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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인 Oct 30. 2022

춤바람 말자씨 6

민영과 소영, 그리고 두 딸은 각자 다른 생각으로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자신의 생일 선물에만 관심이 가득한 지희만이 불게 상기된 볼을 하고 선희 옆에 앉아 조잘거렸다. 말자씨의 식구들은 식당에 앉아 다들 어딘가 붕 뜬 듯한 분위기를 모면하려 음식을 서둘러 주문한 후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을 했다. 말자씨는 사실 이 자리가 불편했다. 첫째로, 가족 생일에 나와서 외식하는 것 자체가 어색했고, 둘째로 최씨와 관계가 시작된 후 재영과 지영 보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또 어색했다. 재영은 소영에게 말자씨의 변화에 대해 들었을 때 누구보다 좋아했다. 아버지의 폭력을 눈앞에서 지켜보고 당했었던 재영은 늘 딸과 엄마가 아닌 한 사람의 여자로써의 말자씨를 되찾기를, 정말 가끔은 자신들을 버리고 나가서라도 행복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재영은 남매 중 가장 독립적이고 생각이 곧아 큰 오빠인 민영보다 더 누나 같이 행동할 때가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었지만 엄마가 새로운 즐거움을 '남자'에게 찾는다는 것이 한 가지 걸렸다. 하지만 재영은 응원했다. 민영이 말자씨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것을 소영에게 전해 듣고 자리를 주선한 것 또한 재영이었다. 지영은 그에 비해 속 한 번 썩인 적 없는 곱고 착한 딸로 순종적인 성격으로 형제들에게 이리저리 치여 살았지만 그런대로 자상하고 성실한 남편을 만나 나름 평범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지영은 말자씨가 연애 비슷한 것을 하는 것 같다는 말을 전해 듣고 민영과 비슷한 생각이었지만 차마 내색하지 못한 채 그저 늘 그랬던 것처럼 '잘된 건가?' 라며 빙그레 웃었다. 자신도 엄마이기 때문에 ‘엄마’로써 그런 행동은 지영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재영과 지영이 자신의 손톱에 빨간 매니큐어를 힐긋거리는 것을 눈치채고는 말자씨가 멋쩍게 웃었다.


"그냥... 손이 허전해서..."


지영은 엄마의 주름지고 검버섯 핀 손에 새빨간 매니큐어가 오히려 더 천박해 보인다고 생각했으나 굳이 티 내지 않기 위해 눈길을 돌렸다. 재영은 민망한 듯 손을 숨기는 말자씨에게 예쁘다고 큰 소리로 말했으나 재영을 제외 한 가족들은 서로 눈을 회피하며 무거운 분위기를 풍겼다. 재영이 무거워진 분위기를 눈치챈 듯 몇 번 헛기침 후 말했다.


“지희 생일이라 좋겠네? 얼른 맛있는 거 먹고 케이크에 촛불도 후우 불자?”


지희가 여전히 발간 볼을 하고는 빙긋이 웃었다. 다시 침묵이 감도는 테이블에 종업원이 다가와 하나씩 음식을 가져왔고 테이블 세팅이 끝나자 선희가 미리 사온 케이크를 테이블 가운데에 올려두었다. 지희가 높은 소리로 웃으며 신나서 박수를 쳤다. 지희의 그런 모습에 가족들의 분위기가 잠시 가벼워졌다. 지희의 나이에 맞게 초를 꽂고 선희와 소영이 불을 나눠 초에 붙였다.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지희에게 하나씩 선물을 건네고 아주 잠시 화기애애한 웃음과 대화가 오고 갔다. 말자씨도 이 순간만큼은 맘 편히 웃으며 오래간만에 지희와 소영, 민영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오랜만에 본 재영과 지영도 얼굴이 좋아 보였다. 재영이 결혼을 안 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아주 오래전이지만 아직까지 미혼인 것이 말자씨는 못내 신경 쓰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즐겁기만 하다면, 재영이 행복하면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화의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었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을 간신히 참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희의 생일 선물 증정식이 모두 끝나고 음식도 다 먹어갈 즈음 재영과 소영이 민영에게 눈빛을 보냈다. 민영은 사실 그냥 이렇게 즐겁게 시간을 마무리하길 원하였으나 체념하고 아주 힘들게 말을 꺼냈다.


