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신방과 여름방학에는 마치 군대 가는 남학생들 썰물 빠지듯 우리 과 학생들의 거의 대부분이 영어권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정원이 63명이었는데 60명이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씩 미국, 영국, 호주에 다녀오고, 집안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필리핀으로라도 떠났다.
늦게 목회를 시작하시고, 집을 팔아서 작은 개척교회를 설립하여 교회 뒷방에서 살았던 우리 형편에 어학연수는 꿈같은 얘기라 말을 꺼낼 필요조차 없다. 외대 영어과를 졸업한 아빠는 영어를 하긴 하는데, 발음이 영 콩글리쉬. 아빠에게 영어를 어떻게 공부하면 좋겠냐고 물었을 때, “무조건 소리 내서 읽고 다 외워”라고 간단히 설명했다.
여름방학이 끝나면 어학연수를 다녀온 다른 학생들이 연수시절 얘기를 하면서 지명이나 특정단어를 영어로 발음할 때 원어민처럼 말하는 것이 너무 부러웠다. 나도 어떻게든 비행기를 한번 타 보리라 결심하고 영어 수학 과외를 늘리며 돈을 벌었다. AFKN 미군 방송을 틀어 놓고 틈틈이 듣고, 학과에서 사용 중인 원서를 이해가 되든 않든 소리 내서 최대한 혀를 굴려 읽었다.
2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이 다가올 때 엄마에게 과외해서 모은돈 80만 원을 건네어드리며 한국에서 제일 싼 요금으로 갈 수 있는 미국 LA에 보내달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며칠 잠잠하시던 엄마가 갑자기 나보고 뉴욕에 한 달간 다녀오는 것이 좋겠다고 하신다. 뉴욕은 한국에서 가기에 LA보다 훨씬 멀어서 비행기값이 훨씬 비싼데…
“비행기만 타고 가면 뭘 할 건데?” 도착을 한 그다음을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엄마의 마음에 드는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엄마는 전쟁통에 태어난 네 살 아래 친동생의 옛 한국전력 동료, 홍봉표 아저씨에게 연락을 했다. 삼촌은 몇 년 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홍봉표 아저씨는 삼촌의 친한 친구였고, 엄마가 참한 직장 후배를 결혼 대상 후보로 소개해 주기도 했다. 지금은 다른 분과 결혼해서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가 있단다.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하던 날, 까다로운 입국심사를 거쳐 도착장에서 나를 기다리는 홍봉표 아저씨를 만났다. 키가 나보다 5센티는 작아 보이는 체구인 아저씨는 Hong Fish라는 회사를 만들어 뉴욕 일대의 한국 음식점과 특급 호텔의 신선회용 생선을 납품하며 한국 및 아시아 음식재료 도매를 크게 하시는 분이다. 나보고 이제부터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한다.
다음날, 새벽 4시에 열리는 맨해튼 생선시장에 따라갔는데, 홍봉표 아저씨(이후 삼촌)는 2미터 이상되는 참치와 이름도 모르겠는 여러 생선과 해물을 손가락으로 척척 가리키고 난 다음 “이제 다 됐다. 커피 마시러 가자” 라고 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큰 종이컵에 커피를 두 잔을 가지고 와 그중 하나를 나에게 내민다. 그때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는 한국 공장 근로자 행색의 키 큰 청년이 다가와 말을 건다.
- 오늘 뭐해요?
- 별 예정된 것은 없는데요..
- 그럼 내가 뉴욕 구경시켜 줄게요. 오전 10시에 집으로 데리러 갈 테니 준비하고 있어요.
- 아네, 감사합니다.
새벽시장에서 빠져나와 삼촌과 나는 차를 타고 Hong Fish 창고에 갔다. 크디큰 냉장실에 벌써 아까 손가락으로 척척 가리키기만 했던 그 거대한 생선들이 어느새 도착해 있다. 만족스럽다는 아주 엷은 미소도 잠시. 확인이 되었으니 이제 집에 가자고 하신다. 뉴저지에 있는 집으로 돌아오니 9시 30분. 간단히 숙모(삼촌의 아내이니)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고 나니 10시다.
