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상회
남천에서는 가게가 없습니다. 가끔 보따리장수나 등짐장수가 들러 갈 뿐입니다. 보따리장수라고 불리는 보상이나 등에 물건을 지고 오는 부상이 들러도 어린 우리가 원하는 물건은 거의 없습니다. 보상은 주로 여자들인데, 옷가지나 천 조각이나 바느질 할 때 필요한 물건을 가져올 뿐입니다. 부상은 주로 남자들인데 지게에 지고 온 물건은 상이나 채나 치나, 어떤 때는 호매고기나 새우젓을 지고 오기도 합니다. 한창 단 것이 먹고 싶은 우리들에게는 오나마나한 물건들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물건은 버스가 서는 장정에 가게에나 가야 있습니다.
장정에는 가게가 두 개나 있습니다. 아랫녘인 덕촌이나 멀골이나 미노에서 학교에 오는 아이들이 들르는 신신상회는 학교 밑에 있습니다. 신신상회 옆에는 이발소도 신신이발이라고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 하늘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멋들어지게 썼습니다. 또 하나는 버스가 서는 곳에 이발소하고 붙은 건물에는 웃녘에서 내려오는 신구나 남천이나 사동에서 오는 아이들이 들르는 장정상회입니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우리는 장정상회에 들어갑니다. 아마도 이 가게는 전쟁이 끝나고 10년은 지나서, 장정에 버스가 들어오면서 생겼나봅니다. 산너머 풍기장을 보다가 버스를 타고 대처인 단양으로 장을 보러 다니면서 사람들이 정류장에 모이니까 정류장 바로 옆에 가게를 열고 장정상회라고 붙였을 것입니다. 페인트가 삶은 계란 껍데기처럼 벗어지는 신신상회 간판과는 달리, 장정상회라고 유리에 쓴 빨간 글씨에 아직도 반짝반짝 윤이 납니다.
가게에 가면 좋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도, 내가 가게 여닫이문을 드르륵하고 열면, 방에 있던 주인이
“뭘 줄까?”
하고 방문을 열고 나옵니다. 이럴 때 어른들이 어린 우리에게 친절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른들이 우리 어린아이들을 보면 친절한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동네 어른을 장정에서 어쩌다 만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면,
“오냐”
하고 말뿐 더 이상 이렇다 저렇다 말을 더 듣거나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어머니는,
“저그저께 장정에서 종하네 아버지를 만났다면서? 그 때 인사를 잘하더라고 그러더라.”
그럽니다. 인사를 잘 했으면 만났을 때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여기서 만나니 더 반갑다.”고 말이나 해 주지, 무심한 듯
“오냐.”
한마디하고 돌아서서는, 며칠이 지난 다음에야 어른들끼리만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런데 가게 아저씨는 내가 가게에 들어서기만 하면 나보다 먼저,
“뭘 줄까?”
하고 말을 걸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내가 물건을 다 고를 때까지 기다려 줍니다.. 쫀드기를 먹을까, 1원에 2개하는 눈깔사탕을 살까, 또뽑기를 할까 망설일 때도 아무 말 없이 지켜봐 줍니다. 담배잎을 꿜 때 잠시라도 손을 놓으면 불호령이 떨어지는 때와는 사뭇 다릅니다. 동전 몇 개를 쥐고 가게를 들어설 때, 그제야 나는 하나의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오늘은 호롱에 넣을 기름을 사러 왔습니다.
“기름 한 되 주세요.”
하고 병을 들어 보였습니다. 석유를 사러 갈 때는 대병을 들고 가야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석유기름을 사러 가면 가게 옆 창고로 들어갔습니다. 큰 다라에 기름을 받아 두었다가, 나무되박으로 퍼서 깔데기를 올려 기름병에 따라 주었습니다. 그럴 때는 기름을 잘 담아 주는지 보려고 창고 안으로 따라 들어갑니다. 뭐 감시하러 가는 것보다는 처음 보는 창고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방앗간에서 들깨기름을 짤 때는, 기름을 다 짜고 나면 아직도 따끈따끈한 깨묵이나 얻어먹을 수 있나 해서, 살금살금 표시나지 않게 들어 가 기웃거리기도 합니다. 어린 우리가 들어가면 기름병 쏟을지 모른다고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불이 날지도 모르고, 기름 다라에 뭘 빠트릴지도 모르고, 쏟을 지도 모르는 훨씬 위험한 곳인데도, 가게 주인은 나가란 소리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석유를 댓병에 다 붓고 나갈 때도,
“어서 가자.”
하고 친절하게 말합니다. 가게에 가면 우선 어른이면서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요즘은 기름도 함지에 담아 놓고 팔지 않습니다. 언제부턴가 기름통이 드럼통으로 바뀌었습니다. 석유를 살래도 이젠 창고로 들어가지 않아도 됩니다. 드럼통은 가게 옆에 서 있습니다. 가게 주인아저씨는 드럼통 꼭대기 한쪽에 있는 동그란 뚜껑을 톡톡 두드려 열더니, 말갛게 속이 들여다보이는 호스를 꽂더니, 다른 끝을 병에 집어넣습니다. 한손으로 병을 감싸쥐더니, 손에다 입을 대고 병에 든 공기를 빨아냅니다. 그러자 곧 드럼통에서 병으로 기름이 쏟아져 나옵니다. 호스에다 입을 대고 빤다면 혹시 모를까, 우리가 호박잎 줄기를 따서 윗물에 담그고 조금만 쪽 빨면 곧 물이 나오듯이, 그러다가 너무 빨면 입 한 가득 물이 찼는데, 가게 주인아저씨는 호스에 입을 대지도 않고 기름이 나오게 했습니다. 기름병에 기름이 차 가니까 이번에는 기름병을 번쩍 들어 올립니다. 그러자 나오던 기름이 금방 멈췄습니다. 호박잎 줄기에서 나오는 물은 줄기를 위에서 떼야 물이 그쳤는데, 기름호스는 아래서 들으니까 기름이 그쳤습니다. 가게에는 사는 물건만 신기한 것이 아니라, 파는 아저씨도 참 신기한 기술을 가졌습니다.
