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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인 Oct 30. 2022

춤바람 말자씨 3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말자씨는 여러 고민에 빠졌다. 최씨를 볼 수 있는 건 주 3번인데 현실적으로 지희때문에 말자씨가 무도회장을 다시 가는 것부터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자씨는 쭈그려 앉은 채 거실 바닥을 물걸레로 닦으며 여러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같이 사는 소영에게 주 3번만 지희를 부탁하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이라고 결론지었고 주 3회 아는 지인과 운동을 다니기로 했다고 핑계를 둘러대기로 했다. 11시 30분 즈음 집으로 돌아온 소영의 밥을 습관적으로 차리며 말자씨는 가슴 한 구석에서 슬슬 올라오는 죄책감과 알 수 없는 불안함을 애써 누르고 있었다. 소영이 옷을 갈아입고 나와 작게 중얼거렸다. ‘차릴 필요 없다니까…’ 말자씨가 소영의 맞은 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어…”


“응?”


“그…”


“뭔데.”


“혹시 화, 수, 목만 좀 일찍 올 수 없나…?”


“갑자기 왜?”


“그게… 같이 일하는 K 아줌마 있지? 전에 몇 번 얘기했던…”


소영은 밥을 오물오물 씹으며 곰곰이 기억을 되돌려보았다.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소영이 대충 대답하자 말자씨가 빠르게 덧붙였다.


“글쎄, 같이 운동을 다니 자네? 이 나이에 무슨 운동이냐니까… 관절도 자주 움직여줘야 좋다나…”


“그래? 무슨 운동이길래.”


“응? 뭐 뻔하지 뭐…”


“뻔한 거 뭐? 수영 같은 거?”


“어어… 그런 거…”


“하면 좋지. 엄마 맨날 무릎이랑 어깨랑 많이 아파했잖아. 수영이 확실히 관절에는 좋다고 하더라.”


“으응…”


“눈치 보지 말고 해. 지희는 내가 데려오면 되니까.”


소영이 흔쾌히 말하자 말자씨는 마음에 큰 짐을 덜어놓은 듯 작은 한숨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없는 살림에 장학금 받아보겠다고 늦게까지 공부하는 소영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말자씨는 이번만큼은 그 마음을 외면했다. 소영은 자신의 엄마인 말자씨가 몰래 화장하던 모습을 잊지 않고 있었다. 밤늦게 아무도 없는 방에서 앉은뱅이 화장대 앞에서 한껏 구부리고 화장하던 엄마의 모습이 묘하게 소영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그 뒤로 엄마를 많이 도와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때마침 말자씨의 운동 소식은 그런 무거웠던 소영의 마음도 한결 가볍게 만들어주었고 소영은 오히려 기분 좋게 승낙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지만 그런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언제나 뼈 빠지게 일만 하는 엄마였다. 소영은 그런 엄마가 고마우면서도 같은 여자로서 안타까웠다.


“강습료 같은 건 얼마래? 수영복도 사야 하잖아.”


“어? 그건 뭐…”


생각지 못한 질문에 말자씨가 얼버무렸으나 소영은 엄마가 자신에게 부담을 줄까 봐 말을 아끼는 것으로 생각하고 방에 들어가 주섬주섬 지갑을 꺼냈다. 그리곤 자신의 카드를 건넸다.


“이걸 왜?”


“여기에 10만 원 정도는 있는데… 수영복도 좀 사구, 혹시라도 남으면 거기 아줌마랑 맛있는 것도 먹구 하라구.”


“얘는… 학생이 돈이 어딨어서…”


“주말에 아르바이트하는데 돈 받아도 교통비 말고는 어디 쓸데도 없구… 여하튼 좋은 걸로 사.”


