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신 판은, 양떼와 양치기들의 수호신으로 숲과 들판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목신이었다. 판은 종일 사냥을 하거나 님프들에게 춤을 가르쳐 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어울리기만 하면 되는 행복한 신이었다.
하지만 판의 삶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어느 날 판은 우연히 아름다운 강의 님프인 시링크스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판은 시링크스를 보는 순간 처음 느껴보는 격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난생처음 사랑에 빠지게 됐지만 그는 폭풍처럼 몰아치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은 너무나 아름답군요. 도대체 누구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강의 님프인 시링크스랍니다.”
“저… 실은 당신을 보는 순간 반했습니다. 내 가슴이 불타는 것만 같습니다. 당신을 끌어안고 입맞추고 싶습니다.”
“그런 소리는 마세요. 저는 순결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따르는 님프입니다. 정절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지요.”
판은 시링크스로부터 거절당했지만, 이미 집착으로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에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무턱대고 시링크스를 쫓기 시작했다. 더럭 겁이 난 시링크스는 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숲속으로 도망쳤다. 그녀는 쉬지도 않고 멀리 달아났지만 결국 라돈강에 막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졌다.
강가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시링크스는 판에게 잡히기 직전 절체절명의 순간, 강의 신에게 자신의 모습을 바꿔달라고 기도했다. 시링크스의 기도를 들은 강의 신은 그녀를 갈대로 변하게 만들었다. 판이 강가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시링크스는 사라졌고 갈대밭만 남아 있었다.
“용서해 주시오. 나의 욕심으로 인해 이렇게 되어버렸구려.”
판은 슬퍼하며 후회했지만 이미 갈대로 변해버린 시링크스를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판은 아름다운 시링크스를 기리기 위해 갈대 줄기를 밀랍으로 이어 붙여 피리를 만들고는 소중히 간직했다. 이 피리는 판이 만든 피리였기 때문에 ‘판 플루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지금의 팬플루트(팬파이프)가 되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마음속의 빈 구멍을 채우려고 시도합니다.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은 이러한 인간의 몸부림을 욕망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마음속 빈 구멍을 메울 수 있는 무언가를 안다고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달립니다.
라캉은 이러한 시도는 완전한 착각이며 따라서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착각과 실패로 인해 인간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끝없는 실패의 반복을 동력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고 의미입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주장입니다. 지나고 보면 그때는 왜 그렇게 ‘그것’에 집착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착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당시에는 ‘그것’을 이루려고 힘을 내어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요? 우리는 실패로서만 살아가야 하나요? 인간은 신기루가 아니면 한 발도 못 움직이는 존재인 걸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때때로 흔들리는 갈대밭에서 고요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볼 때면,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어 그대로 갈대가 되어버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것도 욕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