기름을 넣어 두던 창고에 이발소가 들어선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입니다. ‘신신이발’처럼 ‘장정이발’이라는 간판을 달고, 가죽으로 된 의자가 철꺽철꺽 소리도 나지 않고 부드럽게 뒤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이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머리는 물론 빡빡 밀었습니다. 내 소원은 상구머리로 한번 깎아 보는 것입니다. 내 친구 원각이는 매번 상구머리를 깎았습니다. 나도 뒤는 빡빡 깎아도 앞에는 좀 남겨 둬서 멋 좀 부려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한번이라도 덜 깎아야 한다고 앞머리부터 기계를 대고 빡빡 밀라고 했습니다. 상구머리를 하고 학교에 온 아이는 형편이 나은 집의 귀한 아들임이 훤히 드러나고, 빡빡 깎은 아이들은 입에 풀칠하기 바쁜 집의 여럿 중에 하나임이 틀림없습니다.
나를 이발소에 데려가는 것은 학교 옆에 사는 큰아버지다. 큰아버지는 나를 맡길 때마다 ,
“얘는 내 조칸데, 머리 좀 깎아 주셔. 기계를 좀 꽉꽉 눌러서 깎아 줘.”
“예, 그러지요.”
상구머리는 고사하고, 이발기계에 날을 하나 끼우면 5mm는 더 길어 질 텐데 그것도 끼우지 않고, 맨기계를 대도 그 기계를 바짝 누르고 깎아서 조금이라도 더 짧게 하라는 당부였습니다. 큰아버지가 나가신 후 내 차례가 되어서, 어른들이 앉는 의자의 팔걸이에 송판을 하나 걸쳐 놓고, 신발을 벗고 올라가 앉았습니다. 이발사 아저씨는 동네 어른이 그렇게 말씀하고 가셨으니 있는 힘껏 눌러서 기계 가위질을 합니다. 정수리가 다 벗겨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야.”
짧은 머리에도 기계가 낡아 머리가 찝혔습니다.
“어, 머리가 찝히는구나.”
머리카락이 한 움큼은 빠진 것 같았습니다. 이발사 아저씨는 미안한 듯 기계를 바꿨습니다. 이발사는 미안해 하지만, 난 뭐라고 더 말도 못하고 참아야 합니다. 머리가 찝혀서 아프게 했으면, 기계는 좀 덜 눌러서는 덜 아프게 하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한참 이발을 하던 이발사 아저씨는,
“야, 청구 머리에 소똥 좀 봐라”
하는 소리를 누구라도 들으라고 더 크게 합니다. 이번에는 내가 미안합니다. '머리에 소똥도 안 벗어진 놈이 까분다'는, 바로 그 소똥 말입니다. 머리를 깎을 때 머리카락을 터느라고 양잿물로 만든 누런 빨래 비누를 칠해 한번 감았다가, 더벅머리가 되거나 명절이 되어 머리를 깎을 때까지 세수만 했지 머리를 감는 것인 줄 모르고 사는 거 아닙니까? 서너 달 동안 머리에 때가 끼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을 보니 다행입니다.
“신구의 재홍이는 이가 있더라, 이. 청구 너는 이는 없어 다행이다.”
이 말을 듣고 나니 조금 덜 미안해 졌습니다. 머리를 다 깎고 손톱으로 머리를 긁어 보니 정말로 때가 손톱 밑에 벗겨져 나왔습니다. 때는 나오더라도 머리 깎을 때 제발 좀 아프지나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아픈 것을 보니, 혹시 이가 나오더라도 아프게 하지는 말았으면 좀 좋겠습니다. 세상은 왜 이리 아플 일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이빨 빠질 때 생고구마 먹기도 아프지, 헌데에 고름이 나고 딱지가 떨어질 때 아프지, 머리 깎을 때도 아프지, 난 언제나 커서 아프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발소는 어른들이 들러서 면도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머리를 깎으면 앞에는 그만두고 목덜미 부분에 잔털을 민다고 이발사는 면도칼을 갋니다. 두꺼운 가죽띠를 한 쪽은 기둥에 고정하고, 다른 끝을 잡고 칼등을 먼저 닿게 하고 아래로 문질러 날을 세웁니다. 비누거품을 칠하고 쓱쓱 잔털을 밉니다. 어른들은 얼굴에 온통 비누거품 칠을 하고 누우면 얼굴에 눈썹털만 남겨두고 모두 밀었습니다.