“엄마…”


“응?”


“만나는 남자 있어?” 최대한 언성을 낮추며 민영이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자신의 입으로 그런 말을 내뱉는 것 자체가 민영은 불편했다.


“무슨 소리니?” 말자씨가 짐짓 못 들은 척하며 말을 돌리려 했으나 목에서부터 달아오른 피부는 그 작은 소리를 말자씨도 들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말자씨가 대답을 회피하자 답답하다는 듯 재영이 다시 물었다.


“엄마, 연애해?”


지영과 민영은 연애라는 말에 재영을 동시에 쳐다보았다. 노년에, 손녀까지 있는 사람이 연애라니… 남자를 만나는 것까진 어떻게든 이해하겠지만 그런 행위를 ‘연애’라는 애정 어린 단어를 붙여가며 쓰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말자씨로부터 아무런 답을 받은 적도 없지만 말자씨의 딸과 아들은 이미 모든 것을 확신한 채 말하고 있었다.


“뭐? 얘가 무슨 소리를…”


“… 그냥 솔직히 말해. 우리 다 눈치채고 있었어. 수영 다닌다고 한 것도 다 거짓말이었잖아.”


막내인 소영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그래. 그냥 솔직히 말해줘. 지금 우리 다 컸는데 그게 흠도 아니고.”


재영이 거들자 민영이 그건 아니라는 듯 쳐다봤다. 재영은 민영의 탐탁지 않은 시선을 느꼈으나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 남자, 괜찮은 사람이면 우리도 소개해줘. 우리 다 보고 싶어. 엄마 남자 친구.” 재영은 시원스럽게 말했으나 지영과 민영은 동시에 재영을 작게 나무랐다.


“언니, 남자 친구라니… 목소리 좀 낮춰. 누가 듣겠어.” 지영이 말했다.


“야, 하고 많은 단어 중에 남자 친구가… 아휴… 넌 정말.” 민영이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왜들 그래? 다들 알고 모인 거잖아.”


재영의 언성이 살짝 높아지자 옆에 앉아있던 소영도 거들며 한마디 했다.


“그래, 재영 언니 말이 맞아.” 소영의 말에 민영이 갑갑하다는 듯 한숨 쉬고, 지영은 앞에 앉은 물 잔의 물을 아주 살짝 홀짝였다. 선희는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것을 느끼고 지희를 데리고 식당에 딸린 작은 놀이터로 향했다. 말자씨만이 묵묵부답으로 자리에 앉아 가만히 손을 모은 채 끓어오르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다독이고 있었다.


“엄마, 정말 누구라도 만나는 거야?” 민영은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 목소리 낮춰. 엄마 잘 못한 거 없잖아.” 재영이 민영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언니. 아닌 건 아닌 거지. 엄마 나이를 생각해봐.” 지영이 민영의 역성을 들며 말했다.


“뭐가 아닌데? 너도 잘된 일이라며? 이제 와서 말 바꾸기야?” 재영이 이번엔 지영 쪽으로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솔직히 오빠는 엄마가 지희 나 몰라라 할까 봐 불안하고 싫은 거잖아. 내 말 틀려? 오빠 새끼를 왜 엄마한테 떠넘기려고 난리야. 엄마도 엄마 인생 찾게 좀 냅둬!” 재영이 다시 민영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뭐? 야. 너 무슨 말을 그딴 식으로…”


“다들 왜 그래. 이러려고 모인 거 아니잖아.” 민영이 말을 마무리하기 전 소영이 울먹이며 끼어들었다.


“그럼 뭐 어쩌려고 모인 건데?” 지영이 차갑게 대꾸했다.


“언니…” 소영이 지영을 바라보며 작게 부르자 지영이 다시 말했다.


