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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경 Oct 22. 2023

길들이기

  봉사활동을 하다 잠시 쉬는 시간이었다. 이 선생과 김 선생이 강아지 자랑에 열을 올렸다. 자기네 강아지는 대소변을 잘 가린다는 자랑을 하면서 어깨까지 으쓱했다. 얼굴까지 발그레 해진 김 선생은 개밥 챙겨줘야 해서 맘대로 외출하기도 어려워 개가 상전이라고도 하면서도 그냥 싱글거렸다. 이 선생이 말했다.


  “개살이하는 거지요.”


  무슨 소린가 했으나 이내 그 말을 알아듣고는 헛웃음이 나왔다. ‘시집살이’, ‘며느리 살이’ 소린 들어봤어도 ‘개살이’라니. 김 선생은 살림하는 여자라 그렇다 쳐도 이 선생은 도무지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는 남자다. 그러나 의외로 주변엔 그런 사람이 많다. 애완동물 반려인이 천만이 넘는다고 하던가.


  애완동물은 길러봐야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안다고 한다. 사람보다 낫다고도 한다. 나는 경험은 없지만 생명 있는 것들과 교감을 하는 것이니 애틋하고 살가운 정이 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어쩌면 이해타산 따지는 사람보다 나을 수도 있으려나. 아무리 그런다고 개살이라니. 뭣 때문에 개살이해야 하느냐고 묻자 이 선생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잖아요. 그러니 사람이 돌봐줘야지요.”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말씨까지 나긋나긋했다. 평소 무뚝뚝하던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던 김 선생도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그 아이들이 뭘 하겠어요. 똥오줌 가려 주는 것만도 기특하지요. 어떻게 화장실에서 변을 볼 줄을 아는지….”


  그러면서 또 개 자랑을 늘어놨다. 가끔 혼날 짓을 하고는 꾸중 들을까 봐 눈치를 보지만 야단을 치면 눈도 마주치지 않고 샐쭉해지고 화풀이도 한단다. 잘 가리던 대변을 화장실 매트에 보란 듯이 싸놓고 시위하거나 슬그머니 물건을 떨어뜨리려 망가뜨리기도 하는데 사람보다 영악스럽다. 그런데 그게 귀엽기만 하단다. 자식 자랑 손자 자랑은 돈을 내고 해야 한다는데 애완견 자랑은 돈을 안 내도 되는지 두 사람 맞장구가 십년지기라도 된 듯했다. 나하고 이 선생은 십 년 넘게 같이 근무한 사람이지만 김 선생과는 봉사활동 서너 번 같이 했는데 그렇게 친해지다니. 난 외계인이 된 것 같았다.


  요즘은 애완동물들의 종류도 참 다양하다. 토끼, 패럿, 햄스터는 물론이고 사막여우나 기니피그 같은 희귀한 동물, 뱀 거북 이구아나 같은 파충류…. 그렇지만 사람들이 가장 즐겨 기르는 애완동물들은 단연 개나 고양이일 것이다. 그들 중엔 사람의 손에 의해 종의 변이를 거듭하면서 거처를 방 안으로 옮긴 지가 제법 오래인 종도 많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가 되어 ‘엄마 아빠’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일까. 


  야생에서 갯과의 동물들은 맹수다. 고양잇과의 동물들은 그보다 한 수 높은 포식자들이다. 결코 너그럽지도 안온하지도 않은 자연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가는 동물들. 눈빛 하나로 먹이를 옴짝달싹 못 하게 하고 포효 한 번으로 온 산이 떨게 하는 포식자들. 그들은 자기들의 영역 안에서는 지배자이고 절대자이다. 그런 동물들이 어쩌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가 되어 버린 것일까. 잘리고 붙여지는 유전자의 변이는 그들에게서 야생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린 것일까.


  버려진 애완동물, 이른바 길냥이나 길멍이들을 보면 그들에게는 이미 야생의 본능이 남아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야생의 방법으로 굶주림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사냥하는 방법을 알지도 못하고 스스로 포식자라는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이와 발톱을 뽑히듯 야생의 기억마저 뽑히고 허울만 남은 포식자들은 가련하다. 그들은 사람에게 버림받으면 쓰레기를 뒤지는 시궁쥐의 신세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수많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들은 이름도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로 바뀌어 당당히 사람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람들은 불면 날아가고 쥐면 터질 갓난아기 다루듯 하며 스스로 그들의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된다. 듣기 따라 좀 거북한 ‘개 아빠, 개 엄마’들이지만 그들은 그런 호칭도 개자식들도 너무나 자랑스러워한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조차도. 그런데 정말 개와 고양이가 아무것도 할 줄을 모르는 것일까.


  사람의 시중에 익숙해진 그들에겐 잃어버린 유전의 정보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잃어버린 것을 애써 찾으려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밀림의 정보 대신 새로운 정보를 새겨 넣고, 날카로운 이와 발톱으로 다스리던 기억을 정과 소통으로 영악하게 포장해 사람들을 길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른바 ‘개살이’하는 사람들. 그들은 개가 자신의 애완동물이라 여기지만 정말 그럴까. 이미 그들은 애완동물들에게 반려라는 이름으로 관을 씌우고 스스로 시종이 되는 굴레를 쓰고 있다. 다만 그걸 버거워하기보다는 즐거워하고 있을 뿐. 고양이들은 개와는 달리 사람을 주인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을 지존으로 여긴다고 한다. 그래서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은 주인이 아니라 집사임을 자처한다고 한다. 


  이미 사람을 집사로 거둔 고양이. 개도 언제인가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를 길들이는데 고삐나 채찍질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할 필요가 없는 동물들. 그들을 위해 사람들은 오늘도 열심히 음식을 해 바치고 침수를 살피며 똥과 털을 치우는 일에 길들여지는 것은 아닌지. 두 사람이 눈을 반짝이며 강아지 자랑을 하는 옆에서 고개를 갸우뚱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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