이발을 하고 집에 와서 머리를 감았습니다. 고운쌀겨를 양젯물로 이겨 만든 빨래 비누를 을 어머니가 내어 놓았습니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는데 어머니가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지난 장날에 네 아버지가 단양을 나가실 때였다. 집에서는 면도를 할 수 있는 도구도 별로 없고 해서, 차 시간을 조금 일찍 내려와서 이발소에서 면도를 하고 차를 타실 계산이지.”
아버지는 누워서 이발사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손수 칼을 잡고 거울앞에 섰는데, 면도를 끝내기도 전에 차가 막 출발하더랍니다. 그래서 미쳐 닦지도 못하고 버스를 잡아 올라 탔는데, 그만 콧수염만 깎고 턱수염은 깎지 못하셨더랍니다.
“멋쟁이 신사라면 턱수염은 깎고 콧수염을 길렀을 텐데, 그 반대로 하고 단양장을 돌아다닌 거야. 우습지 않니? 젊은 사람이 버릇없다고 어른들이 생각하지 않았나 몰라.”
어머니는 말씀을 하시면서도 우습다고 깔깔거리셨습니다. 이발소는 칠결의 어른들이 애용하는 면도장소였습니다.
신신상회
꼭 신신상회를 가야할 때가 있습니다. 우표나 담배를 살 때는 신신상회 밖에 없습니다. 우표와 담배는 허가된 곳에서만 팔아야 하는 것인데, 신신상회가 먼저 생겨서 이런 허가를 먼저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좁은 동네에 가게가 두 개 있는데, 두 군데 다 이런 허가를 해주면 허가가 남발될 뿐 아니라, 먼저 받은 가게의 기득권이 보호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내가 초등학교 일학년에 들어갔을 때 큰외삼촌이 우리 일학년 담임선생님이었습니다. 외갓집에서는 굉장히 무서웠는데, 학교에서는 그리 무섭지 않았습니다. 여름방학 어느 날 여름성경학교를 마치고 외갓집에 들어갔습니다. 큰외삼촌이 나를 불렀습니다.
“청구야, 너 심부름 좀 해라. 신신상회에 가서 신탄진 한 갑 사오너라.”
나는,
“예”
하고 50원을 받아 들고 신신상회로 갔습니다. 가게문을 드드륵 하고 옆으로 열자, 주인이 유리를 통해 빼꼼히 내다 보더니 문을 열고 물었습니다.
“뭐 줄까?”
“신탄진 한 갑 주세요.”
“어, 신탄진 지금 다 떨어 졌는데?”
나는 난감했습니다. 사지 않고 빈손으로 갈 수는 없어서, 주인이 보란 듯이 가리키는 담배 진열 상자를 바라봤습니다. 정말 신탄진은 없었습니다. 신탄진이 있을 빈 칸 옆으로는 파랑새도 있고, 승리도 있고, 가루담배를 성냥통만한 곳에 넣은 상자도 있습니다.
“저건 얼마예요?”
파랑새도 승리도 풍년초도 다 신탄진보다는 가격이 낮았습니다. 듣고 봤더니 외삼촌이 사오라고 한 담배는 그 중 가장 비싼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중에 가장 비싼 파랑새를 사고 거스름돈을 받아 가지고 갔습니다.
문제는 무서운 삼촌에게 어떻게 말씀을 드리느냐가 큰 문제입니다. 하는 수 없습니다. 맞닥트리는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삼촌이 공부하고 있는 방문 앞 마당에 서서 큰소리로 삼촌을 불렀습니다.
“삼촌, 담배 사왔어요.”
하고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곧 삼촌이,
“그래.”
하고 대답 끝을 내리면서 여닫이문을 덜컹 열고 나오십니다. 여기요 하고 담배와 거스름돈을 내밀자마자 예상했던 호통이 떨어졌습니다.
“너, 왜 이걸 사 왔느냐? 내가 사오라는 신탄진은 안 사오고?”
이 물음에도 끝이 올라가지 않고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나는 하는 수없이 마당 한 가운데 똑바로 서서 삼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 담배가 다 떨어졌다고 해서, 그 다음에 비싼 것으로 사왔습니다.”
이미 예상했던 호통이라 떨리지도 않습니다. 삼촌의 호통만큼이나 내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삼촌은,
“그러냐? 알았다.”
하시고는 방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그러고는 며칠이 지났습니다. 나는 그 사건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부엌 아궁이에 불을 넣다가 말고는 그 때 일을 물어 오셨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니까 어머니는 말을 이어 가셨습니다.
“큰외삼촌이 청구 너는 참 똑똑하다고 그러더라. 당찬 아이라 그러더라. 그러고 네가 그 다음 비싼 담배를 살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 신통하다더라. 너 어떻게 그걸 생각해 냈니?”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칭찬에 뿌듯하게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른들은 왜 그 당시 당사자에게 표현을 하지 않고 뒤에 가서 이야기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잘 했다면, '그래 잘 했구나. 수고했다.' 그러면서 머리나 쓰다듬어 주시든지, 거스름돈이나 다시 주면서 눈깔사탕이나 사 먹어라 하든지 하면 될 것을, 당시에는 심부름을 시켜 놓고도 무서운 호랑이처럼 돌아섰다가, 뒤에 가서 어른들끼리 이야기 하느냐는 것입니다. 차라리 가게문을 들어서면 '뭐 줄까?'하고 친절하게, 우리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물어오는 어른이 훨씬 좋았습니다. 사람대접하는 어른이 좋았습니다. 돈을 들고 가게에 가는 또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또 한번은 우표를 사러 신신상회에 들렀습니다. 큰외삼촌이 전근을 가고, 권정자 선생님이 외갓집에 살 때였습니다. 눈보라가 쌩쌩 부는 겨울이었는데, 늘 나를 반겨 주시는 선생님이 우표를 좀 사다 달라고 하셨습니다. 학교 교문을 지나 측백나무 담장 아래로 내려가는 똑바른 길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눈보라가 막힘없이 총알처럼 불어오는 곳입니다. 바람을 막아주는 외투를 입은 것도 아니고, 눈에 빠져도 든든한 신발을 신은 것도 아니고, 두툼한 장갑을 낀 것도 아닙니다. 바람 술술 들어가는 게옷이나 제대로 입었으면 다행이었습니다. 발도 거의 얼 것 같을 때 다행이도 가게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섰습니다. 가게 안은 난로를 피워 따뜻했습니다.