좋은 수영복이 대략 얼마인지도 모르지만 대략 10만 원 안쪽이지 않을까 싶어 소영이 재차 카드를 말자씨에게 들이밀었다. 말자씨는 애써 누르고 있던 죄책감이 목 끝까지 차올라 차마 소영의 카드를 만지지 조차 못했다. 한두 번 더 실랑이 한 끝에 소영은 다시 카드를 지갑에 넣었고 ‘혹시라도 필요하면 다시 말해. 알았지?’라고 재차 권했다. 말자씨는 빈말이라도 알겠다는 대답 없이 소영이 먹은 그릇을 조용히 설거지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말자씨가 내심 기다리고 기다리던 화요일이 되었다. 입고 갈 옷이 마땅치 않아 말자씨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태가 좋은 옷을 골라 입었다. 신발을 살 여력은 없어 옷과 낡은 운동화가 몹시 안 어울렸지만 말자씨는 나름 만족한 상태였다. 립스틱도 바를까 하다 K씨가 청소반장을 무안 주었던 일이 생각나 대신 은은하고 티가 많이 안나는 매니큐어를 골라 아주 얇게 살살 발라보았다. 갈라지고 주름진 손에 안 어울릴 수도 있지만 말자씨는 그것 또한 만족했다. 그저 자신이 ‘평상시’와 다른 모습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자씨의 일상에 새로운 즐거움을 준 것이다. 출근을 하니 눈썰미 좋은 K씨가 대번에 말자 씨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어머 이 언니, 꾸미고 온 것 봐.”


K씨의 말투에는 악의는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말자씨는 어딘가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에 서둘러 청소도구를 챙겨 나왔다. 청소만큼은 평상시와 똑같이 했으나 평상시보다 시간이 안 가는 느낌을 받으며 말자씨는 얼른 퇴근시간이 되기를 내심 기다렸다. 청소를 모두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K씨의 수다가 반가울 정도였다. 혼자 있는 것보다는 시간이 잘 간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드디어 기대하던 퇴근시간이 되었고, 똑같이 버스를 타고 낡고 냄새나는 건물로 들어가 냄새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무도회장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전히 정신 사나운 조명이 돌아가고 실내는 어두웠다. K씨는 박씨와 최씨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익숙하게 걸어갔고 말자씨도 그 뒤를 따랐다.


“이 오빠들은 항상 여기 죽치고 있는다니까.”


K씨가 말자씨를 향해 말했다. 최씨가 말자씨를 보고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말자씨는 오늘 아침부터 뛰었던 심장이 더 크게 둥둥거렸다. K씨가 최씨를 보고 말했다.


“언니는 춤 같은 거 아무것도 모르니까 오빠가 잘 알려줘야 해.”


“으응… 쉬운 것부터 천천히 시작하면 되죠.”


“지르박, 차차차, 부르스, 탱고… 스텝 외우려면 머리 아프다니까.”


“그래도 K씨는 완전 선수잖아요.”


“나야 뭐, 워낙 어릴 때부터 춤 좋아했으니까 빨리 배웠지만…”


K씨가 다시 말자씨를 슬쩍 보고는 최씨에게 다시 신신당부하듯 말했다.


“울 언니는 딱 봐도 몸치 잖어. 살살 좀 부탁해요.”


최씨가 ‘알았다니까요.’ 하며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로 응답했다. 그때 박씨가 일회용 컵에 든 남은 커피를 후루룩 한 입에 마시고는 K씨를 툭툭 쳤다. 아마도 나가자는 신호 같았다. K씨가 새침하게 일어나 전처럼 박씨의 팔짱을 끼고는 말자 씨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말자씨는 조명 아래에서 빙글빙글 돌며 즐거운 듯 웃는 K씨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아주 잠깐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으로 겹쳐 보였다. 그때 최씨가 ‘말자씨’ 하고 불렀다. 말자씨는 최씨를 보았다.


“이 노래 끝나면 아마 브루스 나올 텐데 그때 한 번 나가서 천천히 해볼까요?”


“네…”


말자씨는 뭔지 모르지만 일단 알겠다고 답했다. 노래가 바뀌고 최씨가 곧은 자세로 일어나 말자씨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난 모습은 처음 본 말자씨는 예상외로 큰 키와 나이에 비해 다부진 몸매에 놀랐지만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최씨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갔다. 손을 맞잡고 최씨의 다른 손은 말자씨의 어깨에 올라와 살짝 밀착된 자세가 되었다. 최씨는 말자씨에게 스텝을 알려주는 것에만 몰두한 듯 보였으나 말자씨의 머릿속에는 최씨가 알려주는 것들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맞잡은 손과 자신의 어깨에 올라와 있는 최씨의 온기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렇게 말자씨의 춤바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시간 소영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미리 집에 와 미처 못했던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지희를 데려왔다. 항상 비슷한 반찬만 먹는 지희가 내심 신경 쓰였던 터라 소영은 지희와 마트에 같이 가 여러 반찬거리를 사 오고 요리를 해주고 책도 읽어주며 시간을 보냈다. 말자씨는 어딘가 상기된 표정으로 8시 즈음 돌아왔고 소영은 내심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지인과 뭐라도 먹고 왔겠거니 생각했다.


