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구경
가을 운동회를 마치면 머지않아 군 체육대회가 있습니다. 군체육대회에는 우리같이 작은 학교에서 출전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구경은 갔습니다. 군단위 체육대회를 처음 열어 활성화하는 차원에서 모든 학교가 쉬고 체육대회에 참여하도록 교육청에서 독려했습니다. 5학년인 나는 이번에는 꼭 구경을 가보기로 했습니다. 작년에는 벼를 베느라고 못 갔습니다. 비가 자주와 조금이라도 마른 날 급하게 베어야했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꼭 보내 주기로 어머니가 약속하셨습니다. 오랜만에 가보는 대처 구경입니다.
장정에서 출발하는 버스는 이미 콩나무 시루같이 만원입니다. 정정에서 단양 가는 길은 포장도 되지 않은 길입니다. 바위가 울퉁불퉁 솟아 있어 빨리 달릴 수도 없습니다. 개울을 지날 때는 물속으로 바퀴가 쑥 들어갔다가 나오느라고 기우뚱거리기도 합니다. 뱀제를 넘어 풍기장을 보던 것을, 하루에 두 번 있는 버스를 타고 단양장으로 나가는 장길입니다. 장마만 한 번 지면 삐쭉삐죽 날카로운 돌뿌리까지 드러나는데, 지난 추석을 준비한다고 마을마다 부역을 나와 차 다니는 길을 손을 봐서 그나마 좋아 진 것입니다. 버스는 덜컥덜컥 기우뚱 거리는 사이 버스에 탄 우리는 짐짝처럼 이리 밀리고 저리 쏠리면서 덕촌, 미노, 황정을 차례차례 들렀습니다.
황정에는 초등학교 앞에 버스가 서는데, 마을에서 초등학교까지 나오는 다리는 사람만 건널 수 있는 좁은 다리입니다. 그 다리로 버스를 타려고 사람이 뛰어 오는데도, 이미 초등학교 앞에 와서 기다리는 사람도 타지 못하게 생겼습니다.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차장누나는 동전으로 유리를 한번 치면 멈추고, 두 번 치면 가라는 것으로 운전사에게 신호를 보내다가도, 황정에서 타려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을 보고는, 운전사에게 못 태운다고 소리를 질러 지나치게 했습니다. 단양 구경이 시작부터 사람구경입니다.
나 혼자서는 단양을 갈 엄두도 못 낼 텐데 모래변 이종사촌 큰누나를 따라 간 것입니다. 큰누나는 나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데, 큰이모의 맏딸로 막내 외삼촌보다도 한 살이 많습니다. 아무리 단양을 처음 간다고 해도 이 누나만 있으면 걱정이 없습니다. 사람들 많은 데서 혹시나 떨어지면 집에 오지 못한다고 하루 종일 손을 꼭 잡고 다니라고 어머니가 일렀습니다. 단양초등학교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완만한 경사로 내리막이 난 길에서 버스를 내렸습니다. 운동장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단양을 처음 가기는 학교를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를 따라 간 적이 있습니다. 아마 자라나는 아들에게 단양 구경을 시켜주고 싶으셔서 일부러 데려가신 것일 겁니다. 첫인상은 단양 버스 종점에서 내려서 건넌 다리였습니다. 그렇게 높은 곳에 다리를 건너질러 사람이 걸어 다니고 차도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했습니다. 다리에서 내려다보니 생전 처음 보는 많은 물이 조용히도 흘러갔습니다. 남천에서 장정을 흐르는 물은 소리도 나고, 돌을 돌고, 돌을 넘고, 그래서 언제나 물결이 이는데,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은 멈춘 듯 조용했습니다. 엄청 많은 물이 소낙비를 맞으며 서 있는 염소처럼 조용했습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큰 나무 옆에 건물로 들어 가셔서 따라 들어갔는데, 절반 쯤 칸을 막아 놓고 그 안에 사람들이 책상을 놓고 앉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사람들에게 뭔가 이야기를 하시고 볼일을 보시는가 봅니다. 칸은 내 눈보다 높아서 바닥밖에 볼 수 없는데, 바닥은 시멘트로 반질반질하게 갈아 놓은 것이 우리집 부엌의 부뚜막보다도 깨끗했습니다.