학교에서는 난로 하나에 한 학년 52명이 쬐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게에서는 따뜻한 난로를 혼자 쪼이고 있습니다. 바람 쌩쌩 들어오는 교실을 난로 하나를 가운데 놓고 견딥니다. 나무도 없어서 학교에 올 때는 등걸 하나씩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난로에 불을 붙일 때는 당번이 먼저 와서 붙이는데, 선생님의 손이 가지 않으면 불을 잘 붙이지도 못하고 아이들이 학교에 다 올 때까지 교실에 연기만 가득할 때도 있습니다. 점심을 먹고 전교생들이 솔방울이나 솔광을 주으러 산으로 가 겨울 준비를 하기도 했습니다. 소나무를 베고 남은 끌컹이 오래되면 광솔만 남아서 베인 채로 땅에 박혀 있습니다. 남자들은 발로 힘껏 차서 썩은 껍질을 털어내고 광솔을 건지면 아주 자랑스러웠습니다.
1960년대 말 초등학교 고학년에 되었을 때는 무연탄난로가 나왔습니다. 난로는 똑같은데, 나무를 때다가 물로 갠 무연탄을 올려놓아 불을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탄창고에서 언 탄을 바켓스로 담아다가 물로 개어 주먹만하게 만들어서 괄은 불에 올려놓으면, 나무로 땔 때보다 훨씬 따뜻했습니다. 탄은 당번이 탄창고에 가서 호미로 캐와야 했습니다. 겨울에 물이 얼듯이 탄에 스민 물이 얼어서 그냥 캐지질 않습니다. 한번은 용식이와 당번 차례가 되었습니다. 어둑컴컴한 탄 창고에서 서로 호미질을 하는데, 갑자가 눈에 탄이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난 어찌할 줄 모르는데, 용식이가 눈에 뭐가 들어갔으면 얼른 침을 밷으라는 것입니다. 나는 달리 방법이 없어서 시키는 대로 침을 밷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로 거짓말처럼 괜잖아졌습니다. 신기했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눈에 뭐가 들어갔다 싶으면 곧바로 침을 밷아서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난로 한번 제대로 쬐었다 싶을 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신상회에서는 혼자 따뜻한 난로를 피워 쬐고 있습니다. 그 난로 위에는 주전자가 있었고, 주전자에서는 하얀 김도 가물가물 올라오고 있습니다. 주전자에서 나온 김이 유리창에 붙었는지 유리창에는 하얀 김이 서려 있습니다. 밖은 눈보라가 사람을 꽁꽁 얼릴듯한데, 가게 안은 따뜻하고 포근한 천국 같습니다.
우표를 샀으면 다시 눈보라 치는 눈길을 헤쳐 가야 합니다. 마당을 지나 측백나무 아래 찬바람에 뻥 터진 길을 들어섰을 때는 벌써 게옷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와 온 몸을 얼리고 있습니다. 뒤통수를 후려치는 바람을 막을 옷깃도 없었고, 우표를 쥔 손을 넣을 주머니도 마땅찮습니다. 하는 수 없이 갯말에 손을 넣으려고 하다가, 그만 언 손이 벌어져 우표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작은 우표가, 선생님이 심부름시킨 우표가, 눈과 함께 일직선으로 날리더니, 측백나무가 선 학교 담장 반대편인, 아카시아나무 벼랑 아래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세 쪼가리가 날아갔는데, 두 개는 이미 보이지도 않고, 하나가 눈 속에 묻히다가 만 가시나무에 걸렸습니다. 언 발을 살그머니 들여놓고 잡으려는 사이에 다시 바람이 불어, 내 다리가 바람길을 둘려서 그런지 눈깜짝할 사이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낭패입니다. 선생님을 뵐 낯이 없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선생님에게 말씀은 드려야 합니다.
“선생님 우표를 사오다가, 그만, 바람에 다 날아가 버렸어요.”
잡고 오던 언 손을 들어 보이자, 권정자 선생님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나를 바라보십니다. 내가 다른 것을 사 먹고 잃어버렸다고 하는가 생각하지는 않은 듯 합니다. 나를 믿어 주셨습니다. 다만, '이 추운데 이린 아이를 심부름을 보냈구나' 하는 자책을 하시는 듯했습니다. 그 신신상회는 옥경이네 집입니다. 옥경이는 우리보다 훨씬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 형제가 천덕꾸러기처럼 살아가는 우리와는 달리, 교회에서 그림도 잘 그리는 옥경이는 무남독녀 외동딸입니다.
