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보도 보조개로 보인다는 말이 있다. 그럴 때 흔히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한다. 눈을 가려놓았으니 안 보여야 하는 데 좋아만 보인다는 게 문제다. 그런다고 아무리 곰보가 보조개로 보일까. 그건 어리석음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그런데 요즘 내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
둘째 아들이 결혼한 지 10년도 더 지나 아들딸 쌍둥이를 낳았다. 공들인 시험관 아기다. 쌍둥이라 좀 이를 줄은 알았지만 34주도 다 못 채운 팔삭둥이, 2kg 남짓한 미숙아들이었다. 만지면 부서질 것 같아 안기도 겁이 났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어린것들은 토끼 모양의 베갯속에 묻혀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생기다 만 것 같은 작은 것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저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아이고, 이뻐라.”
남편이 민망한 듯 대체 어디가 예쁘냐고 했다. 갓난아기가 저 정도면 예쁜 거라고 했더니 며느리 눈이 반짝이고 입술이 살며시 호를 그렸다. 아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흔도 중반을 넘겨 아비가 되었으니 오죽하랴. 그래도 남편은 그 조그맣고 쭈글쭈글한 아기 얼굴에서 아무래도 예쁜 점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든 말든 난 여전히 “예쁘다”며 벙글거렸다.
두어 달을 앞당긴 바람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내 일정은 헝클어진 실타래 같았다. 더구나 손녀에게 문제가 생겨 며느리는 산후조리원에도 못 들어갔다. 미룰 수 있는 일은 미루고 모임은 빠지고, 그래도 여기저기 해야 할 일들이 뒤죽박죽 되었다. 그러나 아기 얼굴 앞에서 헝클어진 일정 따위가 대수일까.
쌍둥이를 기른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한 녀석 우유를 먹이고 미처 눕히기도 전에 또 한 녀석이 보챘다. 때로는 정신을 쏘옥 빼놓을 만치 쌍나팔로 울어대고, 두 녀석이 동시에 기저귀가 질퍽하게 일을 벌여놓기도 했다. 밤중에도 번갈아 가며 두어 번씩 배고프다고 보채는 바람에 어미는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눈이 퀭한 모습이 짠했다. 낮이면 그런 어미를 재우느라 애들 둘이 다 내 몫이 되었다.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기들은 사전에 나온 단어나 일상의 개념을 제멋대로 바꾸어버렸다. 우는 것은 예쁘다고, 똥은 건강이라고 나온 사전이 있을까. 우는 모습에 힘이 나고 변이 황금색인 것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다니. 난 분명 지쳐있는데 나를 본 사람들은 활기가 넘친다고 했다. 새로운 뜻을 위키사전에라도 올려야 할 일이었다.
어미가 몸을 추스르고 아기들도 밤잠을 자기 시작하면서 아들 집에 가는 날이 줄어들었다. 내 할 일도 산더미인데 아기들 얼굴만 눈에 선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할 때라 목이 어제보다 얼마큼 더 꼿꼿해졌는지, 옹알이는 얼마나 하는지 배꼽탈장으로 튀어나왔던 배꼽은 얼마나 들어갔는지, 변 색깔은…. 궁금한 것 투성이었다.
며느리가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주었다. “이쁘다 이쁘다”며 감탄사를 연발하면 남편은 부르지 않아도 옆으로 왔다. 핸드폰 속으로 들어가 버릴 것 같은 나를 보며 핀잔하듯 어디 가서 애 예쁘다는 말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먼저 핸드폰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는 요즘 웃음이 아주 헤퍼졌다.
그의 말이 아니라도 우리 아기들이 어디 가서 자랑할 만큼 예쁘지 않은 것은 나도 안다. 조금만 거리를 두고 보면 통통한 살집은 의사의 지적대로 비만의 위험이 있고 이목구비가 제법 뚜렷하기는 하지만 누구나 있을 자리에 있는 것들이다. 그러면 어떤가. 그저 적당히, 보기 싫은 정도가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가슴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말하는 것을. 아기들은 미적 기준도 제 맘대로 바꿔버린다.
웃는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찡그리고 우는 모습마저도 “나 예쁘지요? 예쁘지요?”하며 자신이 미의 기준이라고 우기는 것 같다. 그 강요에 넘어가지 않을 어미나 할미가 어디 있으랴. 작은 눈도 커 보이고, 낮은 코도 오뚝해 보이고, 비뚠 것도 모난 것도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보이게 하는 아기들. 그 앞에서는 아기 외에 보이는 것이 없다. 눈이 멀어서도 행복한 바보들. 그것은 콩깍지 안경을 써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행복이다.
드마코가 쓴 <부의 추월차선>에 천국과 지옥을 비교하는 설화가 있다.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에서 서로가 긴 숟가락을 가지고 밥을 먹는데 천국에서는 서로 상대방에게 먹여주고 지옥에서는 자기만 먹으려고 한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모두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데 지옥에서는 모두 굶주린다는 이야기다.
자기 입에 넣을 수 없는 긴 숟가락으로 상대방을 떠먹여 주는 천국에서는 서로가 얼마나 아름답게 보일까. 제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라도 빼내 주고 싶은 어미나 할미의 마음이 그런 마음일 것이다. 천국 사람들은 모두 콩깍지로 만든 안경을 쓰고 있지나 않을는지.
콩깍지 안경을 쓰고 벙글거리는 나를 보고 남들이 흉본다고 남편이 자꾸 옆구리를 찔러도 그 안경을 벗을 생각은 없다. 울음을 웃음으로 바꾸고, 악취 나는 오물을 향내 나게 하고, 지치고 힘든 마음에 힘을 주는 요술 안경. 조금 어리석어 보인다 해도 그 행복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그 안경을 쓰고 모든 사람을 보고 싶다. 내가 미워하던 사람도 나를 미워하던 사람도 그 얼굴에 보조개만 보고 싶다. 장시하 시인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가도 가도 세상은 눈부시도록
아름답기만 하더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콩깍지 안경 하나씩 씌워줄 수는 없을까. 눈에 콩깍지가 씌는 것은 페닐에틸아민과 엔도르핀이라는 호르몬 때문이라고 한다. 사랑에 눈멀게 하는 마법의 호르몬. 그런 호르몬을 분비하게 하는 약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모두가 콩깍지 안경을 쓴다면 혹시나 신문의 사회면에 실리던 무자비한 살인사건이나 비참한 자살사건 대신 사랑에 눈먼 이야기가 실리게 되지나 않을까.
아기의 동그란 눈에 눈을 맞춘다. 내 아기의 눈에 비칠 세상은 콩깍지 안경에 비친 세상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