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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인 Oct 30. 2022

춤바람 말자씨 8

박씨와 결별한 K씨는 말자씨가 최씨와 계속 사귀는 것이 꽤 탐탁지 않았다. 자신이 소개해 준 둘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오래 만날 줄은 예상치 못했다. K씨는 은연중에 자신이 외모나 성격이나 그 무엇 하나 말자씨보다 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말자씨가 점잖은 최씨를 만나 자신보다 더 즐거운 만남을 하는 것에 못내 불만이 쌓였고, 은근슬쩍 둘의 관계를 묻는 자신의 물음에 말자씨가 콧대 높은 척 무시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K씨는 그 뒤로 마치 원래 그럴 계획이었다는 듯 반장과 짝을 이뤄 말자씨를 욕하기 시작했고, 점점 그 강도는 거세졌다. K씨는 최씨가 말자씨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지만 자신 또한 박씨와 불륜 사이었기에 입을 다물었었다. 박씨와 헤어진 지금 말자씨의 은밀한 사생활에 대한 비방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실 말자씨는 K씨의 안하무인 성격을 내심 알고 있었기에 최씨와 교제를 할 당시엔 그다지 거슬리지도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품위 있는’ 남자의 여자라는 나름의 프라이드가 말자씨를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최씨와 결별 후 말자씨는 K씨의 차가운 눈빛, 무시하는 태도에 그대로 노출되며 그대로 상처받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과 같이 꼼꼼히 청소를 마치고 돌아온 말자씨는 쉼터 문앞에서 반장과 K씨가 자신을 두고 키득거리는 소리에 귀를 잠시 기울였다.


“아직도 모르는 눈치 더라니까. 하여간 멍청하다니까?”


“그러게, 아니 그렇게 콧대 높은 척하더니…”


“그러니까 멍청하다는 거 아냐. 아직도 자기가 불륜녀 인지도 모를 걸? 참 불쌍하다가도, 했던 꼬락서니 생각하면 쌤통이라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나. 고작해야 부인 있는 남자 첩이나 될 뻔했지.”


“에휴, 이 언니가 뭘 모르는 소리 한다. 최씨 그 남자…”


최씨라는 말에 말자씨의 어깨가 크게 동요했다.


“저 여편네는 첩으로 들일 생각조차 없었을 걸. 전직 교사에 연금 따박~ 타박 받는 양반이, 아니 뭐가 아쉬워서 저런 여자를?”


말자씨는 순간적인 현기증을 느끼며 잠시 비틀거렸다. ‘첩’이라는 단어보다도 말자씨를 힘겹게 만든 것은 ‘저런 여자’라는 K씨의 가시 돋친 말이었다. 최씨가 사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은 졸지에 불륜녀가 되어 손가락질받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도 말자씨는 결국 끝까지 자신은 최씨라는 남자와 어울릴 수 없는 여자라는 것이 되돌릴 수 없이 크게 자존심을 할퀴고 지나갔다.


"소문을 들으니까 말이야."


"응."


"자식들이 해외에 나가 있거든?"


"최씨?"


"으응. 근데 하도하도 들러붙으니까 외국 나가서 자식이랑 산다고 거짓말 쳤다나 봐."


“아이고, 다 늙어 주책이다.”