가게서 사는 것
가게서는 무엇이든지 다 살 수 있습니다. 그런 가게를 자주 들리는 친구가 참 부럽습니다. 석균이는 집에서 난 계란을 가지고 가게집을 자주 드나듭니다. 물론 도화지를 사거나 연필을 사는 때도 있었지만, 계란을 주고 사탕을 사먹기도 합니다. 우리는 집에서 난 계란을 가지고 나올 것도 없었지만, 있다고 해도 장정까지 가지고 나올 수도 없습니다. 손에 들고 흔들었다가는 가게 주인이 흔들어 보고는 속이 흔들린다 싶으면 받지도 않습니다. 어쩌다가 석균이가 가지고 온 계란도 주인아저씨는 조심스레 흔들어 보았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다 똑같아 보이는데, 석유를 신기한 방법으로 담아주는 그 실력으로 계란도 성한지 골았는지도 잘 구별하시는가 봅니다. 등짐장수야 떨어진 고무신도 받고 찌그러진 냄비도 받지만 가게는 그런 것은 받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돈만 가지고 가야 합니다.
돈만 가지고 가면 무엇이든지 다 살 수 있습니다. 쫀득쫀득한 찢어 먹는 쫀드기는 누가 하나를 사면 여럿이 찢어서 나눠 먹을 수 있습니다. 가게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죽 둘러서서, '나 좀, 나 좀.'하고 손을 내밀면, 아무 말없이 조금씩 찢어 줍니다. '아폴로'도 있었는데, 아기 귀저귀 고무줄 둘레보다는 절반은 됨직한 가는 둥근 비닐 호스에 세콤달콤한 가루를 물엿에 되게 반죽해서 넣어 둔 것입니다. 절반을 이빨로 물어 빼먹고는 반대로 돌려 또 절반은 물어 빼먹는 것입니다. 달착지근하기도 하고, 세콤하기도 하고, 혀에 굴리면 한 바퀴도 돌지 않아서 다 녹아버립니다.
가게서 사 먹는 것이라면 라면땅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라면은 물을 끓여야 먹을 수 있을뿐더러 한 봉에 25원이나 합니다. 물론 봉지채로 부신 다음, 봉지를 뜯어서 스프를 넣고는, 골고루 흔들어 먹는 맛도 좋지만, 라면은 우선 값이 비싸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라면땅은 5원이면 살 수 있습니다. 라면보다 면이 굵고, 이미 손으로 집어 먹으면 되도록 잘게 부숴져 있습니다. 노란 가루가 손에 묻기는 해도 봉지를 탁탁 털어 작은 부스러기까지 입에 넣고나면 참 행복합니다.
그런데 라면땅 봉지에 비밀이 숨어 있답니다. 라면땅 봉지에는 뽀빠이가 팔뚝을 볼룩하게 해서 힘자랑을 하는 그림이 있는데, 윗옷은 빨강을 입었고, 바지는 파랑을 입었습니다. 목에는 넥타이는 둘렀는데, 이 넥타이가 가장 큰 문제랍니다. 작년 설 때쯤 북한 공산당 군인들이 청와대를 처들어왔는데 다 죽고 한사람 김신조만 잡혔답니다. 또 작년 12월에는 울진 삼척에 간첩들이 내려와 이승복을 죽였답니다. 이승복은 집에 숨어 들어온 사람들이 북한에 간첩인 줄 알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하고 소리치자, 간첩들은 무자비하게 이승복을 죽였답니다. 이승복의 형이 간신히 피해 신고를 해서 간첩을 모두 잡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이런 간첩들이 내려오게된 신호가 라면땅 때문이랍니다. 라면땅을 만드는 회사 사장이 공산 간첩인데, 라면땅 봉지에 비밀로 쳐내려 오라고 신호를 보내서 간첩들이 더 많이 내려오게 되었답니다. 뽀빠이가 입은 옷과 목에 맨 넥타이가 그 신호랍니다. 붉은 상의는 북한을 의미하고, 파란 하의는 남한을 의미하는데, 목에 맨 넥타이가 아래로 집게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쳐내려오라는 신호랍니다. 어떤 때는 헷갈리게 하려고 옷의 색깔을 바꾸기도 한답니다. 그래도 넥타이 모양은 아래로 향한 집게 모양이 바뀌지 않는답니다. 라면땅을 사서 자세히 보니 그럴만도 해보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라면땅을 먹으니 갑자기 맛이 없어졌습니다. 맛보다는 나라 걱정이 먼저 됐습니다. 그런 간첩이 버젓이 공장도 하는지 걱정도 큰 걱정입니다.
뽑기는 풍선을 살 때 많이 합니다. 스케치북 만한 종이에 위로 4/5는 번호에 맞춰 풍선이 주둥이를 꼽고 몸통은 나와 있고, 아래로 1/5는 속으로 번호가 매겨져 양쪽 두 군데가 붙어 매달려 있습니다. 돈을 먼저 내고, 아래 동그란 떼기를 뽑아 번호를 찾으면, 그 번호에 맞는 풍선을 갖는 것입니다. 가장 눈이 가는 풍선은 길이가 긴 풍선입니다. 그 다음은 둥근 크기가 큰 풍선입니다. 보통 풍선이 많고 어쩌다가 아주 작은 풍선이 걸릴 때도 있습니다. 가장 좋은 풍선인 긴 풍선 하나와 크기가 큰 풍선 서너개만 없으면, 그 판에서 뽑기를 하기가 싫었습니다. 이미 희망이 사라졌거든요. 찌시래기만 남은 판에서 뭣에 희망을 걸고 누가 뽑기를 하겠습니까? 대게 큰 것 몇 개는 없어져도, 가장 좋은 긴 풍선은 언제나 남아 있습니다. 눈은 전부 그 번호에 가 있습니다. 그런데 난 언제나 가장 많은 보통 풍선만 걸렸습니다. 긴 풍선은 한 번도 뽑아보지 못했습니다. 난 본래 운이 없는 모양입니다.
