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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 Jan 13. 2024

남편이 어느 날 나에게 놀라운 말을 전했다.

  




'뭔가를 계속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거 같아'


 남편은 여전히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잠시라도 머리속에 다른 생각이 나지 않게 무언가에 빠져 있고 싶다고 했다.

바쁘게 일을 할때나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은 그나마 나은듯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일의 양을 늘리며 최대한  늦게까지 일을 했다. 그리고 시간텀을 바로 이어서  무리하게 사람들과 약속을 잡았다.

나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는 핸드폰을 기사나 영상을 꼭 보면서 말을 했다. 머릿속에 어떠한 시간도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밤이 되면 더 괴로워했다. 쉴 틈 없이 누가 되었던 전화 통화를 하려 했고  쉽게 잠들지 못해 수면제를 먹고 겨우 잠이 들었다.


 밥을 먹다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 때는 내가 어떻게 해줘야 할지 정말 고민이 많이 되었다.  어머님의 부재도, 그리고  할머님 (어머니 투병 중에 돌아가심) 까지. 그의 든든했던 두 큰 나무가  한꺼번에 베어져서  그의 아픔은 배가 되어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나에게 평소에 힘든 내색을 하거나 진짜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잘 뱉지 않는다. 장손이라 그런지 기대기보다는 혼자 해결하는 편이었다.  

와이프 입장에선 서운하기도 했다. 나에게 기대어도 될법한데 내가 자주 감정의 이야기들을 꺼내어 묻거나 대답을 원할 때면 그는 대답을 불편해했다.  때론  나의 반복된 질문과  말들을 귀찮아하기도 하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어떤 날은 대화를 하다가 버럭 화를 내기도 하고 평소에 하지 않은 상처 주는 말들도 가끔씩 하곤 했다.  


결혼생활 6년간(2020년 기준) 특별하게 싸워 본 적이 없었던 우리는  어머님이 아프신 기점부터 조금씩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상황은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어느순간 너무 자주 나에게 화를 내는 것 같아 서운하다고 말했다.

어쩔땐 서로의 입장만 이야기할 때도 있었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려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말다툼을 하고 싸울 수 있지?

마치 내가 그동안 알고 지낸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인듯 보이기도 했다.


'그냥.. 지금은 나를 이해해 줘. 내가 너에 대한 마음이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

기다려줘. 나는 꼭 원래대로 다시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기다려줘.  '


 말다툼이 심해진 무렵에 남편은 나에게 기다려 달라는 말을 건넸다. 부부 사이가 원래 그런 것인가? 그동안의 누적된 서운한 감정이 그의 솔직한 마음앞에 금세 미안한 마음으로 바뀌었다.


‘내가 이해심이 많이 부족했을까. 힘든 사람에게 나는 자꾸 예전의 모습을 바라고만 있네.’

 

내 감정또한 붙들기가 어려웠다. 미안함, 죄책감과 함께 언제 화가 또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남편의 시시각각 변하는 툭툭 튀어나오는 감정들이 많은 시간이 지나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으로 바뀌어야 할텐데..

마주치며  지나가야 할 시간임엔 분명하지만  그 과정이 우리에겐  매우 혹독한 시간이었다.



‘언제 즈음 괜찮아질까?  괜찮아질 수 있겠지.? 이 시간들은 언젠가는 지나가겠지.  그가 마음의 안정을 찾고 마음의 치유의 과정이  언젠가는 지나가고 새로운 살이 돋아 날 거라고 믿고 기다리자.  

 시간이 흘러 나도 겪어내야 할 일이니까.. 나도 그때가 되면 지금의 오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지금은 그냥.. 기다려보자..‘










결혼 5년차에 내집마련.  새집에 이사와서 참 좋았다.



 '유리야, 우리  이사 갈래? '



어느 날 밤,  남편이 갑자기 뜬금없이 말했다.


‘..??????? ‘


몇 년을 기다려 분양받은 아파트에  이사 온게 고작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갑자기 이사를 가자고? 이제야 내 이름으로 된 집이 생겼는데!!!!! 아직 적응도 채 되지 않았는데 !! 왜 이사를 가자고 하는 걸까?  


'싫어! '


나는 단번에 거절의 의사를 내뱉었다. 이사 온 집은 내가 운영하는 미술학원과 5분 거리이기도 하고  나는 남편과는 다르게 내 집마련의 꿈을 20년이나 가지고 살았다.


남편은 서울 토박이에 본인 명의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나처럼 집이 없는 서러움과 내 집마련의 간절함이 크게  없었다. 그러나  나는 20살에 경상도에서  서울로 상경해서 대학시절부터 월세방을 돌아다니며 결혼 전까지  여러 번 이사를 하며 자취 생활의 연속이었다. 하도 이사를 많이 해서 이사라면 정말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꼭 내 집을  가지고 싶었다.

독학으로 부동산 공부를 2년 정도 하며 임장을 다니며 집을  보는 눈을 키웠다. 다행히 부모님이 부동산을 하셔서 주워들은 것들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일찍 부동산에 눈을 뜨긴 했다.

감사하게도 집값이 급동 하기 직전 시절에 집을 사게 되었고 매일 입주 날짜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래서 남편은   내가 얼마나 집에 대한 간절함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도 그동안 이사 온 집에 꽤  만족을 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싫다고 말했다.  


