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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인 Oct 30. 2022

춤바람 말자씨 9

그날 이후 말자씨는 소영의 걱정과는 달리 다시 일상을 사는 것처럼 보였다. 말자씨가 일을 그만둔 것은 가족 모두 의외라는 반응이었으나, 오래간만에 말자씨의 자식들은 일을 그만둔 것이 낫다는 의견 일치를 보았다. 민영은 드디어 말자씨가 제대로 '돌아왔다'라고 생각했고, 재영과 소영은 말자씨의 어깨와 무릎이 늘 걱정이었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영은 말자씨가 엄마로서의 지각을 되찾은 것 같아 안도했다. 저마다의 생각은 달랐지만 다시 집안은 평안을 찾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소영은 이런 분위기에 말자씨가 자신에게 보였던 행동을 형제들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자신이 묻고 살기로 결심했다. 그 무렵 남들이 보기에 말자씨는 점점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일을 하지 않으니 확실히 체중이 불어나 전에 입었던 옷들이 꽉 끼거나 작고 배가 더 나오면서 오래 걸으면 무릎이 아픈 상태가 되었으나 말자씨의 자식들은 그 모습이 더 말자씨답다고 좋아했다. 솔직히 말하면, 말자씨의 새빨간 손톱, 입술은 가끔 말자씨를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했던 것이다. 말자씨의 변화를 응원하던 재영과 소영이었지만 수수하고 꾸미지 않은 나이대에 맞는 모습의 말자씨가 더 낫다고 생각했다. 말자씨 스스로가 그 모습을 맘에 들어하는지는 고려되지 않았다. 소영은 말자씨가 다시 일상을 사는 모습에 자신 또한 전과 같이 학업에 열중하기로 했다. 지희는 다시 말자씨의 손에 맡겨졌다. 소영은 내심 말자씨의 상태가 걱정이 되기도 했으나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말자씨는 과거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희를 데려오고 밥먹이고 씻기고 놀아주고 소영이 돌아오면 다시 저녁을 차리고 정리하고 잠을 청했다. 그날도 말자씨는 지희를 데리러 집을 나섰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은 말자씨가 휴직함에 따라 지희를 제시간에 눈치 보지 않고 데려올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지희야, 할머니 오셨다.”


지희의 담당 유치원 선생님의 밝은 목소리로 지희를 찾았다. 지희는 할머니의 무서운 모습을 쉽게 잊지는 못하였으나 어린아이의 순수하고 의심 없는 마음으로 다시 말자씨를 따랐다. 지희가 주섬주섬 옷을 챙기며 가방을 메고 나오고 말자씨는 가벼운 미소로 지희를 맞았다. 말자씨가 자연스럽게 지희의 가방을 자신이 다시 가져가 들며 지희의 손을 잡았다. 지희는 내성적인 성격이었으나 가족들에게는 곧잘 재잘거리며 얘기했다. 말자씨는 대답은 빠짐없이 하였으나, 사실 크게 귀를 기울이진 않았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말자씨의 안은 텅 비어 타인의 말이 담기지 못하고 그대로 휩쓸려 나가거나 또는 조용히 사라졌다. 말자씨는 죽어가기 위해 살아가는 하나의 꺼져가는 생명이었다. 그럼에도 말자씨는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엄마라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말자씨는 스스로 무도회장을 드나들고 최씨를 만나서 다시 젊음을 되찾은 듯했던 그 시간이 아득히 멀게 느껴져 가끔은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도 헷갈리곤 했지만 말자씨의 핸드폰에 남은 흔적들은 그 시간을 분명히 증명해주었다. 말자씨는 스스로도 고민하곤 했다. 최씨가 자신을 떠난 이유가 석연치 않았음에도 그저 보내주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이미 말자씨는 최씨가 자신에게 되돌려준 찰나의 젊음에 다만 만족한지도 모르겠다. 지희는 가끔 말자씨와 둘이 있을 때 여전히 눈치를 보곤 했으나, 말자씨는 지희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은 다시 지희를 돌보는데 최선을 다했고 자연스럽게 민영과 말자씨, 지희와 말자씨도 천천히 가까워지는 듯했다.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의 지희는 놀이터에서 친구와 어울려 노는 것보다 집에서 장난감으로 혼자 놀거나 좋아하는 만화를 보거나 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가끔 말자씨가 화장하던 모습을 기억하는 지희는 집에서 장난감 화장품을 가져와 자신의 할머니와 화장 놀이를 하였다. 어린 지희가 보기에 말자씨가 화장 놀이를 제일 좋아하는 것 같아 보여 지희는 말자씨가 우울해 보이거나 때때로 멍한 눈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조용히 와서 할머니에게 화장놀이를 제안하고는 했다. 노인과 어린아이의 시간은 달라 말자씨의 시간은 하루하루 지루하고 느리게 흘러갔지만 지희는 어느새 초등학생이 되어 혼자 등교와 하교를 하기 시작했다. 말자씨는 지희가 혼자 하교하며 자신의 시간이 더 늘어나게 되었다. 가족들은 말자씨에게 취미활동을 가지라고 말하려다 과거의 소동을 떠올리곤 다들 말을 아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루에도 가족들 몰래 꺼내어보던 핸드폰도 잊혀가고 말자씨는 몇년만에 찾은 평화에 점점 우울한 마음도, 공허한 마음도 채워져가고 있었다. 말자씨 또래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손주의 재롱 보는 재미에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말자씨의 힘겨운 시간이 끝나갈 때 즈음 최씨의 문자를 받았다. 이별한 후 3년 만의 일이었다.


