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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인 Oct 30. 2022

춤바람 말자씨 7

지영의 말을 시작으로 또다시 가족들끼리 언쟁이 시작되었으나, 재영도 재혼이라는 주제는 생각해본 적 없기에 금방 풀이 꺾였다. 그에 비해 말자씨는 대화할수록 자식들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을뿐더러 평생 희생만 해온 자신의 인생이 가여워 눈물이 날 정도였다. 내심 말자씨는 자식들에게 최씨 얘기를 했을 때 이렇게까지 부정적인 반응을 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이 나이에 콜라텍이니 무도회장이니 그런 곳에서 만났다는 사실이 떳떳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충분히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행복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말자씨는 늘 마음 어딘가 아주 큰 바위가 눌려져 있는 것처럼 갑갑함을 느끼곤 했는데 이제야 말자씨는 그 갑갑함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모성으로 억누르고 있던 여자의 본능이었으며, 처음으로 그 모성으로 인해 말자씨는 자신을 잃었다고 느껴졌다. 끊임없이 제자리를 돌던 대화는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지희가 졸리다며 선희의 손을 잡고 테이블에 앉자 어영부영 마무리되었다. 재영이 작게 한숨을 쉬고는 그만 일어나자고 말하자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밖으로 향했다. 재영은 어딘가 풀이 죽은 듯, 어쩌면 화가 난 듯한 말자씨의 모습에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생각보다 민영과 지영의 뜻이 완고해 오늘은 이쯤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말자씨는 속에서 아주 작지만 확실한 분노의 파동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의 희생은 아랑곳 않는 자식들에 대한 분노였고, 아무것도 모른 채 결혼해 한평생을 희생만 한 자신의 무지함에 대한 분노였다. 가족들이 모두 흩어지고 말자씨는 소영과 조금 떨어져 걸으며 집으로 향했다. 소영이 말자씨의 눈치를 보며 슬쩍 팔짱을 꼈다.


“엄마.” 소영이 작게 불렀다.


“응.” 말자씨가 약간은 멍하게 답했다.


“난 정말 좋아.”


“뭐가.”


“엄마가 어떻게 꾸미던… 남자를 만나던…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


“오빠랑 지영 언니는 너무 신경 쓰지 마…”


“…”


“둘 다 워낙 고지식하잖아.”


“으응…”


“엄마가 고생한 거, 누구보다도 오빠랑 언니는 잘 알고… 분명 응원해줄 거야.”


“그래…”


“엄마, 난 엄마가 행복하면 그걸로 좋아. 정말로.”


말자씨가 소영의 얼굴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소영이 약간 낯간지럽다는 듯 웃었지만 말자씨는 그 웃음이 마음이 와닿지 않았다. 말자씨는 집에 돌아와서도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말로는 다할 수 없는 허무함과 마음 구석 어딘가에서 계속해서 느껴지는 불편한 죄책감, 무엇보다 최씨에 대한 사랑이 사회적으로 환영받을 수 없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자식들마저 눈에 불을 켜고 반대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말자씨는 자식들이 자신의 희생을 인정하고 응원해줄 거라는 막연한 믿음까지도 있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손녀까지 돌보며 아픈 무릎을 견디며 일하고 자식들에게 조금이나마 짐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말자씨는 최씨와의 관계뿐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에도 허무함이 느껴졌다. 어렴풋이나마 최씨와의 황혼 재혼까지도 상상해본 자신이 무척이나 한심하게 느껴져 말자씨는 밤이 되어서도 뒤척였다. 말자씨가 그렇게 혼자 허무의 심연에 가라앉을 동안 최씨는 노력한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문자도, 전화도 없었고, 그것이 말자씨를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지희의 생일 이후 말자씨에게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단지 그저 전에 비해 웃는 일이 적어졌고 종종 멍하게 있을 뿐이었다. 똑같이 화장하고 똑같은 매니큐어를 바르고 똑같이 출근해 똑같은 일을 했으나 전과 달라진 것은 종종 멍하게 있을 때가 많아졌다는 것뿐이었다. 요 며칠 힘이 없던 말자씨의 모습에 최씨는 적잖이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슬슬 최씨의 아내도 최씨의 반복되는 거짓말을 알아챈 눈치였고, 최근 들어 말자씨도 자신과의 만남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한 최씨는 말자씨와 어떻게 끝낼지 고민했다. 최씨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장 깔끔하고 좋은 방법은 해외에 살던 자식들이 자신과 합가 하기를 원해 해외로 나간다는 핑계를 대는 것이었다. 벌써 두어 번 다른 여자들에게 사용한 방법이었으나 언제나 실패한 적이 없는 핑계이기도 했다. 여느 날과 같이 최씨는 말자씨와 데이트 같지 않은 데이트를 하다 아주 조심스러운 듯이 말을 꺼냈다.


