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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인 Oct 30. 2022

춤바람 말자씨 11

재영과 마주한 최씨가 초조한 듯 눈치를 보며 앞에 놓인 차를 홀짝였다. 재영은 말자씨가 말한 것보다 작은 체구에 볼 것 없는 노인이라고 생각했으나 가만히 최씨의 말을 기다렸다. 근처에 앉아있던 소영도 손톱을 입에 가져다 대며 재영과 최씨의 동향을 살폈다.


“저…” 최씨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네, 그날 대체 무슨 일로 저희 어머니를 만나자고 하신 건가요?” 재영이 자신도 모르게 날 서게 물었다.


“제가 사실은… 유부남입니다.”


“예?”


“말자씨에게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


“몇 년 만에 그런 일로 연락하는 것도 죄스럽고…”


“무슨 일로 연락을…” 재영이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이혼… 소송 중이었습니다.”


“…”


“참 부끄러운 말이지만, 바람… 최근에 여러 불륜 사실을 아내에게 들켜서… 이혼 소송을 준비하던 아내가 몰래 제 핸드폰을 다 뒤져서 저도 모르게 지우지 못했던… 몇 년 전에 말자씨가 보낸 문자를 본 겁니다.”


“…”


“저를 마음 깊이 사랑하고 저와 만날 날만을 기다린다고… 이런 감정을 알게 해 줘서 고맙다고… 그 문자를 보고 아내가 증거로 제출하겠다고 우겨서… 실은 정말 면목없지만 말자씨에게 해명해달라고 부탁하려고… 정말 미안합니다…”


“뭘 해명한다는… 말씀인가요…” 재영이 물었다.


“저는 거부했는데 말자씨가 저를 쫓아다닌 거라고… 말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 재영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분노와 슬픔, 말자씨에 대한 연민의 감정에 북받치는 눈물을 흘렸다.


“말자씨가 차마 그것만큼은 못하겠다고 하더군요. 저와 만났던 시간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고요. 그런데 제가 계속 사정했습니다. 말자씨가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저는 알거지가 되어 쫓겨날 거라고요. 이 나이에 제가 뭘 할 수 있겠냐고… 말자씨가 한 동안 고민하는 듯하다가 그래도 안 되겠다고 하더군요.”


“…”


“자신에게 저와 만났던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 저는 전혀 이해를 못 한다고 하며 화를 냈습니다. 그러다 제가… 말자씨에게 무릎을 꿇고 부탁했습니다. 그러고도 한 동안 실랑이 끝에 말자씨가 결국은 제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 뒤 제 아내를 만났고…”


“만났고…?”


“격분한 아내가 말자씨의 뺨을…”


“뺨을?”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던 재영이 크게 흔들린 목소리로 말했다.


“때렸습니다…”


“…”


“거짓말한다며… 둘이 짜고 말을 맞춘 거라고 제 말은 믿지 않았고… 말자씨는 그대로 밖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제가 말자씨를 잡으려고 일어났는데 아내가 막더군요…”


“…”


“여기까지입니다. 정말 면목이 없어 말자씨에게 사과의 문자를 보냈는데 답이 없어, 아마도 저와는 상종도 하기 싫은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말자씨가 그렇게 사고를 당했을 줄은…” 차분하게 말을 하던 머리가 하얀 노인이 고개를 숙여 눈물을 훔쳤다. 그 모습도 재영은 혐오스러워 고개를 돌렸다.


“왜 저희 엄마를…” 재영이 말을 꺼냈다.


“왜 저희 엄마여야 했나요? 여러 번이라고 하시면… 꼭 저희 엄마가 아니어도 됐잖아요.” 재영이 눈물을 흘리며 원망에 차 말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연락은 했었습니다만… 만남을 허락한 것은 말자씨 뿐이었습니다. 정말…” ‘착한 분이시죠.’라는 말을 목으로 삼키며 최씨가 말을 잇지 못했다. 재영은 최씨의 마지막 말에 어깨가 크게 흔들릴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재영에 모습에 놀란 소영이 참지 못하고 다가가 재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재영은 소영이 다가온 것을 확인하자 소영의 품에 안겨 오열했다. 최씨는 안절부절못하며 두 자매가 우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힐긋거리며 쳐다봤지만 당장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한동안 눈물을 쏟아내던 재영은 최씨가 원망스러웠지만 최씨에게 죄목을 물을 수도 최씨 부인을 만나 똑같이 뺨을 후려갈길 수도 없음에 자신이 들은 사실을 어떻게 다른 가족들에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어쩌면 말하지 않는 편이 남은 가족들에게 더 좋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재영은 감정을 추스르고 최씨에겐 인사도 없이 소영과 카페를 나갔다. 소영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여러 번 물었지만 재영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하지 않았다. 다만 말자씨의 집으로 돌아가 말자씨가 사용했던 액정이 깨진 낡은 핸드폰을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말자씨가 나눴던 문자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재영은 한 글자 한 글자 바라보며 말자씨가 최씨에게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사랑에 빠진 여자가 얼마나 솔직할 수 있는지 느끼며 언제나 우직하고 늘 아픈 몸을 이끌고 소처럼 일하던 자신의 엄마 또한 정말로 한 사람의 여자였다는 것을 다시 한번 체감하게 되었다. 재영이 말자씨의 핸드폰을 가슴에 안고 큰 소리로 울자 소영은 답답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말했다.


“언니, 왜 그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러나 재영은 말하지 않았다. 말자씨의 절절한 사랑에 아픈 결말을 가족들이 알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재영은 판단했다. 그리곤 가끔 말자씨의 병문안을 가 말자씨의 손톱을 잘라주고 머리를 빗겨주며 조용히 눈물을 훔칠 뿐이었다. 말자씨의 손톱을 잘라주다 보면 가끔 말자씨의 새끼손톱에만 빨간 매니큐어가 발라져 있어 간병인에게 물어보았다.


“이건 누가 발라주는 거예요?”


“아, 손녀 따님이요. 할머니가 좋아하는 색이라면서 병문안 오면 꼭 한 번씩 바르고 가요.”


간병인이 지희의 모습을 떠올렸는지 푸근한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할머니가 자기가 발라주면 굉장히 좋아했다고 하면서요. 참 귀엽죠?”


“…네.”


재영이 말자씨의 붓고 주름진 손을 잡고는 대답했다.


“… 예쁘네요.” 재영이 눈을 감고 누워있는 말자씨의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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