“엄마.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 솔직히 엄마 나이를 생각해야지. 어디서 어떻게 만난 남자인지는 몰라도 이 나이에 연애니, 사랑이니…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선으로 그건 아니야. 손주 손녀 커가는 거 보면서 곱게 늙는 게 좋은 거잖아. 정말 이런 일 동네 창피하고 우리도 망신이야.”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인 동네에서… 지영이 끝 문장은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재영은 그런 지영의 차갑고 냉정한 태도에 기가 질린 듯이 말했다.


“너는 항상 그런 식이었어. 앞에서는 다 좋은 척, 뒤에 가서 다른 말 하고. 너 그 버릇 아직도 못 고쳤냐? 야. 나이 들어서 연애하면 안 돼? 뭐? 곱게 늙어? 그게 엄마한테 할 소리니? 엄마가 어떻게 버텨왔는지 옆에서 뻔히 다 지켜본 주제에… 오빠도 그래. 엄마가 아빠한테 얼마나 시달렸는지…”


“아버지한테, 남자한테 그렇게 시달린 사람이 지금 나이에 왜 또 남자를 만나느냐고!” 민영이 재영의 말을 끊고 소리쳤다.


자식들이 침을 튀기며 싸우는 와중에 단 한 번의 대답도 하지 않은 말자씨는 여전히 손을 모으고 손톱의 빨간 매니큐어를 바라보며 한계점에 다다른 사람처럼 숨을 여러 번 몰아 쉬었다. 그리곤 목이 졸린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내가…뭘…”


그 소리는 너무 작아 자식들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지만 말자씨는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내가…뭘… 그렇게 잘못했니…”


소영이 말자씨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옆을 돌아보며 민영과 큰 소리를 내고 있는 재영의 팔을 잡았다. 재영이 소영을 보고, 소영이 말자씨를 눈짓하자 재영 또한 말자씨를 바라보았다. 재영의 시선이 말자씨에게 돌아가자 재영과 언쟁중이던 민영도 말자씨를 돌아보며 눈앞에 물 잔만 바라보던 지영을 제외한 모든 식구가 말자씨를 바라보게 되었다.


“엄마…” 재영이 떨리는 말자씨의 몸을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니?”


순간 말자씨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뭐가 문제니?”


가장 큰 소리로 언쟁을 벌이던 재영과 민영이 놀라 아무 말도 못 한 채 잠시간 얼어붙었다. 말자씨는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공장 여공일 때 생기 넘치던 자신의 모습, 죽은 남편과 처음 만난 자리, 결혼해서 겪었던 끔찍하고 징그러운 시집살이와 남편의 폭력, 맞고 있는 자신을 미닫이문 너머로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어린 민영과 재영의 눈빛,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손가락질받을까 싶어 악착같이 엄마로서만 살아온 나날들. 민영이 말자씨의 상념을 깨는 한 마디를 던졌다.


“진짜 남자라도 만나? 그래서 그렇게 이상한 꼴로 다니는 거야? 엄마 거울은 보고 살아?”


재영이 민영을 보고 한 마디 하려는 찰나 소영이 말했다.


“엄마, 그냥 솔직히 말해줘. 그리고 좋은 사람이면 우리도 소개해주고.”


소영의 말에 이번엔 민영이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래.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 엄마가 평생 꾸미기나 한 사람이야? 이제와 빨간 립스틱이니, 향수니, 매니큐어니…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고 떳떳하게 다녀.”


재영이 떨리는 말자씨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말자씨는 최씨에 대해 숨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자식들이 원하면 소개라도 시켜줄 자신도 있었다. 말자씨는 떨리는 숨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K씨를 따라 콜라텍에 간 일, 그곳에서 최씨를 만난 일, 최씨와 교제라는 것을 시작하게 된 일, 그리고 최씨가 얼마나 교양 있고 품위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 한참을 설명했다. 중간중간 민영과 지영의 싸늘한 눈초리를 받아내며, 소영과 재영의 맞장구에 힘입어 말자씨는 끝까지 말을 이었다. 아내와 사별했고, 자식들은 해외에 있어 외로운 사람이라 자꾸 마음이 간다. 그래서 더 챙겨주고 싶다는 말까지 마치자 자식들은 저마다 말이 없었다. 한 동안의 침묵이 이어지고 지영이 물었다.


“그래서 혹시, 재혼이라도 할 생각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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