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밥상을 차려놓고 바라본다. 젓가락질 두어 번 할 나물, 한 개씩만 담은 전과 적 몇 가지, 굴비 반쪽과 숙회 몇 점, 송편 3개, 그리고 국 한 그릇이 전부다. 갈비찜이나 불고기, 잡채 같은 푸짐한 명절 음식도 빠진 데다 워낙 조금씩 담아 소꿉 같다. 그것이 두 벌 차려있다.
식탁에서 좀 멀찌감치서 남편이 먹는 것을 보았다. 깨작거리다 절반이나 남겼다. 아까운 것을 다 버려야 하지만 입맛이 돌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애들이라도 북적거리면 운 밟아서 좀 더 먹으련만…. 남편이 먹고 난 후 혼자 앉아 먹는 밥이 맛날 리가 없다. 나 역시 깨작거리다 수저를 놓았다.
남편이 추석을 코앞에 두고 코로나 확진을 받았다.
‘하필 명절 때….
그러나 그것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인가. 아이들이 비상이었다. 많이 아프시지 않으냐, 엄마라도 안 걸리게 방 따로 화장실 따로…. 이미 코로나에 대한 지식은 넘쳐난다. 그런다고 한집에 살면서 무사할 리가…. 더구나 관상동맥에 스텐트까지 삽입하고 있으니 고위험군이다. 이미 감염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걸릴 것이면 차라리 남편과 같이 아프고 얼른 넘어가기를 바랐다. 밖에만 안 나간다면 집안에서야 유난 떨며 격리하는 것보다 평소처럼 생활하는 것이 아픈 사람 힘들지 않게 할 것 같았다.
남편은 기침하면 피가 나올 정도로 힘들어했다. 나도 저러리라 생각하니 겁이 났지만, 오늘일까, 내일일까 조마조마하는데 사흘이 지나도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걸릴 거면 빨리 걸리지.’
연휴 휴진 전날에 검사받았더니 음성이었다.
‘안 걸리고 넘어갈 수도 있는 거 아냐?’
슬그머니 욕심이 생겼다. 그때부터였다. 밥을 따로 차렸다. 남편이 거실에 나오면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고 내가 거실에 나가면 그가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종일 마스크를 꼭꼭 쓰고 마주 보지도 않았다. 데면데면한 그런 묘한 느낌이라니.
추석 전날이었다. 벨 소리에 문을 열고 나갔지만, 문밖에는 상자와 봉지들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둘째네가 왔다가 도망치듯 가버린 것이다. 멀찌감치서 얼굴이라도 봤으면 좋으련만 애들이 아직 핏덩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좀 늦게 오는 큰 손주에게는 얼굴이라도 보자고 했다. 중학생이 된 녀석은 좀 떨어져서 인사도 하고 웃는 얼굴도 보여주었다. 그런데 추석 용돈을 주려고 하니 며느리가 통장으로 입금해 달라고 했다. 며칠 전 농협에서 받아온 빳빳한 신권인데…. 등 한 번 두들겨 주지 못하고 보냈다. 차라리 둘째네 꼬맹이들처럼 그냥 보낼 걸 그랬나. 영화 벤허에서 보았던 나환자촌의 한자라도 된 것 같았다.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아는데 왠지 억울했다.
핑곗김에 아무것도 안 한다고 했다. 애들 좋아하는 찜이나 잡채는 좀 지나서 해 먹기로 했다. 그래도 나물 서너 가지를 만들어 놓았지만, 아이들은 그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대신 며느리들이 음식을 해왔다. 제법 여러 가지였다. 몫을 나누어 따로 했겠지 생각하며 난 어느새 떠들썩하던 유년의 대청마루로 가 있었다.
유년의 명절을 늘 복작였다. 아버지는 여섯 남매의 맏이였다. 할머니를 모시고 살던 터라 작은아버지들과 사촌들이 모두 모였다. 대청마루에 둘러앉아 송편을 만들었다. 조개처럼 예쁘게 만드는 할머니 흉내를 내다 주물럭거려 기차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들었다. 기적소리 대신 웃음소리가 뒹굴었다.
어머니와 작은어머니들이 둘러앉은 곳에서는 기름 냄새가 진동했고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음식이 채반에 쌓였다. 육전, 생선 전, 산적, 누름적…. 번철 위에서는 시답지도 않은 일상 이야기들이 함께 튀기고 볶아졌다. 두 손, 두 발로는 다 셀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떠들썩한 하루. 유년의 명절은 그런 날이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것이 모두 웃음뿐이었는지는 잘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맏동서 집에 와서 명절 음식 장만하던 숙모님들이 그리 편하기만 했으랴만, 내 기억 속 그 왁자함 속에 피어나는 것은 웃음과 행복뿐이다. 그래선지 한 갑자가 훨씬 지난 지금에도 명절이면 서너 개의 채반이 가득하도록 음식을 만드는 것이 습관이다. 그런 시어미 때문에 두 며느리가 고생이다. 그래도 그렇게 만든 음식을 싸 보내는 것이 명절 마무리인 걸 어쩌랴. 그것이 십 년이 넘다 보니 아이들도 어느새 나를 닮아버린 모양이다. 여느 해처럼 전과 적을 골고루 했다. 그러나 왁자하고 떠들썩한 사람들, 기름에 튀긴 듯 통통 튀는 웃음소리, 주고받는 살갑고 끈끈한 눈길이 빠진 음식은 차가워 보였다.
‘따로 밥상’을 물린 추석 아침, 아홉 식구가 제법 떠들썩할 시간인데 남편은 방에 들어가고 나만 거실에 오도카니 앉아있다. 코로나가 번진 지 몇 년 동안 주변에서 제법 익숙해진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닥치니 낯설다. 명절 따로 쇠고, 밥상 따로 받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일 건 없다. 혹시나 나는 안 걸리고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계산으로 따로 밥상을 차리는 내가 우습다.
조선 시대를 사셨던 우리 할머니는 아침마다 어른들 밥상을 열두 닢이나 차렸다고 했다. 양반은 겸상하지 않는다며 일일이 따로 밥상을 차리는데, 부엌에 줄줄이 걸린 소반 개수가 양반가의 위세라고도 했다. 따로 밥상이 본래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젊은 날 즐겨 읽던 무협지에서 좋아하던 단어가 있다. 반박귀진返璞歸眞. 무공의 고수가 너무 경지가 높아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는 경지라고 하는데, 원래는 도가의 용어다. 뒤돌아 다시 한번 처음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으로 진실한 모습,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의미다.
반백 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살아온 부부가 따로 밥을 먹고, 따로 잠을 자는 것이지만, 어쩌면 그것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나 아닐까. 서로의 거리를 당연시하고, 나만 걸리지 않겠다고 따로 차리는 밥상, 그런 것이 어쩌면 우리 본래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나 아닐까. 코로나란 역병이 오히려 민낯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애초에 혼자였던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