시내는 큰길 양쪽으로 가게가 꽉 차 있었습니다. 여기를 보아도 신기하고 저기를 보아도 신기하고, 옷도 팔고 그릇도 팔고 찐빵도 팔고, 그야말로 생전 처음 보는 것이, 없는 게 없었습니다. 큰길은 또 구부렁하지도 않고 똑바렀습니다. 사거리에 서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끝 간 데 없이 길이 뻗어 있었습니다. 점심으로는 아마 짜장면을 먹은 듯합니다. 시커먼 굵은 국수를 이름도 모르고 먹었습니다. 한적인 시내를 아버지를 따라 하루 나들이를 했었습니다.
육상경기
그런데 오늘은 체육대회를 해서 그런지 사람이 엄청 많습니다. 그때만 해도 전국소년체육대회라고는 없었습니다. 군대회를 하면 도대회도 있었을 것입니다. 군대회에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몰려들고 관심을 가졌으니, 도청소재지에서 하는 도대회는 더 했을 것입니다. 뿌리에서부터 이런 성원이 큰물일 듯 일어났으니, 전국체육대회를 열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전국소년체육대회가 1972년 6월에 서울에서 열린 것이 처음이었으니, 이 구경 후 2,3년은 지나서였을 것입니다. 어쨌든 장정골테기에서 벗어나 대처 단양에서 구경한 사람구경은 생각지도 못한 난생처음 구경입니다.
단양초등학교에서 단양중학교로 가는 길은 걸어간 것이 아니고 밀려갔다고 해야 맞을 지경입니다. 초등학교운동장에서 차 내린 반대편으로 언덕을 내려가니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집들 사이 골목으로 사람들이 밀려가는데, 골목이 완전 기억자로 꺾어졌습니다. 남천에서는 길이 꺾여도 호박잎처럼 돌거나, 심하면 밤나무 잎처럼 동그랗게 돕니다. 그런데 단양의 골목길은 기역자로 꺾이고, 니은자로 꺾이고, 각을 딱딱 주어 돌아서, 마음까지 각지게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단양중학교로 들어가는 문은 키보다 훨씬 높은 담장을 한참을 지나 쪽문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데, 문은 한사람이 머리를 숙이고 발을 높이 들어 턱을 넘어야 했습니다. 원, 무슨 놈의 학교 문이 이런 문도 있나 싶었지만,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고 당연한 듯이 들어섭니다. 알고 봤더니 거기는 학교 후문이었습니다. 질러가느라고 골목을 따라 쪽문으로 들어선 것이었습니다.
중학교 운동장은 초등학교 운동장보다 훨씬 넓습니다. 운동장 양쪽으로 건물이 있고 가운데에서 운동경기가 한창입니다. 달리기도 하고, 가운데서는 높이뛰기도 하고, 운동장 가로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어디 한군데 눈을 둘 수가 없습니다. 장정초등학교 운동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가 운동회를 하면 운동복은 다 똑같고 남자는 모자의 색깔로, 여자는 머리띠의 색깔로, 청군과 백군만 갈라서 운동회를 하는데, 여기서는 학교마다 운동복의 색깔은 물론 입은 모양도 다릅니다. 더욱이 가슴과 등에 학교 이름을 새겼습니다. 장정초등학교는 찾아 볼 수도 없고, 대가초등학교 대대초등학교 적성초등학교 등 등, 그 중에 단양초등학교라고 쓴 글씨가 아주 당당해 보입니다. 신발은 모두 날렵한 운동화를 신었습니다. 우리는 구경도 하지 못한 신발이었습니다. 운동회 때는 신발 바닥이 노란 생고무가 전부였습니다. 높이뛰기를 하는 것을 보니 장장에서 보던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큰외삼촌이 충주사범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장정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오셨습니다. 학교 공부가 끝나면 큰외삼촌 선생님은 운동장에서 체육을 곧잘 하셨습니다. 어느 날은 운동장에 100미터 달리기 금을 그은 적이 있습니다. 학교건물 앞으로 그려서는 100미터가 나오지 않았나 봅니다. 운동장 제일 안쪽으로 건물 앞에서 시작해서,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배구 네트가 있는 곳까지, 똑 바른 줄로 세 개를 그어서 둘이 달리는 100터 달리기 선을 그었습니다. 직접 달려 보면서 시험도 하셨습니다. 외삼촌 선생님은 장정학교에서 대각선으로 달렸는데, 여기 선수들은 100 달리기를 운동장 앞에 똑바로 달리고 있습니다.
