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자씨의 은밀한 즐거움은 소영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이어졌다. 말자씨의 짧고 거칠어진 손톱에는 점점 더 짙은 매니큐어가 발라지고, 뒤쳐질세라 입술의 색 또한 짙어져 갔다. 말자씨의 변화는 K씨뿐만 아닌 소영과 말자씨의 가족들 사이에서도 눈에 띌 정도였지만, 말자씨는 주변의 시선에 더욱 기분이 좋았다. 인생의 끝자락에 다가와서야 주목받는 기쁨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노년에서나 알게 된 달콤함이었고 그 꿀처럼 퍼지는 달콤함이 말자씨 내면의 무언가를 계속해서 충동질시키고 있었다. 소영은 자신의 향수를 몰래 뿌리는 말자씨를 배려해 눈에 잘 띄는 곳으로 향수들의 위치를 옮겨두었다. 소영은 말자씨의 변화가 몹시 반가웠고, 자신들의 엄마로서, 지희의 할머니로 써가 아닌 '말자씨의 삶'을 응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자씨의 변화에 대해 모두가 소영과 K씨처럼 긍정적이진 않았다. 특히 큰 아들 민영은 소영에게 건너 전해 들은 말자씨의 변화된 행동이 몹시 '거슬렸다.' 정확한 자신의 감정을 알 순 없었으나, 민영은 '엄마가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된다.'라는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민영의 아내인 선희는 그런 민영에게 '어머님 보기 좋기만 한데 뭘 그래.'라고 장난 섞인 말투로 말을 건네곤 했지만 민영은 그것마저도 짜증스러웠다.
"정말, 당신 어머니한테 너무 그러는 거 아니야." 선희는 늘 자신도 모르게 말자씨의 모습에 자신의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미래마저도 투영하고 있었기에 언제나 말자씨의 편력을 들었다.
"수영? 좋아. 내가 운동하는 걸로 뭐라고 해? 옷이니, 화장이니… 이상하게 다니니까 하는 말이잖아.”
"어머니랑 같은 또래 수강생 있으면 꾸미고 싶고 그럴 수 있지. 여자는 나이 들어서도 여자다? 나이 들었다고 여자 아닌 거 아니라구. 옆에 여자가 나보다 이쁘면 신경 쓰이고, 나보다 잘 꾸미면 신경 쓰이고… 여자란 원래 그런 거야."
"나이가 벌써… 그 나이면, 여자가 아니라 할머니라고."
"웃겨. 남자들은 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이렇고 저런 거 다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여자는 왜 나이 먹었다고 할머니로 끝이야?"
민영은 뭔가 말하려다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선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 민영을 슬쩍 보고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젊게 사시면 좋지. 아들이 되어서 왜 그러나 몰라.' 선희가 중얼거리자,
"젊게 살아? 야. 그게 주책이지. 젊게 사는 거냐?" 민영이 버럭 했다.
선희는 민영의 붉어진 얼굴을 보고 순간적인 당황스러움에 입을 다물었다.
"소영이, 걔 이제야 공부하겠다고 자기가 모은 돈 끌어다 대학 들어간 애야. 매일 밤늦게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애라고. 그런 애한테 애 떠맡긴 거 같아서 미안해 죽겠구먼. 엄마는 속도 모르고 놀러 다니고, 그 나이에 입술은 아주 새빨갛게 칠하고. 아휴... 그런 걸 추하다고 하는 거야. 알겠어? 그게 뭐? 젊게 사는 거라고? 웃기지 말라고 해."
민영이 지희를 입에 올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선희의 목도 붉게 변했다. 지희를 스스로 돌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늘 선희에겐 콤플렉스였다.
"어머니한테 지희 떠맡긴 건 애초에 우리야. 그리고 아가씨가 괜찮다고 했다는데, 왜 당신이 미안하다는 건데?"
"걔가 괜찮다는 게 진짜 괜찮아서 한 말이야? 엄마 생각해서, " 민영의 말을 끊고 선희가 말했다.
"목소리 높이지 마. 지희 깨."
선희가 낮게 힘주어 말하자 민영이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엄마 생각해서 한 말이라고 다."
"오히려 아가씨가 봐주는 게 지희한테는 좋을 수도 있어. 나이 터울도 적고." 선희도 막내 아가씨인 소영을 생각하며 늘 아이를 떠맡긴다는 죄책감과 답답함에 약간 침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몰라 그래?" 민영이 여전히 신경질 적으로 답했다.
