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린모 Aug 04. 2023

진학의 기로에서

신문방송학과는 애초에 내가 하고 싶어 선택을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음악을 하고 싶었다. 피아노 전공을 할 만한 클래식 레퍼토리를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거리에서 음악을 들으면 피아노로 멜로디와 반주를 함께 칠 수 있었다. 지금생각하면 실용음악과가 내게 딱이었을 것 같은데, 그땐 실용음악과가 드물었는지 전무했는지 나의 정보력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었다. 친하게 지내던 교회오빠, 꽃미남 이신희가 나보고 ‘너 같은 애가 작곡을 해야 돼’라고 한다. 이 길이 내 길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뜬금없이 작곡과를 가겠다고 하는 나를 두고 엄마는 ‘그래, 뭐든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해봐’라고 하셨다. 예체능을 시키려면 웬만한 부잣집이 아니면 택도 없는데. 늦게라도 목사가 되겠다고 덜컥 공무원 사표 내고 총신대학원의 졸업반에 재학 중인 아빠, 연세대 경제학과 1학년인 오빠, 이미 학자금 뒷바라지로 허리가 휘는 엄마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선언이다.

        

이후 엄마는 벌써부터 마이너스인 가정 형편에 단기 대출을 받아, 작곡과 입시에 필요한 시창, 청음, 피아노, 화성학, 대위법, 작곡 개인레슨비를 댔다. 나는 서울대 작곡과 두 번의 입시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다. 첫 입시에서 떨어질 때는, 평생 하고 싶은 음악을 위해서 1년의 시간을 내게 주노라고 엄마도 나도 이견이 없었다.

        

두 번째 입시를 치르기 두 달 전, 연대 3학년에 재학 중이며 과외선생, 운전학원 강사, 아빠가 개척한 교회에서 청년회장, 성가대원, 유년부 교사, 운전기사로 봉사하던 오빠가 돌연사로 죽었다. 같이 영화 보고, 밥 먹고, 디저트로 감도 나누어 먹고, 잘 자다가 심장마비라니. 오빠가 아빠의 등에 업혀 엄마와 병원으로 갔을 때, 혼자 집에 남은 나는 이제껏 해본 적이 없는 통곡과 절규의 기도를 했다.


심폐소생술의 노력으로도, 피눈물의 기도로도 안 되는 것이 있다. 오빠를 천국으로 보내고 남아있는 우리 가족에게는 사람으로서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별 의미가 없어졌다. 아들도 보내고 사는데….. 오빠가 없는 세상에 사는데…..

        

작곡과 두 번째 입시에 실패를 하고는, 내 인생에 오기나 근성은커녕 그저 냇물에 떠내려가는 나뭇잎 정도로 두 손 두 발에 힘이 없던 나는, 당시 수시- 정시- 후기로 나뉘어 학생을 받았던 이화여대에 지원을 하기로 했다. 영문과 아니면 신문방송학과? 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늦게 졸업한 아빠가, ‘영어는 무슨 공부를 하더라도 하게 되니까 다른 분야의 전공을 하는 것이 낫다’고 해 신문방송학과를 지원했고, 손에 꼽히는 적은 후기 티오에 합격했다.

        

입학 후 두 해는 신방과에 들어온 것을 많이 후회했다. 복작거리는 인간의 삶에서 진정 중요한 뉴스가 있을까? 어제의 뉴스가 오늘 까맣게 잊히고,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안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되는, 무개념 무가치 이더라도 핫이슈를 찾아야 하는 직업의 성은 내게 마치 땅바닥에 붙어 배를 뭉기는 지렁이처럼 보였다. 그래서, 전공수업은 가서 앉아만 있고, 선택수업으로 듣는 철학, 물리학, 국악, 미학등 ‘영원한 가치’를 찾는 수업에 큰 감동과 위로를 받았다.

        

2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에 어학연수 대신 뉴욕생활 한 달을 하고 나서, 다른 세상으로 나가려면 영어를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MBC 기자출신으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얼마 전 들어오신 이재경 선생님의 수업은 리포트 과제물이 꽤 많았다.