풍선을 뽑으면 불었다가 바람을 뺏다가를 반복할뿐, 크게 불어서 놀지를 못합니다. 터질까 아깝기 때문입니다. 풍선은 한번 터지면 그만이니까 조심해야 했고, 가장 조심하는 방법은 불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데 또 그냥 가지고 있기만하려면 뭐하러 풍선을 사겠습니까? 그러니까 불었다가 바람을 뺐다가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풍선을 불면 조금 힘이 들지만, 두 번째부터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불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 풍선을 불었다가 바람을 뺄 때는 입에서 나온 바람을 입에다가 대고 주둥이를 놓습니다. 그러면 풍선 안에 있던 흰 가루가 목구멍 깊숙이까지 들어가 콜록콜록 기침이 나기도 합니다. 얼굴에 대고 주둥이를 놓으면 눈을 감아도 눈에 가루가 들어가기도 합니다. 바람을 뺀 풍선을 주둥이를 입에 대로 쪽 빨아들이면 풍선이 홀딱 뒤집어지기도 합니다. 뒤집힌 풍선은 침이 흥건히 고여 있기도 했습니다. 그 침이 다시 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좋은 풍선을 겉과 속을 핥아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카메라와 늘 헷갈리는 카라멜도 맛있고, 그냥 껌보다 훨씬 비싼 풍선껌을 씹을 때는 아까워서 문설주에 붙여 놓았다가 다음날 또 씹어야 합니다. 풍선껌에 크레용 도막을 넣고 씹어서 색깔을 내기도 합니다. 색깔 풍선껌은, 나이는 나와 같은데 생일이 나보다 여섯 달 늦어 사실은 내 동생이지만, 한 번도 나를 오빠라고 부르지 않는 큰집 사촌 정숙이가 잘 만듭니다. 어떤 때는 빨강색 풍선껌을 풍선처럼 불다가 얼굴에 다 뒤집어쓰고 터지고, 어떤 때는 보라색 풍선껌을 커다랗게 불기도 합니다. 아무튼 가게는 우리의 희망이 있는 곳입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습니다. 설에 외갓집에서 세배를 하고는 세배돈을 적잖이 받았습니다. 점심을 먹은 오후에는 삼촌과 이모들이 둘러앉아 화투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생전 처음입니다. 나이롱화투랍니다. 온 식구가 둘러앉아서 그림을 맞추고 이것과 저것이 짝이 맞는 다는 둥, 이런 것을 모으면 약이 된다는 둥, 한 이모가 어디서 배워왔는지 가족들과 둘러앉아서 웃음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어린 내가 좀 끼여들어 구경을 하려고 해도, 좀 구경 좀 한다 싶으면 내 놓으라고 하고, 그 많은 화투장 중에서 한 두 개는 남겨둘 법도 한데, 번번이 모조리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내가 한 장을 손에 잡고 구경을 한다고 해도, 그 많은 식구 중에서 한 사람도 내 편을 들어 주지 않습니다. 할머니도 이모와 삼촌들 편이었습니다. 야속했습니다. 한 주먹을 쥐고도 한 장도 남겨두지 않고 번번이 짝을 찾았습니다.
속이 상한 나는 나도 내 화투를 갖고 말겠다고 화투를 판다는 장정상회를 찾아 갔습니다. 화투가 두 종류랍니다. 회화투와 나이롱화투입니다. 나이롱화투는 엄청 비쌌습니다. 배가 넘습니다. 가게 아저씨가 곽 채로 내 보이는 것을 보이까 삼촌과 이모가 하는 화투는 나이롱화투가 틀림없습니다. 좀 싸긴 하지만 내게는 회화투만 해도 가지고 놀기에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정말로 어른들이 회화투를 사오라고 시켰니?”
하고 가게 주인아저씨는 물어 보았지만, 내가,
“예”
하고 심부름하는 거라고 분명하게 대답하는 바에야 안 팔 이유가 없었습니다. 회화투 한 몫을 들고 가게문을 나오는 나는 말로 다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외갓집에도 가기 전에 아무도 보지 않는 바람도 없는 양달에 앉아서 그림을 펼쳐 보았습니다. 와, 화투가 드디어 내 손에 있습니다. 눈에 얼찐얼찐 하던 그림을 내가 드디어 한 묶음 모두 가졌습니다. 삼촌과 이모들이 화투를 하다가 나오기만 하면 함성을 지르는 팔광을 찾아 들었습니다.
“야, 이거구나.”
