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 몰라. 그냥 한번 해보는 거지 뭐.
클릭. 냅다 이력서를 제출했다. 이력서를 제출한 곳은 캐나다 관공서중 하나였다. 사실 몇 달 고민했었다. 나는 쫄보니까 토요미스터리 극장을 볼 때도 열손가락을 얼굴에 대고 덜덜거리면서 봤거든. 난 겁쟁이니까.
월요일이었을 거다. 유난히 날씨가 좋았던,
굶주린 까마귀처럼 매니저가 깍깍 소란스럽다. 아니 저 여자는 기운도 좋아. 아니 오늘은 왜요. 아, 월요일이라서요? 근데 뭐 소리 지른다고 해결되나요? 밥을 산다고 해놓고 지갑을 놓고 나온 사람처럼 직원하나가 안절부절 눈알을 굴리며 성난 고릴라처럼 방방 뛰는 매니저 앞에 서있다.
시계를 본다. 아침 7시 48분. 출근시간은 8시까지였다. 아. 너무 일찍 왔다. 내일부터는 7시 59분에 와야지 아침부터 매니저 깍깍거리는 소리 안 들으려면.
그리고 점심시간이었다.
헤이 유영. 까마귀 아니 매니저가 날 부른다. 이거 이거 이거. 손가락으로 콕콕 집어 일을 시킨다. 수박통만 한 스탠리 컵에 빨대를 쪽쪽거리며.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된다. 그럼 너도 일 좀 하세요. 불만이 목까지 터져 나온다. 아니 무슨 내가 지 뒤치다꺼리해 주려고 캐나다에서 일하는 줄 아나.
강도가 심해졌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들이 불려 갔다. 그녀의 오피스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큰소리가 났다. 더 웃긴 건 매니저와 같은 백인이거나 여기서 태어나서 영어 잘하는 사람들한테는 천사처럼 행동했다. 우엑 짜증이 났다. 그래 여기서 더 이상 못해먹겠다. 사실 취직한 첫날부터 감이 좋지 않았다. 오래 있을 곳은 아니라는 느낌이 출근 첫날부터 강하게 뒤통수를 휘갈겼다.
5년 뒤에 아니 3년 아니 일 년 뒤라도 내가 롤모델 그러니까 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 없었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사실 계속 미루고 있었다. 이력서니 자기소개니 그걸 또 영어로 쓰고 고쳐야 되는데. 집에 가면 육아에 저녁밥에 설거지에 사실. 그냥 그래 몰라 그냥 출근해서 욕먹고 욕하고 다시 출근하고의 반복이었다. 캐나다에 사는 거대 인간 다람쥐가 챗바퀴를 돌리고 있었다.
그날도 시발이니 저 발이니 인생을 탓하고 매니저를 탓하며 퇴근하는 길이었다. 문득 누가 내 뒤통수를 후려 갈기는 듯한 깨달음을 얻었다. 아니 아무것도 안 하면서 뭐가 바뀌길 바라는 거야. 다른 일자리는 알아보지도 않으면서. 내 팔자를 꽈배기처럼 비비 꼰 건 소리 지르는 매니저도 아니었다. 억센 내 팔자도 아니었다. 그건 나였다. 바로 나.
다섯 살 딸을 재우고 이력서를 썼다. 다다다 다다 미친 듯이 키보드를 쳤다. 에라 몰라. 눈을 질끈 감고 이력서를 보냈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메일이 와있었다. 엄마야 미쳤나 봐. 진짜 그게 되나 봐.
그랬다. 이력서를 보냈고 면접을 봤고 취직을 했다. 어머 뭐야. 근데 왜 난 몇 달 동안 생각만 하고 이력서를 보내지 않은 거지? 지팔지꼰 지 팔자를 지가 꼰다. 그게 나였다. 아주 길게 아주 오래 난 내 팔자를 꼬고 있었다.
새 직장에서는 일이 이렇게 쉬어도 되나?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착해도 되나? 그런 생각을 했다. 냉장고에 싹 난 감자가 있었다. 칼로 그 부분만 동그랗게 도려낸 기억이 났다. 뒷담화니 왕따니 수채구멍 머리카락처럼 엉켜있던 지저분한 전 직장을 내 인생에서 도려냈다. 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완벽한 때는 오지 않는다. 완전하지 않아도 준비되지 않아도 그냥 하는 사람만이 길을 연다. 한 번에 되지 않을 수 있다. 생각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고 시도해 보기로 했다. 무언갈 하는 사람만이 길을 연다. 클릭 한 번에 인생이 바뀐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그냥 하자고 맘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