –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는 변신과정을 통해 캐릭터와 관객 모두 세계를 창조하고 집약하는, 때로는 가혹하지만 가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할 수 있는 것이다,”(아니메, 191쪽.)




2021-10-19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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