자식 핑계를 대며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뒤돌아 떠나가던 최씨의 뒷모습을 보며 말자씨가 느꼈던 일종의 부모라는 동질감에도 큰 배신감을 느꼈다. 말자씨는 그제서야 최씨가 집에만 가면 연락이 되지 않았던 이유, 사별한 지 몇 년이나 되었음에도 늘 빳빳하게 잘 다려진 옷을 입고 다니던 최씨의 차림새의 이유를 깨달았다. 쉼터의 문고리를 잡고 간신히 어지러운 정신을 붙잡고 있었지만, 말자씨 자신은 엄마로서도, 여자로서도 아무것도 아닌 채 그저 하나의 늙고 추한 동물이 된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말자씨는 간신히 쉼터로 들어가 조용히 옷을 갈아입고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는 와중에 반장의 째지는 고음, K씨가 호들갑 떠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말자씨에게 쏟아졌지만 그것은 말자씨의 귀로 들어오진 않았다.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와 집으로 가는 버스를 정신없이 타고 집으로 들어오자 그제야 말자씨는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평일 낮에 집에 있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빛이 잘 안드는 구조의 집으로 낮에도 집안은 어둡고 또 조용했다. 말자씨가 거실 창으로 걸어가 커텐을 반쯤 열었다. 아주 옅은 빛이 들어오며 집안을 부유하던 먼지들이 눈에 보였다. 말자씨는 이 먼지 한 톨 보다도 자신이 하찮게 느껴졌다. 먼지를 보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 잡고 있던 커튼을 꽈악 움켜 잡았다. 말자씨는 핸드폰을 찾아 최씨의 연락처를 검색하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 번 채 가기도 전에 전화를 연결할 수 없다는 음성 안내 메시지가 들렸다. 말자씨는 자신안에 무언가 끊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멍하니 서있었다.


소영이 수업이 끝나자마자 급하게 어린이집으로 가 지희를 데려왔다. 소영은 몇 개월 동안 이어진 생활에 익숙해지고 오히려 데면데면했던 어린 조카와 정이 깊어지는 것 또한 즐겁게 느껴졌다. 언니인 재영과 마찬가지로 결혼, 남자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고 반 강제로 시작된 육아지만 흥미를 붙이며, 늘 휴일도 마땅히 없이 일하는 새언니와 오빠에 대한 연민의 감정도 커졌다. 민영이 말자씨에게 분노하는 이유를 소영은 온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 또한 소영은 어렴풋이 이해하려 노력했다. 소영은 늘 이런 식이었다. 상황에 순응하고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며 그 상황안에서 좋은 점을 보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재영과 지영은 소영이 아버지의 폭력에 비교적 노출된 적이 없기에 형제들 중 가장 성격이 좋은 거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소영도 슬프지만 어쩌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소영과 지희가 마트에서 저녁거리를 간단히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에 들어온 지희의 밝은 웃음소리가 서늘한 집을 채웠다. 하원하고 장을 보고 돌아오면 지희가 좋아하는 만화가 얼추 시작되어 지희는 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좋아했다. 지희가 신발을 대충 벗어놓고는 거실로 뛰어들어가다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소영이 ‘신발 잘 벗어야지.’ 귀엽다는 듯이 잔소리를 하다 지희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가 있어?” 소영도 서둘러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 말자씨가 있었다.


지희와 소영은 말자씨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에 순간적으로 압도당한 듯 서있었다. 아주 어두운 거실 창가 쪽에서 커튼은 아주 조금 쳐져있고 그 불빛에 비치는 말자씨의 얼굴이 무척이나 서늘하고 무섭게 느껴졌다. 말자씨의 눈빛은 소영이 평생 본 적 없는 빛이 어려있었다. 소영과 지희, 말자씨가 서로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다 말자씨가 서서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모습에 지희가 조용히 뒷걸음질 치며 소영의 품에 안겼다.


“어, 엄마. 오늘 일찍 들어왔네. 불 좀 켜고 있지…”


소영이 지희를 한 팔로 감싸 안고 거실에 불을 켜었다. 말자씨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입꼬리만 올린 상태로 소영과 지희를 한동안 멍하게 바라보다 아주 서서히 절뚝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말자씨가 들어간 방 안에서는 방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고모, 할머니 무서워…’


지희가 소영에게 바싹 붙어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할머니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손 씻고 오자.” 소영이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자신 또한 처음 마주하는 엄마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며 손을 떨었다. 손을 씻고 나온 지희가 거실 소파에 앉아 만화를 볼까 말까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집안에 풍기는 묘한 분위기를 알아차린 것이다. 소영은 심란한 상태에서도 지희를 안심시키고 만화를 틀어주고 저녁을 차리고 지희를 씻겼다. 지희를 양치질시키며 소영이 작게 말했다.