철봉 앞에는 모래를 모아두고 넓이뛰기와 높이뛰기와 씨름을 할 수 있는 장소도 있었습니다. 그중에 큰외삼촌은 또 높이뛰기 연습도 시켰습니다. 선수는 신구에 사는 형이었는데, 다리가 불편한 형이었습니다. 나보다 3학년 높은 형이었습니다. 한 다리는 다른 다리에 비해 더 크고 힘이 세다고, 그 다리로 높이뛰기를 하면 다른 선수들보다 더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나무기둥에 대가리가 없는 못을 박아서 대나무를 걸쳐 놓고 뛰어 넘었습니다. 달려올 때는 똑바로 향해서 오지 않고 45⁰로 달려와서 넘었습니다. 마지막 도약은 힘이 센 다리 하나로 짚어서, 장대를 넘을 때는 옆으로 누워서 넘어, 옆으로 누운 채로 모래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삼촌도 운동복을 입고 직접 넘어보기도 했습니다. 선수 하나를 두고 선생님 한분이 직접지도하셨습니다. 선생님이 여럿을 가리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선수는 저렇게 집중훈련을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비가 내린 후에 아직 모래가 마르지 않았을 때는 모래에 떨어지는 선수가 땅강아지 같이 흙투성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모래가 말랐어도 땀과 범벅이 되어 곧 눈만 빠꼼하고 흙투성이가 되었습니다.
훈련을 하다가 잠시 쉴 때는 나도 한번 넘어 보았습니다. 나도 왼발에 엄지로 가는 힘줄이 하나 끊어져서, 보통으로 걸을 때는 표시가 나지 않지만, 무거운 지게를 지고 가면, '왜 다리를 저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절름거리기 때문에, 나도 높이뛰기 선수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나무를 아래에서 몇 칸을 올려놓았는데도 번번이 걸려 떨어졌습니다. 또 아무리 모래를 깔았다고 해도 옆으로 누운 채로 땅바닥에 '턱, 턱' 떨어지는 몸에 충격이 가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런데 단양군체육대회에서는 매트리스를 두껍게 깔아 주었습니다. 옆으로 누워서 넘는 것이 아니고 뒤로 누워서, 장정에서보다 훨씬 높은 데도 훌쩍훌쩍 잘 넘었습니다.
붐비는 사람들 틈에서 제각각 달리는 운동선수들을 보는 것은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높이뛰기를 보고 있는데, 누나는 달리기하는 선수들을 따라가고 있고, 그 옆 사람들은 출전하는 선수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내 눈에 띄는 것은 선수들이 입은 옷 등에 새긴 글씨입니다. 대대초등학교, 대가초등학교, 우리가 속한 면은 대강인데 대강초등학교도 있었습니다. 대가초등학교는 대가리에 있는데,
"동네 이름이 머리도 아니고 대가리랍니다. 하고 많은 이름 중에 왜 대가리라고 지었을까?"
서로 이야기하면서 웃기도 했습니다. 남천보다 장정이 크고, 장정보다는 대강이 크고, 대강보다 더 큰 단양이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실감을 했습니다.