"어머니 이제야 정말 좋아 보이시던데 당신도 좋게 생각해. 아가씨는 내가 더 챙길게."
민영은 들은 듯 못 들은 듯 깊게 한숨 쉬고는 답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선희는 민영이 먹고 간 잔반을 정리하며 ‘우리가 죄인이지…’ 다시 작게 중얼거렸다. 한편, 말자씨와 최씨의 사이는 민영의 끓는 속과 비례하듯 점점 깊어져 갔다. 최씨가 특히 블루스를 좋아했기에 신나는 뽕짝 음악이 틀어지면 최씨와 말자씨는 무도회장 옆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하거나 가끔은 맥주를 한 캔씩 마시기도 했다. 그때마다 최씨는 중학교 교사였던 시절의 얘기, 사별한 부인의 얘기, 자식들의 얘기 등을 했고 말자씨는 잠자코 앉아 들었다. 최씨는 주변에서 들리는 현란하고 노골적인 노래 가사와 어울리지 않는 주제의 대화를 하곤 했는데 사별한 전부 인의 얘기를 할 때는 가끔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말자씨는 자신의 남편을 떠올려보았으나 죽은 게 잘되었다는 생각 이외에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아 그저 ‘참 힘드셨겠어요.’라는 위로를 건넬 뿐이었다.
“제가 참 나이 들어 주책이죠?” 전부인 얘기에 눈물을 훔치던 최씨가 물었다.
“아뇨. 참 좋은 부인이셨어요.” 대답하며 말자씨는 마음 어딘가가 저려왔다. 그 저림은 여자의 본능에 아주 뿌리 깊게 인이 박힌 질투의 감정이었다.
“말자씨도 참 멋진 어머니이자 부인이었을 거예요. 말자씨가 아내라면 참 복 받은 거죠.” 최씨가 맥주를 한 모금 홀짝이며 말했다.
말자씨는 멋쩍게, 하지만 진심으로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아유…’라며 고개를 저었다.
“말자씨는 사별한 지 꽤 되셨죠?”
“예… 햇수로… 몇십 년은 되었죠…” 말자씨는 자신의 과거가 늘 최씨에 비해 보잘것 없이 느껴졌기에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을 꺼려 대충 얼버무렸다.
“다른 남자, 그러니까 새로운 남편은 생각 안 해보셨어요?” 굳이 재혼이라는 단어를 피해 가며 최씨가 은근한 눈빛으로 물었다.
“재혼이요?”
“예… 꼭 남편이 아니더라도, 여자 혼자 생활하기 어려웠을 텐데요.”
최씨의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워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는 틈에 최씨가 다시 물었다.
“전 말자씨가 참 생활력도 강하고, 성실하고, 여자치고 우직한 면도 있고… 맘에 드는데…” 최씨가 괜히 뜸을 들이며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말자씨는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한 채 여전히 최씨의 말에 어떻게 대꾸할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남편은 못되더라도 애인은 되어줄 수 있는데… 말자씨 생각은 어떠신지?”
말자씨는 최씨의 말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몸을 움직일 수 없었으나 심장만큼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숨이 가빠올 정도로 뛰고 있었다. 말자씨가 놀란 얼굴로 아무 말 없자 최씨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참… 저도 애들이 해외에 나가 있고… 외로워서 실언을 했나 봅니다.”
최씨의 말에 말자씨가 느리지만 확실하게 대답했다. “아뇨. 좋아요. 애인…” 그렇게 말자씨는 노년에서야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감정은 세상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아픈 무릎도, 허리도, 손목도 자연히 낫게 하는 힘이 있었다. 무엇보다 낡아 빠진 아파트를 깨끗이 청소하는 성실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던 말자씨는 교양 있고 자세가 바른 심지어 ‘전직 교사’였던 품위 있는 남자의 애인인 자신의 모습에 더 만족하게 되었다. 최씨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 말자씨는 전처럼 무릎이 튀어 나고 목이 늘어난 옷을 입고 다닐 수 없게 되었고, 낡고 해진 운동화는 일할 때만 신고 일이 끝나는 대신 굽은 낮지만 반짝거리는 구두를 자주 신게 되었다. 말자씨는 점점 K씨의 저급한 농담에도 어울리지 않게 되었고,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K씨는 말자씨가 매우 ‘재수 없어졌다.’라며 반장과 흉을 보게 되었다. 말자씨는 그런 것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자신은 ‘품위 있는 남자’의 애인이니까.