“오늘 할머니 무섭다고 한 거는… 엄마 아빠한테는 비밀로 할까?”


“왜?” 지희가 서툴게 이를 닦으며 천진하게 물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뭔가 잘못됐다’라는 느낌까지 알기에는 어렸다.


“그냥… 나중에 고모가 말하게.”


“응” 지희가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을 마주치는 장난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영과 선희가 지희를 데리러 왔을 때 민영이 현관의 낡은 운동화를 보고 소영에게 넌지시 물었다.


“엄마 있어?”


“응…”


“인사도 안 하고 방에 들어가서 뭐해? 엄마!”


민영이 성큼성큼 말자씨의 방으로 향하자 소영이 급하게 앞을 가로막으며 속삭였다.


“아파서… 일찍 왔다나 봐. 오늘은 그냥 가.”


“엄마가 아프대?”


“어머니 아프세요?”


말자씨가 아프다는 말에 민영과 선희가 동시에 물었다. 지희가 입이 근질거리는 듯이 몸을 베베 꼬았지만 소영과의 약속으로 입을 다물었다.


“으응… 나중에 내가 말해줄게. 일단 지금은 얼른 가. 피곤할 텐데. 지희도 가서 빨리 자고.”


소영이 급하게 민영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민영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소영과 굳게 닫힌 방을 번갈아 보았지만 이내 알았다며 집을 나섰다. 선희와 민영은 돌아가는 길에 지희에게 무슨 일 있었냐고 두어 번 물었지만 지희 역시 고개를 저었다. 소영은 민영이 돌아가고 난 뒤 장난감을 정리하며 천천히 말자씨에게 무어라 말을 걸면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말자씨가 슬며시 문을 열고 나왔다. 소영은 말자씨의 문이 열리는 동시에 소름이 살짝 돋았다. 말자씨는 행동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고 그와 반대로 눈은 번뜩거렸다. 소영이 주춤거리며 말해다.


“엄마, 저녁도 안 먹고… 뭐라도 해줄게 좀 먹어…”


소영이 장난감을 서둘러 한 곳으로 밀어 넣고 주방으로 향했다. 말자씨는 여전히 자기 방문 앞에 가만히 서서 눈으로만 소영을 쫓았다.


“…는거지?”


소영이 한참 냉장고를 뒤지는 사이 말자씨가 물었다. 소영은 말자씨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 듣지 못했다.


“… 는 거지?”


이번에도 소영은 듣지 못하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러지 않고선 마음이 불안했다.


“엄마, 우, 우리 김치 이제 곧 다 먹어가더라… 조만간 해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소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자씨가 소영에게 달려들며 어깨를 붙잡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소영이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뒤로 쓰러졌고 그 위를 말자씨가 타고 올라간 상황이 되었다. 소영의 어깨를 부여잡은 말자씨가 아주 작게 그리고 빠르게 속삭였다.


“무시하는 거지? 너희들 나 무시하는 거지? 너희들 그러는 거 아니야… 내가 어떻게… 내가 어떻게 늬들을…”


소영이 놀라 말자씨의 분에 찬 혼잣말에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아니야, 그런 적 없어. 정말이야. 우리가 왜 무시를 해. 엄마. 엄마. 왜 그래.”


말자씨는 한 동안 쏟아내고는 다시 조용히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채 소영은 언제부터 흘렀는지도 모를 눈물을 닦았다. 소영은 그날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기 전 자신의 방문 또한 잠갔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자씨의 변화에 소영은 어쩔 줄을 몰랐으나 차분히 생각해보기 위해 밤새 노력했다. 그리고 소영은 며칠 더 지켜보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지금 당장 소영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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