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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인 Oct 30. 2022

춤바람 말자씨 5

말자씨와 최씨의 사이는 점점 깊어져 갔고 처음 조심스럽게 손을 맞잡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육체적 접촉은 늘어났다. K씨가 우스갯소리로 하던 저속한 농담에 진저리 치던 말자씨는 농담 속의 행동에 점차 익숙해져 갔고 사랑의 감정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남편과의 의무적이고 책임감이 뒤따르는 관계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과의 접촉, 그리고 교감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런 새로움에 눈을 뜰수록 말자씨는 자신도 모르는 새 여자의 본능에 점점 잠식되어 갔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말자씨가 지니고 있었으나 결코 세상엔 드러낼 수 없었던 질투와 불길한 망상, 애정을 갈구하는 매달림이었다. 모텔에 들어설 때마다 뒤따라오는 시선이 아예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자 씨는 이미 사랑의 감정이 자신의 수치심보다 커져 있었다. 백발의 음탕한 여자를 바라보는듯한 시선 따위는 무시할 수 있는 철면피가 된 것이다. 하지만 말자씨는 이 관계가 언제나 완벽히 맘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둘이 함께 얼굴을 마주할 때는 언제나 즐겁고 세상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지만 최씨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 최씨는 말자씨가 아무리 문자를 하고, 전화를 해도 늘 묵묵부답이었다. 그것이 말자씨의 불길한 망상에 늘 부채질을 하였고, 나중엔 스스로 제 성미에 못 이겨 소영에게 집안일에 대한 트집을 잡거나 가끔 일찍 돌아와 지희에게 신경질을 부리곤 하였다. 사랑에 빠진 여자가 그러하듯 말자씨는 스스로 절제하는 법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최씨와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던 말자씨가 몸을 일으켰다. 최씨는 늘 관계가 끝난 이후엔 담배를 피우며 천장을 멍하니 보곤했다. 그런 최씨가 자신에게 흥미가 떨어진 것은 아닐까 말자씨는 늘 육체적 즐거움 뒤에 따라오는 불안감을 지니고 있었다. 말자씨는 늘 최씨에게 지닌 불안감과 질투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으나 말투만큼은 공손했다.


“저…” 말자씨가 입을 떼자 최씨가 자신의 입에서 나와 공중으로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던 눈을 돌려 말자씨를 바라보았다.


“집에 돌아가서는 많이 바쁘신가 봐요.”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공손함 가운데 퉁명스러움 티 내며 말자씨가 물었다.


“예, 뭐…” 최씨가 다시 흩어지는 연기로 시선을 돌리며 대충 답했다. 최씨는 말자씨가 다른 여자와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여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고지식하고 순종적인 이미지에 최씨는 잠시 끌렸다. 하지만 종종 말자씨는 최씨가 만났던 여느 여자들과 똑같은 반응을 했고 나이를 고려하더라도 미인과는 거리가 멀었던 말자씨에 대한 흥미는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말자씨가 처음보다 점점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최씨에게는 사실 큰 감흥조차 없었던 것이다.


“따로 뭐 하시는 거라도?” 말자씨가 눈치를 보면서, 하지만 서두르면서 물어보았다.


“그냥 좀… 집에 가면 아내 흔적이 있어서…” 최씨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평상시에는 이 정도만 말해도 말자씨는 알아서 물러났었다. 하지만 몸을 준 말자씨는 최씨가 생각하는 과거의 말자씨와는 달랐다. 최씨의 전부 인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라고 말자씨는 스스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제가 있는데… 차라리 저희…” 말자씨는 재혼에 대해 얘기하려고 했다. 그 낌새를 알아차린 최씨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말을 막았다.


“제가 노력해보죠. 말자씨 말대로 지금은 말자 씨에게 집중해야 하는데… 미안합니다.”