골목길로 들어간 중학교 후문의 반대편으로 가니 거기에 파란 색을 칠한 철로된 정문이 있습니다. 후문으로 들어가는 골목은 블록 담장으로 막혀 있지만, 정문이 있는 쪽은 나무울타리로 되어 있습니다. 울타리 안에는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가지를 치렁치렁 늘어드리고, 바람이 불면 치마 날리듯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운동장 안에서는 각종 경기가 열렸지만, 버드나무 아래는 각종 장사들이 내가 생전 처음 보는 것으로 유혹했습니다. 각종 장남감에, 솜사탕 같은 달콤한 먹을 거리에, 뺑뺑이를 돌려 찍는 놀이에, 생전 처음 보는 또 하나의 세상이 여기 있습니다.
한 아저씨가 내 귀에다 대로 외쳤습니다.
“십 원을 걸면 오십 원을 줍니다. 십원을 걸면 오십원을 줍니다.”
손에는 아기 귀저귀 고무줄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 저 새총을 만들 수 있는 고무줄이 여기도 있습니다. 고무줄은 두 개입니다. 손바닥에 올려놓은 두 개의 고무줄은 길이가 달랐습니다. 둘 중에 긴 고무줄을 잡으면 건 돈에 다섯 배를 준다는 것입니다. 이건 횡재할 기회입니다. 오원짜리 지폐가 있었고, 십 원, 오십 원, 백 원짜리까지 지폐가 전부였으니, 당시의 십 원은 상당히 많은 돈이었습니다. 십 원으로 오십 원을 번다니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습니다. 살그머니 다가가 보았습니다.
왼손 엄지와 검지로 잡은 고무줄을 뚫어지게 바라보는데도 탄력이 있어서 오른손으로 왔다갔다하는 사이에, 이것이 분명하다고 잡으면 잡는 대로 짧은 고무줄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뚫어지게 바라봤습니다. 나라면 긴 고무줄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0원이 어딥니까?
“아저씨, 여기 있어요.”
십 원을 아저씨 손 밑 판에 올려놓았습니다. 아,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틀림없다 싶었는데 아니었습니다. 순식간에 10원을 잃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다른 청년쯤되는 아저씨가 나처럼 자신있다는 듯이 돈을 걸었습니다. 이 아저씨는 세 번이나 허탕을 쳤습니다.
“에이씨, 한번만 더해요.”
하고 한번 더 하자더니, 네 번째는 두 손으로 고무줄 하나씩 잡고 당겼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글쎄, 밖으로 나온 고무줄은 모두 짧은 고무줄의 양쪽 끝이었습니다. 이걸 잡든 저걸 잡든 밖으로 나온 고무줄 중에서는 긴 고무줄이 없는 것입니다. ‘아, 세상은 이렇구나.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소리가 바로 이런 경우로구나’하고는 아저씨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대명천지 운동장에서는 정정당당한 경기가 펼쳐지는데, 그 뒷골목 나무그늘 밑에서는 눈을 뜨고도 코를 베어가는 아사리판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같은 하늘 같은 울타리 안에서, 한 발 밖은 만인의 공정한 경기가 벌어지고, 한 발 안은 속임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이게 세상인가 봅니다. 거기서 꾸물꾸물 사람을 불러 모으는 장사들이 모두 거기가 거기로 보입니다. 이 으슥하고 살벌한 뒷마당을 빨리 빠져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운동장을 둘러 나와 단양초등학교로 갔습니다. 누나와 골목길은 같이 걷고 있었지만, 보이는 것은 고무줄을 놀리는 아저씨의 얼굴과 손만 올른거립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축구경기
단양중학교에서 다시 골목길을 걸어 단양초등학교에 왔습니다. 마침 축구 경기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운동장까지 들어서서 축구경기를 구경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지켜보았습니다. 우리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것과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선수들이 유니폼을 일제히 갖추어 입고, 신발도 축구화를 제대로 신고, 간격도 훈련된 듯이 떨어져서, 통통 튀는 공을 다루고 뻥뻥 차기도 합니다. 우리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면 누구누구는 우리 편, 누구누구는 상대편으로만 갈랐습니다. 한참을 차다가 보면 이친구가 우리 편인 것을 늦게야 알 때도 있고, 그에게 공이 가고 나서야 우리 편이 아닌 것을 알 때도 있습니다. 축구는 공만 보고 쫓아가 차면되는 줄 알았습니다. 유니폼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제대로 하는 축구를 구경하고야 축구는 여럿이 협력해서 하는 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단양 초등학교 등번호 7번이 코너킥을 찰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서 찼는데, 그 공이 바나나처럼 휘더니 아무도 맞지 않고, 골키퍼도 건드리지 못한 채로, 골대로 그대로 들어갔습니다. 바나나킥입니다. 평소 친구들과 이야기해서 알고 있는 바나나처럼 그렇게 많이 휜 것 같지도 않는데, 코너킥으로 찬 공이 골대 안으로 그냥 들어갔으니 바나나킥이 맞기는 맞습니다. 결국 단양초등학교가 영춘초등학교를 1대0으로 이겼습니다.
