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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왕자 aka C FLOW Sep 11. 2017

장애 비하 사회가 주는 의미

나는 랩을한다. 고로 존재한다. 휠체어에서!

당신은 인간성을 신뢰합니까?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 논쟁을 보면서 작년아프리카 TV에서 장애인을 흉내 내던 BJ 사과문으로 시끄러웠던 상황이 떠올랐다. 그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그러한 행동마저도 문화라고 주장한 가해자의 말에 분노했다.

장애비하로 방송정지된 개인방송국, 그래서 어쩌자고?

그 분노의 절반은 가해자의 ‘부끄러운 성품’을 향해 있었다. 일반적으로 장애에 대한 몰지각한 인식이 드러나는 사건에 직면했을 때, 많은 사람은 그것을 ‘인간성’의 결여, 혹은 성품의 미발달로 묘사한다.


해당 사건들도 그들이 인간에 대한 존중감이 떨어지고 소수자를 배려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인간들’ 혹은 ‘개념 없는 인간들’ (여기서 또 장애를 여전히 부정적이고 피하고 싶은 대상으로 만들면서 스스로는 성숙한 척 하는 그 지겨운 패턴이 반복된다. “너희는 머리에 장애가 있구나!!”)이라며 비판받았다.


그러나 위와 같은 비판을 볼 때마다 나는 지나친 인간성에 대한 긍정론과 부딪힌다. 스스로 장애가 없고, 장애인을 친구나 가족으로 둔 적도 없는 인간이, TV에서조차 콧대가 좀 낮고 체중이 평균이상인 사람들을 대놓고 희롱하는 사회에서 과연 장애인을 멸시하지 않을 수 있을까? 뇌병변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팔다리가 뒤틀리고, 골형성부전증인 나 같은 인간들은 볼품없는 척추를 가지고 있다.


휘어지고 뒤틀린 몸을 추하고 멸시하고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사회의 본성이며 (감히 말하건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장애를 비하하는 행위를 만났을 때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소수의 고매한 인간들을 제외하면 장애인을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자신의 친구로 두지 않은 인간은 장애인을 멸시하게 되어 있다. 인간성이란 전혀 아름답지 않다.


감성이 아닌, 지성으로 접근하기


그렇다면 장애인 비하가 정당화되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장애인을 비하하는 행위를 대놓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그들의 ‘성품’이 아니라 ‘교양’, 즉 감성이 아니라 지성으로 접근해야 한다. 미국의 백인들은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는데 극도로 신중하다. 정치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예를 들어 '병신' 같은 표현을 진보적 정치인들은 당연히 하지 않는다.) 자신이 품위 있고 교양있는 시민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들은 비록 마음속으로는 흑인이 열등하고 볼품없다고 생각할지라도 절대로 표현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그 사회가 합의한 규범이고 예의이며 교양인 것이다.


인간의 성품을 나는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과 관련되지 않고 자신과 가까운 인간들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에게 모욕적일 수 있는 언사를 피하려는 노력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끌어내는 그런 아름다운 동물이 아니다. 우리는 타자를 멸시하고 깔아뭉개 자신을 빛내고 싶은 욕망으로 들끓는 존재다. 그러므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장애인 비하를 문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따듯한 심장을 갖지 못했다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무지한 두뇌를 가졌다고 비판해야 한다. “네가 비록 마음속으로는 나를 추하다고 깔보고 싶겠지만, 그러한 태도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기억하라”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심는 것이다.


장애를 비하하는 표현을 일삼고 다니는 한 인간의 인간성이 겉으로 진보적이고 고매한 척하는 인간보다 더 숭고할 수 있다. 그런 인간이라면 왜 특정한 ‘문화’가 장애를 비하하는 것이며 그것이 장애를 가지고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인지 가르치면 된다. 그는 훌륭한 성품과 그에 맞는 뇌를 갖게 될 것이다. 만약 대부분의 인간처럼, 자신과 관련 없는 자들에 대한 무관심과 비하로 얼룩진 인간이라면, 그 경우도 역시 왜 그와 같은 비하적 표현이 자신에게 불이익이 되는지를 가르치면 된다. 자신의 지성이 떨어졌다고 두려워하는 자들은 이 규범을 재빨리 습득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지성, 인간성, 그 심장에 호소하는 일보다 나은 방법이라 믿는다.

내 몸, 내 정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추한 욕망을 더 높은 차원의 규범을 수용하는 이성적 힘으로 통제하는 것이 회의적인 것은 아니다. 현대사회는 그런 시스템으로 대부분 이루어져 있다. 그럼에도 이를 회의적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다만 규범과 예의와 교양으로 강제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더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몸 전체를 펼쳐놓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몸 전체를 펼쳐놓기’ 전략은 장애를 삶의 일부로 만드는 것.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그 '추한 몸'을 그들의 눈앞에 드러내고 우리가 가진 욕망과 아름다움과 다양성과 가능성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 방법으로 ‘예술’을 공유했다. 추하고 볼품없다고 생각했던 몸이 마음속 깊이 소리내어 파격적인 모습을 눈앞에 펼쳐놓는 전략의 하나로서의 공연말이다.


이것은 이른바 “병신 육갑한다”라던 오래된 명제의 실천이다. 타자의 인간성과 머리에 호소하기보다, 나의 온몸을 펼쳐 이 사회에 충격을 가하는 것. 그것은 심장보다 깊은 곳, 이성적인, 지성에 각인되리라 생각된다. 장애인 흉내내기를 문화라 여기던 일부 BJ들은 아직 이 무대의 관객이 되어본 적이 없을 뿐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더 크고 매력적이고 충격적인 공연을 구상해본다.

이름 최충일.

집에서는 "아빠, 남편, 아들"이고
직장에서는 사회복지사 또는 "최 선생님",
무대위에선 "엄지왕자",
친구들은 "쪼까니"(키가 작아서)라 부른다.

그리고 지체2급 장애인이다.

사람들은 살면서 다양한
호칭과 별명을 갖는다.

그러나 "장애인"은 내게
호칭도 별명도 될수 없는 단어다.

어릴때 동네 꼬마들이 놀릴때 빼고는...
평소 사람들이 "장애인 안녕?"
이라고 한적은 없었다.

"장애인"이란 단어는 나의 삶가운데
지극히 한정된 상황에서만 불려지는
어색한 "middle name"이다.

중고등학교를 특수학교에서 졸업,
대학생활 힙합에 빠졌고 지금도 사랑한다.
직장이 있고 결혼하여 아빠가 되었다.
삶의 행복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싶다.

장애인이 아닌 아빠,남편,래퍼,직장인,아들로써...
삶의 다양성과 일상을 타이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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