최씨가 미안하다는 듯 능청스럽게 울상을 지었다. 재혼에 대한 이야기는 말자씨 쪽에서 종종 먼저 꺼내려고 했으나 늘 눈치 빠른 최씨는 그것을 곧잘 알아채고는 화제를 전환하기 일쑤였다. 최씨의 그런 점 또한 말자씨는 몹시 맘에 들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이 최씨의 ‘수준’에 못 미치는 여자이기 때문에 최씨가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생각은 말자씨를 점점 예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사실 최씨는 사별한 것이 아니었다. 집에 버젓이 비슷한 또래의 아내가 살아 숨 쉬고 있었고 여느 노년의 부부가 그러하듯 육체적 접촉은 없었다. 퇴직 이후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런 점이 최씨에겐 불만으로 쌓여갔고 점점 가정 이외의 곳에 마음을 주기 시작했다. 무도회장에서 만난 여자와의 만남을 아내에게 들킨 이후 지인인 박씨와 함께 무도회장을 옮기고, 그곳에서 말자씨를 만난 것이다. 최씨가 무도회장에서 여러 여자를 겪으며 알게 된 것은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 있어 ‘동정심’과 챙겨주고 싶은 ‘모성애’를 자극하는 방법만큼 효과적인 것은 방법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걸 알게 된 후 만든 핑계가 바로 사별이었고, 가끔은 자신의 얘기에 너무 빠져들어 자신의 거짓말에 눈물을 흘리는 지경이 되기도 하였다. 다행히 그런 점 때문에 말자씨는 지금까지도 일말의 의심도 없이 최씨를 믿고 있었다.


“정말로요?” 말자씨가 최씨의 말에 기쁨과 설렘을 가지고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럴 때 말자씨는 가끔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다. 마음으로부터 순수한 열정의 온기가 얼굴을 감돌곤 했다.


“정말로요.” 최씨가 짐짓 믿음직스러운 말투로 다짐하듯 답했다. 물론 연락을 할 생각은 없었다. 할 생각이 없다기보단 애초에 할 수 없었다. 최씨의 외도로 최씨 부인의 의심 또한 커졌기에 이렇게 늦게 까지 외출하는 날에는 늘 박씨의 핑계를 대며 나왔고 집으로 돌아가면 최씨의 핸드폰을 빼앗다시피 하여 연락한 목록까지 샅샅이 살펴보기 때문이었다. 최씨가 말자씨에게 연락하지 못하는 이유는 말자씨와 헤어지자마자 말자씨의 연락처를 차단해놓기 때문이었다.


말자씨는 최씨의 속사정은 전혀 알지 못한 채 최씨의 다짐을 받고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소영은 어느 순간부터 집으로 돌아오는 말자씨에게 은근하게 맡아지는 담배향에 대해 묻고 싶었다. 분명 엄마는 예전의 엄마가 아니며 누군가의 여자가 되었다는 심증이 말자씨의 자식들에게는 공공연한 사실로 자리 잡았다. 소영은 그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난 이후 다시 엄마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생겨나 자신이 현재 겪는 문제는 참을 수 있다고 여겼다. 지금 겪는 스트레스는 지희가 조금만 크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다. 대략 몇십 년간 홀로 자신들을 여기까지 키워 낸 강인한 엄마지만 한 사람의 여자로서 남자 없이 살아온 세월은 가혹했으리라. 소영은 생각했다. 민영은 여전히 못마땅해했지만 선희와 소영의 만류에 차마 말자씨에게 대놓고 묻을 순 없었다. 다만 소영은 민영에게 ‘엄마가 만나는 남자, 우리도 소개해달라고 해보자.’라고 조심스럽게 제안할 뿐이었다. 민영과 소영을 제외한 말자씨의 다른 자식들은 깊은 사정은 모른 채 엄마의 연애를 응원했고 소영과 민영은 어딘가 무거운 마음으로 그저 가만히 있었다. 소영과 민영은 곧 다가올 지희의 생일에 맞춰 가족 모임을 계획했다. 그때 말자씨에게 만나는 사람에 대해 묻고 괜찮은 사람이라면 엄마인 말자씨의 ‘여자’로써의 새로운 출발을 축복해줄 생각도 있었다. 이제 민영은 겉으로라도 그렇게 해줄 의향 정도는 있었다. 차라리 불륜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족들에게 거짓말하지 말고 당당히 만나길 바라는 마음도 생겼다.