장정초등학교도 축구를 잠깐 했습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2년 후인 1973년입니다. 창호 형 동생 상호가 그 축구부에 들었다고 들었답니다. 아마 이런 군체육대회에 나가려고 예선을 치르는 경기였던지, 처음으로 생긴 전국소년체육대회에 나가려고 예선을 치르는 경기였던가 봅니다. 대강초등학교에서 축구 시합이 벌어졌습니다. 11명이 선수로 뛰어야 하는데, 겨우 선수를 뽑고 후보는 한 둘 더 데리고 간 경기였습니다. 어떤 선생님인가 아이들을 훈련을 시켜서 시합에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지고 말았답니다. 더군다나 한 선수가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까지 당했답니다. 학교에서 응원단은 하나도 가지 못한 경기였는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4번이 다리를 다쳤답니다. 역시 4는 죽을 사자라서 달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랬다고 우리들끼리만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또 한 가지 도는 이야기는 우리가 골을 먹은 것은 대강초등학교 뒤로 기차가 지나갔기 때문이랍니다. 장정에 살면서 생전 기차라는 것을 보지 못했고, 그렇게 큰 차가 철커덕 철커덕하는 소리를 내면서 학교 지붕 너머로 지나가는 것을 처음 보고는, 선수들이 잠시 집중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상대편 선수가 슛을 한 것입니다. 이걸 슬프다고 해야 할까요, 안타깝다고 해야 할까요? 어쨌든 그 후로 장정초등학교 축구부는 사라졌습니다.
누나가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손을 끌었습니다. 장정에서 이사를 간 집으로 가잡니다. 그 집을 누나도 잘 안답니다. 안뜰인가 살다가, 단양 버스정류장에서 곧장 사거리를 지나 오르막인 단양교회 쪽으로 올라가는 중간쯤에서 왼쪽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면 그 집이였습니다. 우리가 들어섰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장정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누나가 나를 소개했습니다.
“재옥이 아들, 우리 큰 이모 재옥이 아들. 남천 살지.”
그러니까 집 주인은 알겠다는 듯이 앉으라고 하고는 밥을 한 그릇 전해 주었습니다. 밥그릇에는 이미 반찬도 다 들어있고, 숟가락으로 비벼 먹기만 하면 됩니다. 손님이 많이 올 것을 대비한 모양입니다. 뛰는 선수들 중에 응원할 우리 편은 없었지만, 큰 잔치에 함께 참여해서 즐거움을 나누는 것도 좋은데, 거기서 아는 사람들을 만나 함께 밥을 먹으며 살아 온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또한 큰 즐거움인가 봅니다. 나는 그 자리에 청구로 온 것이 아니라, 우리 어머니의 아들로 앉아 있습니다.
핸드볼 경기
점심을 먹고는 단양초등학교 실내체육관으로 들어갔습니다. 운동장을 구경할 수 있는 시멘트 계단 뒤편에 있는 실내체육관입니다. 체육만을 위해서 이런 큰 집을 짓기도 하는구나 생각하며 들어갔습니다. 체육을 하면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옥수수가 더 잘 자라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닌데, 교실보다 훨씬 크고 좋은 건물을 짓는다는 것이 고개를 꺄우뚱할 일입니다. 체육관 바닥은 마루를 깔았는데, 남천이나 장정 어느 집에서도 볼 수 없는, 좁은 송판을 얼마나 촘촘히 깔았는지 바늘 하나도 빠지지 않게 생겼습니다. 우리 집 마루에서처럼 밥을 먹다가 젓가락을 놓치면 마루 틈으로 빠져서 마루 밑으로 기어 들어가 꺼내오는 불상사는 애초에 없게 생겼습니다. 또 마루바닥은 얼마나 반질반질하게 닦았는지 반짝반짝하고 천정에 불이 비칠 정도입니다.
