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 화요일이면 벌써 한국에서의 한 달을 마치고 벨기에로 출국하는 날이다. 뭐 대단히 한 것 도 없는데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멀미가 날 지경이다. 이번주 금요일에 큰딸의 인턴쉽이 끝나는 시점에, 한국에 같이 나온 세 아이들과 엄마 아빠와 잠시라도 다 함께 가족 여행의 추억을 남겨야지.
- 우리 다 같이 여행 가자.
- 와!!!! 산에 가요. 나는 한국에 산이 너무 좋아!!!! 남해 동해 다 둘러봤으니 이제 진짜 산에 가요~!
- 혜린이는 계곡에 가고 싶댔는데.
운동 좋아하는 셋째는 한국의 높은 산 꼭대기 올라가는 것이 꿈이다. 벨기에는 노년 지형의 평지라 펑퍼짐한 언덕 정도인 우리 동네를 산 (Mons)이라고 부를 정도니 말 다했지. 지리산처럼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아니 끝에 가면 다시 그다음 더 높은 꼭대기가 새록새록 보이는 지리지리 한 큰 산을 올라가 보지 않아서 제대로 된 등산의 쓴맛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리라.
- 나는 물놀이 또 하고 싶어요.
막내 다린이는 그저 첨벙거리면 신난다.
- 아빠 엄마는 어디 가고 싶으세요?
- 너희들 가고 싶은데 어디나 좋아.
말은 그렇게 해도, 노인용 보행기를 밀고 다니는 엄마 한테 등산은 택도 없다. 어디든 차 타고 같이 가서 숙소에서 기다리시겠다 그것이다.
- 그럼, 우리 설악산 가요.
- 우와~~ 좋아요!!
- 설악산 입구에서 백담사 가는 셔틀버스를 타고 백담사까지 가서 혜린이가 좋아하는 계곡에서 놀겠습니다.
2008년에 벨기에 주재 유럽법인을 설립하러 왔던 모기업 재무팀 이사와 2주 전에 한남동에서만났는데, 같이 식사할 때 데리고 간 수린이 다린이를 너무 예뻐해 주었다. 다음날 아침, 아이들을 위해 <자녀들의 행복을 위한 추천코스>를 카톡으로 보내왔다.
1. 홍천에 있는 오션월드
2. 설악산 백담사
- 백담사 입구 황태집 아침식사
- 셔틀버스로 백담사 도착
- 백담사 앞 계곡놀이
- 백담사에서 영지암까지 왕복
주일 예배를 절대 빠질 수 없다는 부모님. 이제 출국일을 앞두고 함께할 수 있는 남은 날짜가 없어서 오션월드는 수원에서 훨씬 가까운 캐리비안베이로 대체했다. 그것도 지난주에 혜린이 빼고 미리 다녀왔다. 맘먹고 등산을 하겠다는 수린이도 설악산을 간다는 말만으로도 벌써 정상 왕복을 하고 온 듯 뿌듯한 얼굴이다. 걷기 힘든 우리 엄마를 태우고 날아다니는 양탄자 택인 셔틀버스가 설악산 중턱으로 훅 들어가는 것을 생각만 해도 나는 행복하다.
우리 부모님은 내 말을 참 잘 듣는다. 중고등학교 시절, 엄마 아빠가 티격태격 부부 싸움을 할 때도 내가 종종 중재를 했었는데, 이제는 내년이면 50이 되는 내가 영락없는 보호자로 느껴지는지 거의 판사의 결정을 기다리는 듯 내 의견을 기다린다.
우리 아이들은 내 말을 참 잘 듣는다. 첫째 대학원생, 둘째 대학생, 셋째 고등학생, 넷째 초등학생 이렇게 확 퍼진 나이대의 아이들의 이견 조정을 하다 보면, 나는 어느덧 그 각각의 나이대로 돌아가 다시 어려진 삶을 살게 된다. 누울 언덕을 보고는 엉덩이를 내려놓는다고, 옆을 한번 싸악 둘러보고는 자기가 원하는 것으로 고집하면 답이 없을 것 같아, 타협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못이기는 척 체념해 주는 네 아이들이 고맙기만 하다.
내 윗대가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든든한 우산인가. 우리 아랫대의 모든 성취와 재롱, 실패에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모습까지 사랑의 눈으로 바라봐 주는 최고의 관객이 있음에 신나서 우리는 기쁨조의 역할에 더 충실하다.
내 아랫 대가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매 일상의 삶에 펼쳐진 많은 선택 중에서 크던 작던 가능한 범위 내에 가장 좋은 결정을 하려고 노력하는 이 아이들을 볼 때, 내가 세상에 없어지더라도 힘차게 꿋꿋이 잘 살아갈 좋은 어른이 될 이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위아래에 끼어서 빼도 박도 못하는 중간에 꽉 끼어 샌드위치로 사는 삶의 무게는, 여러 시간대의 사는 맛을 동시에 음미하는 특권이자 대가인 모양이다.
백담사로 가는 셔틀버스는 진정으로 최고였다. 삼대가 함께 푸른 설악산을 아이맥스로 롤러코스터 타듯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 왼편의 길은 완전 낭떠러지의 절벽으로 맨 아래 맑디 맑은 계곡물이 보이고, 높고 푸르른 산 등성이는 깊고 울창하기로 유명한 탄자니아의 정글 숲보다 못할 것이 없다.
백담사에 도착해 깊은 산속 아름답게 자리 잡은 사찰들 사이에서 평화로이 거닐고, 만해 한용운의 시 <나룻배와 행인>과 심우도 벽화를 아이들에게 읽어주며 간단히 설명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맑은 계곡물에서 한참 놀고있는 동안, 첨벙거리는 물보다, 나와 세 아이들을 향해 카메라 세례를 퍼붓는 파파라치의 사랑 가득한 시선에 흠뻑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