하고 땅바닥에 힘껏 내리쳤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한 번을 쳤는데, 그만 회화투가 반으로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허리가 척 구부러졌습니다. 구부러진 허리로 하얀 석회가루가 나왔습니다. 이런 걸 왜 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 가게에는 불량품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가게가 또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물건이라고 들여놓은 것뿐이지요. 만드는 사람이 잘못일까요? 공장에서 만들었어도 사지 않으면 될 것을 말입니다. 나같은 말썽꾸러기가 이런 불량한 물건을 샀으니 문제입니다. 문제는 내가 문제였습니다. 불량은 내가 불량이었습니다.
그래도 외갓집에 가서 자랑은 해야겠어서 외갓집 마당에 들어서서,
“나도 화투 있어요.”
하고 손을 들어 보였습니다. 그랬더니 모두 야단들이 났습니다. 둘째이모는,
“어머, 어머, 제 청구 좀 봐. 화투를 사가지고 왔네.”
하고는 혀를 내둘렀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어린 조카가 화투를 사들고 왔으니 마땅히 놀랄만도 했을 것입니다. 팔광은 부러진 채로 가운데 끼워 넣었지만, 나에게는 만지지도 못하게 하던 화투가 내 손에도 있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증거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소리치십니다.
“야, 빨리 화투 걷어 치워.”
외삼촌들과 이모들이 부산히 방에서 나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내가 산 화투를 구경하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가지도 놀던 화투도 어디로 치웠는지 한 장도 보이지 않습니다. 삼촌과 이모들에게는 큰소리로 야단을 치던 할머니가 내게는 오시더니, 손을 잡고 방으로 데려 들어 가셨습니다.
“청구야, 이리와 식혜 먹어라. 엿도 하나 줄까?”
등을 다도거려 주십니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그때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냥 어안이벙벙했습니다.
가게에서 살 수 없는 것
가게는 무엇이나 다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에 아이스께끼가 있는데, 이것은 가게에서 팔지 않습니다. 단양이나 대강에서 아이스께끼 장사가 왔습니다. 다른 장사들은 물건을 팔면 쌀도 받고 옥수수도 받고, 아주 귀한 찹쌀로도 받습니다만, 아이스께끼 장사는 꼭 돈으로만 받았습니다. 보따리장사나 봇짐장사는 가져오는 물건도 커서, 가지고 갈 때도 그렇게 이거나 지고 가면 됐는데, 아마 아이스께끼 장사는 통을 하나 어깨에 매고 와서 짐을 지고 다니는 데는 익숙치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다른 장사는 나이가 지긋한 어른이 하는데, 아이스께끼 장사는 어린 형들이 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하여튼 아이스께끼 장사는 네모난 통에 아이스께끼를 가득 담아서 방앗간에서 쓰는 피대 같은 끈을 매달아 어깨에 매고 왔습니다. ‘아이-스기갸’ 하고 유창하게 외치면 우리는 달려가 빙 둘러쌌습니다. 그러면 아이스께끼 파는 형은 통을 땅바닥에 놓고 앉아서 가랑이 사이로 통 앞으로 난 뚜껑을 열고는 하나씩 꺼내 팔았습니다. 하나에 2원입니다. 하얗게 깍은 나무 젓가락에 팥앙금을 얼어붙여 만든 둥근 아이스께끼가 포장도 없이 알로 길게 달려 있습니다. 한 사람이 사면 또 빙둘러 따라가서 한 입이라도 얻어먹습니다. 주머니에 2원이라도 돈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어떤 날 아이스께끼 장사가 온다고 예고라도 하면 소풍 때 조르듯이 부모님을 졸라서 돈을 준비하기라도 하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아이스께끼 장사를 기다려 돈을 마련해서 가지고 다닐 수도 없습니다. 학교에 다니면서는 아이스께끼 하나를 온전히 먹어보기 어렵습니다.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동욱이가 사면, '한 입만, 한 입만.' 사정을 하다가 한 번 주면, 고맙게 돌아서는 것이 고작입니다.
날 더운 날, 학교 끝나고 남천 가는 오르막을, 양 옆으로 논과 밭이어서 그늘 하나 없는 길을, 뙤양볕이 그림자도 쫄아 붙여 없애고 내리 꽂는 길을, 모자도 없이 빡빡 깍은 머리로 오르다 보면, 자연히 몇 입 먹어본 아이스께끼가 저절로 화제가 됩니다. 세상에서 아이스께끼 장사가 제일 행복해 보였습니다.
“야, 야, 한 통 가득 담아 가지고 팔러 다니자면, 최소한 자기는 싫컷 먹어 볼 것 아니야?”
원각이의 의견입니다. 용심이는,
“팔러 다니다가 비가 와서 날이 덥지 않아 팔지 못하면 녹기 전에 다 먹어 치워야 할텐데, 그 때는 어떻게 하겠어. 누구라도 녹기 전에 다 먹어 치워야하지 않겠냐고?”
덕호는 한 술 더 뜹니다.
“소문에 듣기에는 어떤 아이스께끼 장사는 30개를 먹었는데 그만 얼어서 죽었데.”
인수는,
“아마 어른은 50개는 먹어야 얼어서 죽을 걸?”
나도 한 다리 끼여 듭니다.
“지난번에 왔던 빼빼 마른 아이스께끼 장사는 요즘 안 보이는 것을 보니까, 팔다가 못 팔아서 남은 것 20개 먹다가 얼어 죽은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애.”
그러면 결론은,
“아이스께끼 먹다가 죽느니, 차라리 안 먹는 것이 좋겠다.”
하고 원각이가 결론을 땅땅땅 내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맞다고 맞장구를 치면서 올라갑니다.