말자씨가 몇 달간 수영을 다니며 점점 꾸며가고 얼굴과 눈빛에 생기가 도는 모습을 보며 소영은 처음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영은 지쳐가고 있었다. 말자씨가 무도회장에 가지 않는 요일에도 최씨와 따로 만나 데이트를 했기에 어느새 주에 3번이 주에 4번, 주에 5번 가끔은 주말까지도 집에 묶여 지희를 돌봐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늘 돈에 치이는 엄마가 안쓰러워 대학 생각은 일찍이 접고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일하던 소영이었다. 30살이 넘도록 미혼으로, 그리고 고졸로, 점점 나이 드는 자신을 보며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늘 소영을 따라다녔고, 그 불온한 기운을 잠재우기 위해 소영은 다시 학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비록 학점은행제지만 늦깎이 대학생 생활을 하며 나름 보람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었다. 하지만 말자씨가 지희를 부탁한 이후로 소영은 공부도, 친구들과의 만남도, 혼자만의 시간마저도 일정 부분 포기해야 했다. 말자씨는 소영의 개인적인 시간을 어느 순간부터 허락지 않았고, 소영은 암묵적으로 주말엔 그저 지희와 하루 종일 놀아주는 보모가 된 기분이었다. 그럴수록 소영의 마음에서는 학업에 대한 조급함과 불안함이 밀려왔고, 그와 더불어 점점 말자씨에게 서운한 감정이 드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과, 조카인 지희가 귀찮아지는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 혼란스러움은 점차 큰 오빠인 민영과 선희에게 표출되었다. 그렇게 말자씨가 행복한 시간을 보낼수록 말자씨의 자식들은 멀어지고 있었다.
“엄마는 또 늦는데?”
“응.” 소영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대체 이. 시간까지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민영이 신경질 적으로 물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소영이 바닥에 어질러진 지희의 장난감을 정리하며 짜증스럽게 답했다. 소영의 태도에 민영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요즘도 화장하고… 그러고 다니니?”
“응.”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니까.”
“여보.” 듣고 있던 선희가 거기까지 하라는 듯 민영의 옷을 잡아당겼다. 민영이 선희의 손을 쳐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엄마 남자 만나는 거 아니냐?”
소영이 민영의 말에 우뚝 멈춰 섰다. 소영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수영이 아니라 남자를 만난다 한들 응원해 줄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소영은 지쳐있었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은 점차 원망으로 바뀌고 있었다. 소영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엄마가 자신이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몰라준다.’, ‘엄마는 알아야지.’, ‘너무한 거 아니야?’라는 마음이 소영의 내부를 휘젓고 있었다. 소영이 손에 잡고 있던 장난감을 순간 바닥으로 내던지면 소리쳤다.
“엄마한테 직접 물어보면 될 것 아니야? 나도 궁금해. 정말 궁금하다고!”
선희의 한쪽 손을 잡고 있던 지희가 놀라 선희의 뒤로 숨었다. 소영은 언제부터인가 지희에게 짜증을 내는 일이 많아졌고 그런 소영을 지희는 점차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소영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민영이 잠시 입을 벌리고 넋을 놓고 있다가 말했다. 아빠 없이 살아온 막냇동생 소영에게 늘 안쓰러움이 있던 민영은 소영에게만큼은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언제나 나름 노력해왔고 큰 소리 한 번 낸 적 없었다.
“오빠가 미안하다. 갈게.” 이번에도 소영의 앞에서는 순순히 물러난 민영은 속으로 말자씨에 대한 분노의 불씨가 튀었다. 늘 말자씨의 편을 들던 선희도 점점 말자씨의 귀가시간이 늦어지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던 참이었고 이번만큼은 민영의 말에 속으로만 동의했다. 말자씨는 귀가해서 더 이상 소영의 저녁을 챙기지 않았고, 지희에 대해 묻지도 않았고, 집안일에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소영은 늘 말자씨가 오는 시간에 방문을 닫고 인사도 없이 들어가 있었지만 말자씨는 닫혀 있는 소영의 방문을 두드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즈음 말자씨의 신경을 제일 건드리는 것은 데이트 이후에 최씨가 늘 연락이 안 된 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귀가를 하는 그 순간 최씨는 모든 연락을 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