“어땠어?”


소영이 지희를 무릎에 앉혀 놓은 채 물었다.


“응?”


말자씨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영을 바라보다 이내 아차 싶은 얼굴로 말했다.


“어어, 좋았어.”


“다행이네. 엄마 표정 좋아 보여. 진작 다닐걸 그랬다.”


소영의 말은 진심이었다. 어딘가 발그레한 볼에 늘 인상 쓰고 있는 것처럼 푹 파인 미간의 주름이 살짝 옅어졌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막 거기 전에 다니던 아줌마들이 텃세 부리고 그런 건 아니지?”


옆에서 지희가 작게 ‘텃세가 뭐야?’라고 물었지만 소영은 ‘으응, 그런 게 있어. 애기는 몰라도 돼요.’라고 작게 대답했다.


“그런 거 없어. 아휴, 다들 너무 잘해줘서…”


“다행이다. 진짜. 저녁은 먹고 들어온 거야?”


“으응. 그럼.”


“알았어. 엄마 좀 쉬어. 수영 첨 하면 엄청 피곤하고 졸리다던데. 배두 엄청 고프고.”


“쉬긴…”


“됐어. 정말루. 빨래도 했고, 청소기도 돌렸고, 지희도 미리 씻겼으니까 엄마는 푹~ 쉬기만 하세요.”


소영의 품에서 장난감을 조물 거리던 지희도 혀 짧은 소리로 소영의 말을 따라 했다. ‘쉬세요.’ 말자씨는 소영의 말에 옷을 갈아입고 화장대 앞에 앉아 서랍 구석에 숨겨놓은 립스틱 두어 개와 소영이 안 쓴다며 준 립스틱 두어 개의 뚜껑을 열어보며 어떤 색이 예쁜지, 어떤 색이 더 자신에게 어울릴지 고민했다. 갑작스러운 자신의 변화가 이상할 만큼 놀라웠지만 이런 변화가 싫지만은 않았다. 말자씨의 방문 밖에서는 여전히 소영과 지희가 도란도란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말자씨는 가족들에게 비밀이 생겼다는 두려움과 죄책감 그리고 거기에 따른 묘한 쾌감에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것은 작은 흥분이 되어 말자씨의 인생에 새로운 활력이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자씨는 점점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젊어서부터 담을 쌓고 지냈던 화장품에 관심이 생겼고 가끔은 소영이 학교에 간 틈을 타 몰래 소영의 향수를 뿌리기도 하였다. 그런 말자씨의 변화를 K씨가 가장 빠르게 알아차렸다. 말자씨는 얼굴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 빛나고 밝아졌다. 말자씨는 특히 최씨의 취향이 좋았다.


“요즘은 비틀스나 엘비스 프레슬리 같이 딱 심금을 울리는 노래가 없더라니까요.”


“네…”


말자씨는 결혼 전 여공으로 지냈던 추억을 상기했다. 어리고 가능성이 무한했던 한 사람의 여자였던 자신의 모습이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게 그려졌다.


“여기 나오는 노래들이야 신나고 춤추기 제격이지만…”


‘제격’ 같은 말을 하는 최씨의 교양 있는 말투도 좋았다.


“사실 깊이 같은 건 전혀 없잖아요.”


‘깊이’ 말자씨가 조용히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씨가 입고 있는 옷은 늘 잘 다려져 있고 구두는 광이 났다. 최씨의 자식들은 해외에 나가서 생활하고 아내와 사별한지는 3년가량 되었다고 했다. 3년 동안 혼자 산 노년의 남자 같지 않은 모습 또한 말자씨를 매료시키는 최씨의 매력 중 하나였다. 늘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춤을 추기 위해 밀착하면 은은하게 맡아지는 남성 화장품 향기도 좋았다. 자신이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일까, 싶다가도 최씨가 문득문득 다가올 때는 마치 첫사랑에 빠진 여고생처럼 심장이 곤두박질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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