이런 깨끗한 마루에 네모 안에 둥그런 금을 페인트로 그려 놓았습니다. 금은 백날 가도 지워지지도 않게 생겼습니다. 우리가 학교 운동장에서 사다리 놀이를 한다든지 오징어 가이생(게임)을 하면 제일 먼저 금을 그리는데, 여기서는 아주 금이 그려져 있어서 뛰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가이생을 하다가 금이 희미해지면 발을 모로 돌려 신발 모퉁이로 쓱쓱 다시 그리는데, 여기서는 페인트로 그려서 지워질 염려도 없습니다. 어쩌다가 선생님이나 어른들은 주전자에 물을 떠다가 멀리서 봐도 잘 보이도록 그리는데, 여기서는 노란 바닥에 흰 페인트나 녹색 페인트로 눈에 잘 띄게 그려 놓았습니다. 우리는 땅에다가 아무리 잘 그려도 삐뚤빼뚤한데, 여기서는 어떻게 그렸는지 자를 대고 칼로 오려낸 것처럼 똑바로 그렸습니다. 우리는 놀이가 끝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 운동장이 되는데, 여기서는 핸드볼코트로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 한 가지, 우리는 한번 그리면 한 가지 놀이를 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금이 여러 색깔로 그려져 핸드볼 배구 농구를 할 때 해당되는 금을 잘 보아야 하는군요. 역시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이 있고, 나쁜 것이 있으면 좋은 것도 있게 마련인 모양입니다.
여자 핸드볼 결승 경기가 열리고 있습니다. 당차게 생긴 여자 선수들이 여기저기서 기합을 넣어 가면서 두 손으로 공을 받고 한손으로 잘도 던집니다. 슛을 할 때는 땅에서 훌쩍 뛰어 올라 강하게도 던집니다. 던지고는 땅바닥에 대책없이 떨어졌습니다. 던지는데 온 힘을 쏟다 보니까, 던지고 나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골인을 시키기는 것이 목표이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넘어지든 말든 나중은 생각지도 않고, 온 몸을 집중하는 것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슛을 한 후에는 금을 넘어가도 상관없고, 넘어져도 괜찮습니다. 어떤 선수는 상대 선수들 사이를 틈타 서서도 슛을 던졌습니다. 어디든지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 가리지 않고 슛을 쏘았습니다. 핸드볼의 슛은 공을 땅에 튕겨서도 잘 했습니다. 이번에는 슛을 막는 다고 팔짝 뛰었는데, 그 뛴 자리 바닥에 공을 튀겨 공이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골키퍼가 약이 올라 울상입니다. 경기는 공을 가지고 하는 것이지만, 실제 경기는 골키퍼와 공을 넣는 선수 간에 보이지 않는 머리싸움 같습니다. 골대 뒤에서 어른들 다리사이에 쪼그려 앉아 보기에는 골키퍼가 가장 잘 보입니다.
핸드볼 선수 중에 남천에서 온 아이가 하나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실 그래서 내가 누나에게 핸드볼 구경을 가자고 한 것입니다.
“성철이 딸은 학교에서 핸드볼 선수가 되었다네.”
