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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모 Aug 05. 2023

큰 그림의 유혹

초등학교시절, 운동회날은 내게 그리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운동회날 엄마가 김밥을 싸주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김밥은 커녕 어제 하루에도 많은 외부 일정을 소화하고 늦게 들어온 엄마는 벌써 새벽같이 출근해서 얼굴도 못 보고, 다른 날이랑 똑같이 밥하고 멸치반찬 등이 들어있는 도시락 두 개가 주방 테이블 위에 준비되어 있다. 하나는 북중학교 2학년 오빠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연무 초등학교 6학년인 내 것이다.

        

체육복을 입고 학교로 향한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죽은 아버지를 기리며 지은 수원화성의 동문 바로 앞에 위치한 연무초등학교는 보훈원을 지나 시내버스 종점 근처에 있는 우리 집에서 어린이 걸음으로 30분 정도 거리다. 매일 걷는 같은 길이기에 이제는 너무 익숙한 나머지 가방을 메고 도시락가방 신발주머니를 손에 들면, 레일 위에 정해진 구간을 수시 운영하는 셔틀전차처럼 두 다리가 자동으로 움직인다. 내 머릿속에는 온통 오늘 하는 매스게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한 달여 전부터 각 반마다 따로 체육시간에 동작을 연습했다. 지난주부터 6학년 전체학급이 모여 운동장에서 세 번 맞춰봤다. 어제 한 총연습에서는 이전에 없던 색깔이 들어간 넓은 리본 소품도 추가가 돼었는데, 오늘은 연습 없이 운동회의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는 공연만 남아있다.

        

6학년은 1반부터 12반까지 있고 한 반에 60여 명 정도가 되는데, 각 반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거의 한 학급의 반을 차지하는 남학생들은 단체 태권도 시범으로 아예 프로그램이 다르다. 운동장을 꽉 채운 360명이 넘는 여학생들이 음악에 맞춰 여러 가지 도형모양의 변화를 주며 단체 무용을 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궁금하다.

        

큰 그림이 보고 싶은데.. 어제 총연습 때 소품을 나누어 주느라 각 반 담임선생님들이 옆에 딱 와 있으니 잠깐이라도 내 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

        

내 양 옆에 있는 친구들과 앞 뒤에 있는 친구들을 한 번씩 쓱 둘러본다. 한 달 전, 매스게임 부분 연습을 시작할 때부터 키가 들쭐날쭉 하면 보기 싫다고 선생님이 키순으로 줄을 세워 자리배정을 했기 때문에, 거의 나와 같은 키, 같은 체육복 착용, 다들 비슷한 체구를 가졌다. 멀리서 보면 이미지로 보이지만 가까이 볼 때 그림은 안 보이고 까만 점들과 그의 간격들만 보였던 옛날신문의 흑백사진을 떠올린다.  

        

운동장을 에워싼 8단 정도 되는 스타디움에 학교의 전 학생들이 반별로 앉아 해당 학년의 순서를 기다리며 다른 학년의 무대를 감상하고 있다. 1학년 병아리의 동요와 율동부터 6학년 남학생들의 태권도 시범이 마치는 순간까지, 나는 내 자리에 남아서 점을 채울 것인가, 아니면 내 자리를 비우고 학교 옥상으로 올라가 큰 그림을 볼 것인가를 고민했다.

        

동학년 남학생들의 태권도 시범의 마지막 자세와 동시에 이얏!!! 하는 함성이 운동장 가득 울려 퍼지고, 곧바로 이 학생들이 각반에 배정된 스타디움 자리로 뛰어 돌아가는 순간 나는 결정했다. 바로 지금이다.

        

가볍게 일어나 학교 본관 건물로 들어와 층계를 올라간다. 다음 순서인 6학년 여학생들의 매스게임 전주 음악이 벌써 운동장에 울려 퍼진다. 한 장면이라도 놓칠까 봐 내 마음이 더 급해졌다. 층계를 두 칸씩 뛰어 올라가서 옥상문을 열어 운동장이 아이맥스로 보이는 중앙에 자리를 잡고 내려다본다.

        

무슨 대극장의 조명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일부러 날린 연기처럼, 학생들이 달려오며 입장할 때의 흙먼지가 비장하다. 원이 커졌다 작아졌다 겹쳤다 사각형이 돼었다가 옆반 사각형에 흡수되고 다시 모양을 만들어 내는 모습. 전체가 4 분할되었다가 모두 하나의 그림으로 만들어 내는 모습. 그 많은 채움과 비움, 움직임 속에 사라지지 않는 빈 점이 딱 하나 보이는데, 바로 내가 없는 자리다. 순간 내 옆에 있는 친구들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이 군무를 제대로 감상하는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네? 많은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함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만든 작품인데, 그 누군가는 이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아주어야 할 것 아닌가. 제일 중앙에서 관람하시는 교장선생님도, 그깟 저 밑에 있는 단상에서 봐가지고는 이 맛을 모르실 텐데. 참 안타깝다.

        

매스게임의 마지막 동작이 끝나자마자 나는 옥상에서 바로 뛰어내려왔고, 다른 친구들이 각 반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을 때 나도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담임선생님한테 엄청 혼날 각오를 하고 빠져나간 것이었는데, 선생님은 내가 없어진 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옆 친구들은 나를 보며 물었다.


-   , 지혜! 너 어디 갔었어?

-   ……….. 화장실.

      

이 친구들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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