‘급한 일입니다. 연락 주세요.’


말자씨는 최씨의 번호를 여전히 저장하고 있었다. 말자씨는 최씨에게 따지기 위해 연락하지도 야속한 마음을 표현하지도 않았다. 해봤자 받지 않을 것이고 자신만 손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최씨의 문자를 받고 말자씨는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미세하게 손을 떨며 말자씨는 전화를 해야 할까? 문자를 해야 할까? 고민했다. 연락해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급한 일이라는 단어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과 옛정에 대한 마음으로 말자씨가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였다. 말자씨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최씨의 전화였다. 말자씨는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채 수화기 모양의 버튼을 눌렀다. 순간 자신의 행동에 놀란 말자씨가 급히 통화 종료를 하려 했으나 건너편에서 최씨가 말을 건넸다.


“말자씨, 저 최가 입니다.”


“…”


“참 면목없게 또 이렇게 연락드렸네요.”


“…”


“저, 듣고 계신 거죠?”


말자씨는 답 없이 조용히 통화를 끊으려 했으나 최씨의 음성을 듣는 순간 애써 가슴에 잠재웠던 분노, 서운함, 야속함, 외로움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밀려와 눈물이 흘렀다. 말자씨의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낀 최씨가 다시 말했다.


“참 죄송합니다. 말자씨에 대한 소식은 박가 통해 들었습니다… 드릴 말씀이 없네요.”


최씨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고저 없이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 죄송하지만 급한 사정이 생겨서 이렇게 염치 불고하고 전화드렸습니다.”


“…무슨…”


말자씨가 간신히 두 글자를 내뱉었다.


“통화로 길게 할 이야기는 아니고… 잠시 만날 수 있을까요? 저, 오래간만에 얼굴도 좀 보구요.”


“아뇨… 통화로 하시죠…”


“오래간만에 잘 지내시는지 뵙고 싶기도 하고요. 저, 다음 주 수요일 즈음 어떠세요?”


“… 예?”


최씨가 꽤나 다급한 목소리도 말했다.


“수요일이요. 시간 되시죠?”


“… 아뇨.”


“말자씨, 저 간만에 만나서 밥이라도 먹으면서 말씀드리고 싶어 그래요.”


최씨 답지 않게 목소리에 힘을 주며 조금은 강압적인 태도로 말했다. 말자씨는 몇년만에 전화에 잠시 들떴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아직 턱에 맺혀있던 눈물을 닦아냈다.


“오래 안 걸려요. 정말이요. 간단히 식사라도 하고 싶어 그래요.”


“…”


“…네? 이렇게 부탁 좀 합니다.”


최씨가 다시 저자세로 나오자 말자씨가 마지못해 알았다고 답했다. 최씨가 밝아진 목소리로 고맙다고 재차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1분 뒤 다시 최씨에게 연락이 왔다.


‘수요일. 3시 로데오거리 앞에서 보시죠.’


말자씨는 답하지 않았다. 말자씨는 떨리는 손과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방으로 향해 차가운 물을 한잔 따라 마셨다. 그리곤 세수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자 말자씨는 내심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붉게 상기된 볼을 하고 미소 짓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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