어차피 영어 원서를 보면서 써야 하는 과제물인 데다가, 영어 글쓰기 경험이 전혀 없던 나는, 읽던 쓰던 영어로 생각하고 응용하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리포트를 전부 영어로 써내겠다고 수업 끝나고 나갈 준비를 하는 선생님 앞에 서서 다짜고짜 일방적인 선언을 해 버린다. 물론, 일주일 후 첫 과제물을 내야 하는 시점에 벌써 ‘내가 왜 그랬지 ㅠㅠ’ 후회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문장이 초등학교 수준이라도 할 수 없다. 나는 꾸준히 영어로 썼고 점수는 당연히 좋지 않았다.

        

3학년 2학기, 신방과 취재와 보도의 연습 수업 중 4주간, 학생들은 방송사, 신문사, 통신사, 홍보회사 등에 한 달간 인턴쉽에 기회를 갖는다. 나는 SBS 한선교의 좋은 아침, 이후 한선교의 모닝와이드로 개명된 프로그램으로 갔다. 한선교를 비롯한 고정 출연진, 분야별 리포터들, 연출, 조연출, 3명의 구성작가, 카메라, 음향, 조명, 자막 등등 총 스탭 수가 20명에 가깝다. 아이템을 정하는 회의, 생방송, 녹화, 심지어는 회식때까지, 역할에 따른 층층시하 위계질서가 한눈에 보일 뿐 아니라, 젊고 아름다운 여성 리포터들이 상대적으로 오래가는 남자 진행자들에 비해 언제 급히 교체될지 몰라 전전긍긍해하는 모습, 시시 때때로 바뀌는 상황 및 내용 탓에 막판에 밤새워 글 쓰느라 피곤에 항상 절어 있는 전원 여성인 구성작가들을 보며 ‘아, 여긴 내가 있을 물이 아니구나’ 싶다.

        

영어 글쓰기는 조금씩 향상되고, 영어 뉴스를 받아쓰며 듣는 공부를 하다 보니 훨씬 편하게 들리게 된 4학년 1학기 무렵, 여름방학 때 보내지는 졸업 전 마지막 인턴쉽 준비가 한창이다. 3학년 때 첫 인턴쉽 이후, 많은 학생들이 외신을 선호한다. 일단 외신에서는, 기자 초년생이 되어도 동대문 경찰서에서 사건사고 담당 기자로 몇 년간 밤새울 걱정이 없고, 위계질서 남성우위 등의 직장 문화가 비교적 적거나 없기 때문이다. 통신사인 로이터와 블룸버그를 제외하면 해외 방송 티오는 CNN이 유일하다. 워싱턴 포스트, LA 타임스 등은 1인 기자로 미국에서 직접 특파원을 보내기 때문에 인턴을 받을 여력이 없다. 우리 과에서 어학연수를 다녀오지 않은 학생은 나를 포함해 딱 세명. 95%어학연수를 다녀와 영어에 능통하니, 나는 외신에 갈 꿈도 못 꾼다.

        

4학년 여름방학 동안의 인턴쉽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이다. 수업시간에 취재와 보도 과목을 담당하셨던 이재경 선생님이 한 사람씩 이름과 언론사를 말씀하신다. *** MBC, *** SBS, *** KBS…….. (중략) *** 로이터, 홍지혜 CNN, *** 중앙일보, *** 동아일보, ….

        

믿기지 않게 내가 CNN을 가게 되었다. 이건 뭐지? 이건 왜지? 선생님께 달려가 왜 나를 보내시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졸업을 앞둔 4학년 학생들은 여럿이고, 언론사에도 티오가 한정된 것이니 가고 싶지 않은 대로 보내셨어도 따지지 않고 묵묵히 갔을 것이다. 그러니 기대 이상으로 자격이 부족한 나를 보내주신 이유가 뭐냐고 묻지 않고 묵묵히 가는 것이 맞다.


졸업 후 몇 년 지나, 신문방송학과 석사를 마치고 조교를 하고 있던 친구가 말해주었다. 종종 이재경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이미 졸업한 지 몇 년 된 내 얘기를 하신다고 한다. 영어도 안 되는데 미리 영어로 리포트 쓰겠다고 덜컹 선포해 버리고 그 과정에서 헤매든 점수의 떡을 치던 끝까지 해낸 홍지혜의 ‘무대뽀 정신’을 배워야 한다며.

이전 06화 큰 그림의 유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