막내 외삼촌은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는 해에 졸업하고 제천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해 여름방학이었습니다. 막내 외삼촌이 다니는 제천중학교에 방학 중에 비상소집에 참석하러 제천을 간답니다. 나는 삼촌을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하룻밤을 하숙집에서 자고 오는 것인데, 고맙게도 삼촌은 꼬질꼬질한 조카를 데리고 가 주었습니다. 버스로 단양정류소에서 갈아타고 제천에 가야 합니다. 단양에서 제천을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아이스께끼 파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장정학교에서처럼 아이스크림 장수가 통을 매고 '아이-스기갸'를 외치며 정거장으로 오고 있습니다.
“외삼촌, 나 아이스께끼 사줘. 나 한번도 못 먹어 봤단 말이야.”
삼촌은 아이스께끼 장사를 불러서 오게 하고는, 내게 어떤 아이스께끼를 먹을 거냐고 물었습니다.
“뭘로 먹을래?”
2원짜리와 5원짜리,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장사는 통을 열어서 보이기 전에 결정하라고 나를 빤히 내려다 봤습니다. 사실은 2원짜리는 먹어 봤고, 5원짜리는 못 먹어 봤으니, 5원짜리를 먹겠다고 했습니다.
5원짜리는 더 그럴싸했습니다. 2원짜리는 장정에도 장사가 둘러매고 오는 팥빛갈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5원짜리는 색깔도 더 멋졌습니다. 푸른 빛깔입니다. 생김새도 다릅니다. 2원짜리는 동그랗고 길게 생겼는데, 5원짜리는 짧지만 넓게 네모졌습니다. 아이스께끼 손잡이도 다릅니다. 2원짜리는 나무를 젓가락처럼 동그랗게 깎았지만, 5원짜리는 나무를 납작하게 깎은 것입니다. 맛은 또 기가 막힙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것이 있다니, 참 놀랍습니다. 차마 아까워서 빨리 먹을 수가 없습니다. 혓바닥으로 살살 핥아 먹었습니다. 옆에 서서 내가 먹는 것을 보기만 하는 삼촌이 참 이상했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것을 사먹지 않고, 먹는 것을 보기만 하다니 말입니다. 삼촌은 빨리 먹으라고 했지만, 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이스께끼가 녹아서 흘렀습니다. 파란 물이 잡은 대를 따라 내려오더니 내 손가락을 타고 넘어 떨어집니다. 이래서 삼촌이 빨리 먹으라고 했구나 하고 깨닫기는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삼촌은 창피하다고, 촌놈을 데리고 다니려니 표시를 낸다고, 인상을 쓰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덜 먹었는데, 제천 가는 버스가 브릉부릉 하면서 도착합니다. 버스를 타야 하는데 아이스께끼를 줄줄 흘리며 먹고 있으니, 한 대 쥐어박기라도 하고 싶은가 삼촌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삼촌은 짜증은 나지만 때릴 만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막내 외삼촌이 고마웠습니다.
더 신나는 일은 제천에 가서 삼촌이 난생처음 운동화를 사 준 것입니다. 우리학년에서 운동화를 처음 신은 것은 동욱입니다. 달리기 연습을 할 때면 남들은 신은 고무신을 바톤처럼 들고 뛰거나, 잃어버릴 염려가 없는 담대한 아이는 아무데나 벗어두고 뛰거나, 아주 신고 뛰다가 벗어지면 뒤돌아와 들고 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동욱이는 바닥에 노란색 생고무가 깔린 운동화를 뒤에 살짝살짝 들어 올리며 뛰었습니다. 그 후 몇몇 친구들이 같은 운동화를 신었지만, 나는 여전히 고무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촌은 하숙집에 나를 혼자 남겨두고 학교에 가기 전에 운동화를 한 켤레 사 주었습니다.
아침에 나간 삼촌이 오후 늦게야 들어왔지만, 그 시간에 나는 혼자 있어도 조금도 심심하지 않았습니다. 삼촌의 하숙집 툇마루에서 운동화 끈을 뀄다가 풀었다가, 다시 뀄다가 풀었다가, 하루 종일 운동화만 가지고 놀면서, 끈을 꿰는 여러 가지 방법을 다 익혔습니다. 사다리 꿰기, 곱하기 꿰기, 속으로 사다리 꿰기, 속으로 곱하기 꿰기, 속에서 나와 겉으로 들어가게 사다리 꿰기, 속에서 나와 겉으로 들어가게 곱하기 꿰기, 그 반대로도 가능했습니다. 눈을 감고도 꿰고, 뒤로 돌려서도 꿰고, 머리에 올리고도 꿰고, 운동화로 할 수 있는 놀이를 다하고 혼자 놀았습니다. 이제는 운동화만 보면 끈을 어떻게 궸는지 단번에 알 수 있게 됐습니다. 대부분이 겉으로 사다리 꿰기를 해서 신었습니다만, 어쩌다가 곱하기로 꿰어 신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운동화에서 눈을 들어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습니다.
장정에는 두 개밖에 없는 가게가 단양이나 제천에는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장정에 있는 가게 두 개는 모두 비슷한 물건을 팔았지만, 대처의 가게는 한 가지 종류의 물건만 놓고 팝니다. 제천에서 산 운동화도 단양에서 먹은 아이스께끼만큼 좋았습니다. 세상에는 좋은 것도 참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