하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동네 가운데 마을방송을 하는 스피카를 세워둔 동산이 있습니다. 이 스피카에서 언제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하는 말도 들렸고, 또 언제는 '반공 방첩'을 외치기도 했습니다. 간첩이 넘어와 '공산당이 싫어요'하고 외친 이승복을 죽이고 가족을 죽이는 간첩이야 막아야 한다지만, 뭐가 어째서 생전 보지도 알지도 못한 사람들이 와서 '못 살겠다'고, '갈아보자'고 소리를 치는지, 당시에는 알송달송한 방송을 하던 그 자리에 집이 있었습니다. 겨울만 되면 연을 날리러 가는 마을 가운데 우뚝한 곳입니다. 이 동산 바로 옆에 집이 한 채 있었습니다. 영애네 집입니다. 영애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영애네는 단양으로 이사를 나왔는데, 그 후로 그 집은 허물어져서 뽕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영애가 저 운동선수 중에 하나랍니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영애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머리를 뒤로 질끈 동여맨 선수들 중에, 코가 오똑하고 예쁜 영애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영애는 내 마음 속에는 분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영애네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똑바로 난 도리지밭 가운데 길을 지나야 했습니다. 흰색이나 보라색 별처럼 생긴 도라지꽃에는 벌이 한두 마리는 늘 윙윙 날아다녔습니다. 도라지밭 가장자리에는 호박꽃도 피었는데, 호박꽃에는 내 엄지손가락보다도 굵고 둥그렇게 생긴 검은 왕벌도 더러 들어갔습니다. 호박꽃에 자주 간다고 호박벌이라고 불렀습니다. 호박벌이 노란 꽃에 들어가서 꿀을 빠는 사이 네 갈래로 난 꽃잎을 얼른 모으면 벌을 잡을 수도 있었습니다. 꽃 채 따서 귀에 대보면 갇힌 벌이 나오려고 날개짓을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꽃잎을 벌려 벌을 놓아 주면 노란 호박꽃가루를 뒤집어쓴 벌이 '살았구나' 하고 도망치듯 날아갔습니다. 그 안쪽에 영애네 집이 있었습니다. 나보다 한 살 적은 영애는 참 예뻤습니다.
영애네 집 마루는 디딤돌을 딛고 올라가야 할 만큼 높았습니다. 높은 마루 밑에는 큰 개가 한 마리 살았습니다. 굵은 줄로 매어놓기는 했지만, 마당 앞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고는 맹렬하게 짖었습니다. 매어 놓은 줄이 굵어도 팽팽하게 당겨진 것을 보면 금방이라도 끊어져 내게 덤벼들 것 같았습니다. 영애는 오빠가 둘이 있었는데, 웃으면서 놀러온 나를 반겨 들어가라고 해도, 내가 무서워하는 개를 어떻게 조용히 시킬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괜 찮으니 어서 마루로 올라가라고만 했습니다. 도라지꽃밭을 지나던 기분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호박벌을 잡고 놀던 즐거움은 개짖는 소리에 날아가버렸습니다. 내 다리만큼 굵은 다리를 가진 개가 댓돌위에 발을 딛는 순간 물고 마루 밑으로 날 끌어갈 것 같았습니다. 댓돌을 딛지도 못하고 신발을 날려 보내듯 벗어버리고 마루로 올라 뛰었습니다. 올라가고 보니 살기는 살았는데, 다시 집에 갈 일이 걱정이었습니다. 그런 무서운 개를 왜 집에서 키우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집에 또 가야하는 것은 영애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릴 때 보았던 영애가 저기 어디서 뛴다는데, 찾아보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봅니다. 아련한 추억만 되새기면서 누나의 손을 잡고 정류장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 땅에는 그렇게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양식도 안 나오고 돈도 안 되는 체육도 만만히 볼 것이 아니라 값진 것이라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람이 많아 차를 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일찌감치 버스에 올라타고 봐야 합니다.
장정에서 버스를 내려 남천으로 올라가는 동안 뒤돌아 내려다본 하늘은 오늘따라 더 넓어 보입니다. 덕촌 산 너머의 하늘이 희미해 보입니다. 산자락이 한겹한겹 갈무리하듯 장정을 올라오는 길을, 거꾸로 한겹한겹 펼치듯 마음속으로 다시 단양까지 나가 보았습니다. 몸은 피곤하지만 남천 비탈을 오르는 발걸음은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힘차게 뛰는 핸드볼 선수 중에 가장 콧날이 오똑한 아이가 영애일 것이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