“저… 참 이거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최씨가 최대한 어려운 얘기를 꺼내는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말씀하세요.” 말자씨가 조금은 기운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갑작스럽지만, 아이들이 제가 걱정이 되는지 말이죠…” 최씨가 대화의 요점을 최대한 질질 끌며 말했다. 말자씨는 답답한 기색 없이 최씨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 해외에 나가 있는 아들 녀석이 같이 살지 않겠냐고 하네요.” 최씨가 정말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내며 은근히 말자씨의 눈치를 살폈다. 말자씨는 가만히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울거나 자신을 붙잡는 귀찮은 행동을 할 거라고 예상한 최씨는 뜻밖의 반응에 당황해 더욱 주절거리며 말했다.


“참, 괜찮다는데도… 아들이 효자라… 아 그래도 바로 가는 건 아니구요. 시간은 좀 걸릴 것 같기도 하고…”


“예…” 말자씨가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 최씨는 그제서야 조금 긴장이 풀려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말자씨를 바라보았다. 최씨는 말자씨에게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이쯤에서 저희는 정리하는 게…”


말자씨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최씨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제가 해외로 나가고 하면 말자씨를 더 이상 볼 수 없고…”


“… 역시 재혼은 어려운 거지요?”


말자씨가 어느 정도 예상한 건지, 아니면 그저 지금 상황을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예상외로 차분하고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공손한 말투로 물었다. 최씨는 재혼이라는 단어에 다시 움찔했지만 최대한 아쉬운 듯한 목소리를 꾸며대며 말했다.


“예,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가… 뭣보다 이제 만날 기회도…” 최씨가 말끝을 흐렸다. 말자씨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모두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으나 지희의 생일 이후 본인 또한 최씨와의 관계가 언젠간 끝날 것임을 깨달아 마음의 준비가 시나브로 되어있던 참이었다. 소영의 말대로 바람을 피우는 것도, 숨겨야 하는 사이도 아니었으나 자식들이 그렇게까지 싫어한다면 말자씨는 더 이상 관계를 이어나갈 자신이 없었다. 고집을 부리고 계속할 수 있는 관계였으나 잠시 숨어있던 모성이 말자씨의 모든 감정을 덮어버렸다. 결국 말자씨는 민영이 말자씨의 배에 뿌리내린 그 순간부터 지금껏 자신을 지배해온 모성이라는 굴레를 떨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에 반해 최씨는 무거운 혹이 떨어져 나간 듯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 당분간은 의심에 가득 찬 아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못내 귀찮긴 했지만 두 여자 사이에서 눈치 보는 것보단 한 여자가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어색한 끝 마무리를 하며 최씨와 말자씨는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래도 가끔은 연락해도 되지요?” 말자씨가 수줍은 듯, 어쩌면 슬프게 물었다.


“그럼요. 말자씨 연락이면 언제든 받지요.” 최씨가 별생각 없이 답했다. 말자씨와 더 이상 연락할 일은 없을 것이다.


말자씨는 면목없다고 여러 차례 말하며 먼저 뒤돌아 간 최씨의 뒷모습을 꽤 오래 바라보았다. 말자씨는 그 때 최씨에게 연인에 대한 감정보다 같은 부모의 동질감을 더 크게 느꼈다. 한 번 부모가 된 이상 여성, 남성이라는 각각의 성별은 사라지고 엄마, 아빠라는 역할만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자씨는 뼈저리게 느꼈다. 말자씨는 소영과 지희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며 자신의 딸이지만 재영이 부러웠다. 결혼을 안 한다고 했을 때 말자씨는 자신이 재영에게 엄마답지 못한 모습만 보여 그것에 대한 좋지 못한 추억으로 평생을 혼자 산다고 다짐한 것에 가슴이 메였으나, 여자로서 재영은 옳은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가 좋아졌다고는 하나 결혼 후 시댁이라는 새로운 부모와 가족을 신경 쓰고 자식이라도 태어나면 그 자식을 위해 최소 20년간 뼈가 가루가 되도록 육아, 살림, 가사, 돈벌이까지 해야 한다. 노년에 이제야 쉴 틈이 생기나 싶어질 때 아이들은 자신들의 자식을 데려와 떠맡기고는 모성에 호소하면 또 제 자식 힘들까 손녀 손주까지 맡아 황혼육아를 시작한다… 그런 상념에 빠져있던 말자씨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참 만화를 같이 보고 있던 지희와 소영이 반갑게 인사했다. 말자씨는 그제야 눈물이 나 현관문을 닫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아이처럼 울었다. 소영이 놀라 현관으로 달려와 말자씨를 달래려 했지만 그것은 목 놓아 울어야만 풀릴 수 있는 말자씨만의 감정이었고, 어쩌면 밤새 울어도 끝나지 않을 허무함과 공허감, 자기 자신을 잠시 찾았다 놓친 어느 한 사람의 우울이었다. 그렇게 한 동안 울다 지친 듯 말자씨는 눈화장과 립스틱이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 속의 비친 자신이 추했고 수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엄마면서, 지희의 할머니면서 이 나이에 콜라텍에 드나들고, 모텔에 드나들고, 맞지도. 않는 화장에 매니큐어, 독한 향수 냄새에 최씨가 피워대는 담배냄새가 배인 옷…


말자씨는 그날 이후 모든 화장품과 매니큐어를 버리고 반짝이게 윤이 나도록 닦은 화장대의 거울 또한 전처럼 다른 옷가지들로 덮어두었다. 말자씨의 깊은 우울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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