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들은 A급이지만 자식들은 C급이라는 희비
어릴 적부터, 외할아버지는 나를 “A급 손녀”라 부르셨다.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그 말 속엔 사랑과 기대가 섞여 있다는 걸 어린 마음에도 알 수 있었다.
그 말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어딘가는 조금은 무거웠던 것 같다.
외할아버지는 숱 많은 백발을 곱게 빗질하여 넘기셨다.
아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꼿꼿한 체형, 키는 줄지 않으셨다.
매일 새벽 4시 기상하여 만보를 걸으시고, 정말로 하루도 빠짐없이 헬스장을 가신다.
일주일의 시간표는 여러 활동들로 정기적 루틴을 짜놓으셨다.
요가와 운동, 친구분들과의 탁구, 할머니 케어, 양로원에서의 고스톱 일정 등등...
맨 손으로 꽤 여유있는 자산과 일가를 일구셨고, 작은 봉사 단체도 운영하셨었다.
그 연세에 그렇게 관리를 하는 것이 정말 대단하고 보통의 정신력은 아니다. 그래서 난 그런 할아버지가 자랑스럽다.
외조부모님과 애착이 깊다. 네 살 정도까지 외가에서 길러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손녀를 바라보는 외조부모님의 눈 빛에는 애정이 많이 담기셨다. 지금도 통화할 때마다 사랑하다 표현하시고, 목소리만 들어도 힘이 난다고 하신다.
어릴 때는 남동생보다 나를 좀 티나게 편애하셨다. 하루는 할아버지가 나에게만 용돈을 주셨던 적이 있다. 그래서, 아빠가 동생이 서운해 한다고 말씀을 드렸던 기억이 있다.
할아버지는 자주 이렇게 이야기 하신다. "너희 손주들은 A급이야"
하지만, 그 말의 앞과 뒤에 꼭 따라붙는 말이 있다. "그런데 자식들은 말이야. 아주 C급, F급이야"
숨 쉬 듯 내뱉는 말 속엔 매번 깊은 한숨도 따라 붙는다.
가족 중엔 언제부터인가 할아버지 기준에 못 미치는 자식들이 많았다. 큰 삼촌은 이혼했고, 이모는 연락 조차 어렵고, 작은 삼촌은 피터팬처럼 철이 없다. K장녀인 엄마는 그나마 ‘안정된 삶을 사는 딸’이지만 감정 표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늘 아쉽다고 하신다.
큰 삼촌은 좋은 머리로 전교 1등을 하고, 훤칠한 키에 배우처럼 잘생겨서 여자들이 따라다녔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사업체를 운영하다 욕심에 눈이 멀어 잘못된 투자로 크게 실패했다. 그로 인해 상상하기 어려운 큰 빚을 할아버지에게 넘겼다. 그는 그 후 긴 세월을 술과 함께 폐인처럼 시간을 보냈다.
할아버지가 안타까워 보이는 순간이 많았다. 고생해서 사랑으로 자식들을 키웠더니, 결과물이 실망스러운 그 마음이 애달퍼보였다.
점점 나이가 들다보니 언제부터는 자식들도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가정의 평화가 최고이고, 전통적인 기준에 맞춰야만 행복하다고 굳게 생각하신다. 그래서 자식들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으신다. 반면에, 할아버지가 말하시는 "개성이 너무 강해서" 그 기준에 맞춰살지 못하는 자식들이다.
아흔이 다 되어가는 할아버지는 아직도 당신의 손으로 직접 자식들의 행복을 바로잡기를 원하신다.
오죽하면, 18년 전쯤 치를 떨며 이혼 한 큰 삼촌과 외숙모를 재결합시키는 것이 오랜 염원이다.
사촌동생은 큰삼촌을 닮았는지 훤칠한 미남에 서울대생으로 자랐다. 할아버지는 오랜 기간 보지 못한 그를 애써 찾아가 재결합에 힘써달라고 이야기를 하셨단다.
오늘도 자식들의 행복을 보시기 위해 더욱이 건강 관리를 하신다.
나는 아직 자식도 없고, 누군가의 할머니가 되어본 적도 없지만, 만약 손녀가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넌 있는 그대로 괜찮다고. 사랑받기 위해 A급이 될 필요 없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기준도 너의 존재 가치를 매기지 못한단다.
한때는 그 A급이라는 말이 좋았다. 하지만 사랑은 등급이 아니라, 조건 없는 눈빛이라는 걸 안다.
당신도 하염없이 조건없는 사랑으로 손주를 바라보지만, 단지 그렇게 표현을 하셨을 뿐일 것이다.
어찌 되었건, 아직은 당당한 A급 손녀이다. 그런데 결혼을 못해서 조만간 C급으로 강등되진 않을까 걱정도 된다.
그래도 고운 백발에 가끔 골프도 치시는, 365일 헬스장을 가시는 외할아버지는 내가 아는 할아버지들 중에서 제일 멋지다.
A급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그 눈빛이 이미 충분히 말해주었음을 이제야 알 것도 같다. 이 기회를 빌려 평소 잘 못하는 말을 해본다.
아직도 어리고 귀여운 새끼 강아지로 봐주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합니다. 한없이 따뜻한 사랑의 눈빛 덕분에 이렇게 자랐습니다. 오래도록 그 눈빛으로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할아버지 눈 속에서 언제까지나 작은 강아지라면, 그건 아마 평생 지켜주고 싶은 사랑의 방식일 것이다.
어떤 감정을 느끼셨나요? 댓글로 함께 나눠주세요. 매주 시리즈 연재 중으로 구독 부탁 드립니다.
<나를 알고, 말이 많아졌다> 시리즈는 상담실에서 마주한 감정의 조각들을 꺼내어 쓰는 기록입니다.
연애, 자아, 가족, 군대—삶의 여러 장면 속 감정 언어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가족에세이#외할아버지#딸과손녀#조건없는사랑#존재의가치#기억과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