“엄마, 이번 지희 생일 겸 가족들 다 같이 오랜만에 얼굴도 보려는데 어때?” 씻고 나와 주름에 효과가 좋기로 소문난 영양크림을 덕지덕지 바르는 말자씨 옆에 서서 소영이 말했다.


“아, 지희 생일이 있구나. 좋지. 애들 시간은 다 맞는다니?” 말자씨는 소영이 옆에 서있어도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을 마치며 답했다. 말자씨는 얼굴 곳곳에 검버섯을 조만간 빼야겠다고 중얼거렸다.


“응, 언니들한테 다 연락해봤는데 형부들 시간은 안 맞아도 언니들은 꼭 온다고 했어. 우리끼리 모인지도 정말 오래됐잖아.”


“그렇지… 장을 봐야겠구나…” 여전히 눈가에 검버섯을 손으로 더듬던 말자씨는 그제야 천천히 소영쪽으로 돌아 앉으며 말했다.


“아니야. 나가서 먹자. 엄마 힘들잖아.” 소영이 말했다.


“나가서 먹으면 비싸기만 한데…”


“괜찮아. 자식이 4명인데… 비싸도 다 나눠서 내면 되고… 여하튼 엄마는 시간만 맞춰 오면 돼.”


“그래…”


“그리고…” 소영이 머뭇거렸다.


“응?”


“엄마… 수영은 잘 다니는 거지?” 소영은 차마 미상의 남자에 대해 묻지 못한 채 엉뚱한 물음을 던졌다.


“응. 그럼.” 말자씨는 어느새 거짓말이 익숙해져 소영의 눈을 바로 바라보며 답했다. “너무 재밌어.”


“…응, 다행이다. 쉬어.” 소영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소영이 나가자 말자씨는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을 잡았다. 최씨에게 온 연락은 여전히 없었다. ‘노력한다더니.’ 말자씨는 또다시 불길한 망상에 휩싸였다. 최씨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아님 전부 인을 그렇게나 사랑했던가? 자기 자신이 죽은 남편에 대해 일말의 그리움도 없어서 인지 후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말자씨에게는 다가올 지희의 생일보다 도 지금 당장 울리지 않는 휴대폰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하지만 곧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최씨는 서서히 노력한다고 했을 뿐, 바로 달라지겠다고 하지 않았다. 말자씨는 생각해다. 서서히 노력할 것이다. 분명. 말자씨는 다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최씨의 태도는 여전했다. 아니 어쩌면 말자씨와 거리를 두려는 느낌까지 들었다. 최씨가 나름의 고백을 하고 6개월이 지났다. 최씨는 지인인 박씨가 결국  K씨와 불륜 사이를 끝냈다고 전해 들었다. 최씨도 슬슬 말자씨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울 좋은 핑계가 필요했으나 퍼뜩 생각나지 않아 고심할 무렵 지희의 생일이 다가왔다. 민영과 소영은 지희의 생일 일주일 전부터 말자씨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지 상의했다. 똑 부러지는 결론은 나오지 않았으나 그냥 대놓고 물어보자. 쪽으로 결정되었다. 물론 총대는 장남인 민영이 맡기로 했다. 선희는 지희의 생일 당일 아침부터 민영에게 신신당부했다. 화내지 말고, 좋게 좋게 물어보자. 민영은 알겠다고 답했으나 여전히 심란했다. 다 늙어서 연애라니. 남자라니. 여전히 민영은 남사스러웠고 짜증스러웠다. 그렇게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진 채 지희의 생일, 말자씨의 가족이 모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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