길고 넓적한 무스탱 모델의 차가 집 앞에 주차를 하고 있다. 젊은 모델 같은 남자가 노란색 폴로셔츠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었는데 뭐 재벌 아들 같은 포스다. 짧은 머리에 젤까지 발라 넘겼으니, 지금으로 생각하면 킹더랜드에 나오는 이준호만큼 자신감 있는 모습인데 이 사람은 누굴까?
- 준비 됐어요?
- 아……. 네? 네!!
- 나를 못 알아봐요? 새벽에 봤는데.
- 차림이 너무 다르셔서……
- 아까는 일하는 복장이고. 지금은 다르지.
이런, 나는 아까랑 똑같이 청바지에 티셔츠에 코트를 입고 있는데, 갑자기 이분한테 미안해지네. 이 사람은 아까 후드티로 머리도 덮고 공사장 막노동 겨울작업복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내 앞에 황태자가 골프 치러 갈 복장으로 갈아입었으니 내가 바로 알아볼 리가.
- 여기서 차림세가 허술하면 아시아인을 더 무시해요. 일할 땐 험한 일을 해도, 즐길 땐 또 확실히 즐겨야죠.
뉴욕에 한 달 있는 동안 첫 2주는 삼촌이 소개해 준 브롱스의 Hall Mark매장에서 밸런타인데이 특별기간 중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는 관광비자로 갔기 때문에 일을 하면 안 되었는데, 밸런타인 기간에 카드와 초콜릿, 선물상품들을 파는 넓은 매장에 손님들이 빼곡하게 들어와, 이참에 도둑질을 하는 경우가 많아 이를 방지하도록 군데군데 여러 사람이 감시해야 했다. 내가 매장 내 스텝임을 알아보고, 눈이 잘 안 보이는 나이 드신 손님들이나, 영어를 못 읽는 히스패닉 계열의 손님들이 카드 내용을 읽어 달라고 하기도 했다.
순간, 입구 쪽에 까만 차림의 경찰들이 대여섯 명 들어오고 있다. 나의 심장박동수는 점점 빨라지고 얼굴이 달아오르며 이마와 목덜미에 후끈하게 땀이 배고 있다. ‘큰일 났다. 관광비자로 온 나를 혹시 불법노동한다고 잡으러 온 것인가?’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을 해야 하는데 경직된 얼굴이 펴지질 않는다. 점점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 넓은 매장 입구 쪽에서 점점 안쪽으로 들어오는 경찰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들은 중간 선반들의 감사 인사카드, 가족용 카드, 친구용 카드를 열어 내용을 읽으며 카드를 고르고 있었다. 미리 받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듯 환한 얼굴로 웃음 짓고 다른 동료들과 여담을 나누며 줄 서서 계산을 마치고 나간 후에야, 나는 철렁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름 내 영어가 통한다는 자신감을 가져다줬을 뿐 아니라 용돈까지 벌게 해 준 기분 좋은 2주를 보내고, 남은 2주 동안에 코넬대도 방문하고, 나 혼자 맨해튼에 가서 CBS방송국에서 David Letterman show 관람도 하고, 브로드웨이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도 보고, 나름 재미있게 보내던 중이었다.
맨해튼에서 뉴저지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42번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한 할머니를 만났다. 이 할머니는 지나가다 눈이 마주쳐 웃으며 인사하는 나에게 오늘의 얘기 상대를 만났다 하는 얼굴로 인생을 털어놓으신다.
자신의 아들 딸은 미국에 있으나 너무 멀리 살아 자신은 수십 년째 혼자 살고 있고 86세시란다. 매주 목요일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발레를 보러 가는 날이라고 행복해하신다. 자신의 목적지에 다 와서 “안녕~ 잘 가라” 하고 극장으로 천천히 들어가는 모습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당시, 전쟁미망인으로 홀로 생계를 책임지며 아이들을 키우던 우리네 할머니들을 생각해 본다. 80이 훌쩍 넘어서도, 정기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장르를 찾아 즐기는 여유가 있는 삶?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 생존에 급급했던 할머니세대, 재건이라는 공동과제를 끌어안고 열심히는 살지만 남편을 위해, 자식을 위해 오직 뒷바라지로 희생해야 했던 우리 엄마세대. 그때까지 한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엄마로 할머니로 살아온 그 어떤 누구에게도 나는 이러한 삶의 여유로운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다른 삶을 원한다. 아직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드디어 깨달아 알아냈을 때, 내가 주저하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준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