싫다는  의사 전달은 했지만 그를 쓱 한번 보았다.

고개를 푹 떨군채로 금방 울것만 같은 얼굴의 눈빛이었다. 그걸 본 사람이라면 당장 이사를 가야 할 것만 같고  일단 가자!라고 긍정의 대답을 해줘야 할 것만 같이 진심으로 이사를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도대체 왜?  

그때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머님이 기억을 완전히 잃기 직전에 우리 집에서 한 달 조금 넘게 지내셨다. 사실 나는 그 한 달동안 경험한 장면들이  트라우마처럼  가끔 떠오르긴 했다.  

어머님은 거실 한가운데  이불을 펴고 누워계셨고 아버님, 도련님, 동서, 조카까지 온 가족들이 매일 밤을 어머님을 둘러싸서 곁에 앉아 있었다.  뽀삐는 어머님이 아픈 후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 이상함을 느꼈는지 지금과는 다르게  짖지도 않고 그저  어머님 옆에 딱 붙어서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밤새 어머님을 지키려는 듯했다.


낮이든 밤이든 수시로 남편, 아버님, 도련은 한 번씩 어머님 곁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어머님을 받아드리기가 힘이 들었다.

무섭게도 하루가 지나면 신체의  기능 하나가 사라지고 , 또 하루가 지나면 다른 기능이 사라지고.. 며칠 사이로 어머님는 모든 기능을 다 잃어버렸다. 너무 충격적으로 변해가는 어머님의 모습을 고스란히 가족들은  눈앞에서 지켜봤다. 그 장소가 바로 거실이었다.  혹시 그는 그때의 마지막 어머님의 모습이 담긴 집에서 생활하기가 괴로운 것이 아닐까..? 분명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내 입으로 다시 그 기억을 끄집어내기가 사실  그동안 두려웠다.  마음에만 묻어둔 이야기다.


그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장모님, 장인어른 사시는 00에 내려가서 우리도 살까.? '

거기 근처에 가서  집 짓고 살자.  

뽀삐랑 너랑 나랑 셋이서.

그리고 너.. 엄마 아빠가 언제까지 영원할 거라 생각해? 있을 때 잘해야 해.

 우리가 곁에서 같이 지내면서 조금이라도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해. 후회하지 말고

그리고 나 이 집에서 살고 싶지 않기도 하고..  

이젠 쉬면서 마음 비우고 살고 싶어’


'... 00에 가서 살자고? '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보통 사위가 장인 장모 곁으로 가자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은데 그는 참 희한하게도  우리 부모님 옆으로 가자고 말을 한다. 이게 분명 고마운 말인데도 나는 선뜻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오히려 내가 불효녀인가? 란 생각까지 들었다.  


예전에 반 농담 삼아한 말이 있다. 나와 결혼을 결심한 이유가 물론 내가 가 좋아서도 있지만  연애시절 우연히 우리 부모님을 만나 뵙고  따뜻한 인상과 마음에 끌려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며 했다.  

본인이 머릿속에 그려왔던 장인 장모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평소에도 전화도 자주 하고 살가운 사위 노릇을 했다. 아버지와 학창 시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남편은 장인어른과 대화를 좋아하고 삶의 태도를  존경한다고 했다. 가끔 찾아뵈면  두 분이서 목욕탕도 가고  골프도 같이 치고 또 우리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즐겨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몇 번을 엄마와 아빠에게 전화해서 펑펑 운 적이 있다고 전해 들었다.  (나한테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부모님 통해서 들었고 지금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  


정말 oo에 내려가서 살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잠시 마음이 힘들어서 어른들 옆에서 기대고 싶은 의미일까? 당연히 나로 인해 위로를 받긴 하겠지만  나에게서 느끼지 못하는 큰  나무 곁에서  어리광도 부리고  징징 대기고 하는 대상이 필요한 것일까?  그게 우리 부모님이란 건 참 다행이고 고맙기도 했다.

그만큼 그에겐 버틸 수 있는 사람, 힘을 얻는 공간이 서울집이 아닌 우리 부모님이 사는 그곳일지도.


마음이 평온해 진다는 그곳. 아빠와 사위. 그리고 뽀삐.




그 이후로 나에게 여러 번의 설득을 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닌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엄마 아빠가 언제나 한평생 옆에서 기다려 주진 않을 거고 딸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 그리워하는 부모님의 마음도 너무나 안다. 그렇지만 내려가서 사는 것은 당장 쉽게 결정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의 제안에  바로 답을 내리지 못했다.

나는 남편과는 다르게 개인 사업자이지만 주 5일 직장인처럼 출근을 해야 하는 입장이고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으로 지난 몇 년간 5차 시험관을 하고 3번의 유산의 후유증으로 꽤나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들을 보냈다. 많은 지인들의 걱정과 위로로 회복이 되긴 했만 몸 회복 시간도 충분하지 않은 채 바로 일터로 복귀를 해서 몸이 잔고장이 많이 나서 계속 병원을 다니면서 생활을 했으니 지칠 만큼 지쳐 있기도 했다.. 18년간 쉼 없이 일했으니 스스로의 안식년을 가져도 되진 않을까-???


남편의 여러 번의 설득과 이야기 끝에 합의점을 찾기로 했다. 집을 디자인하고 도면을 치고  짓기까지는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 테니 본인이 먼저 부모님 집으로 내려가 있고 주말엔 서울에 와서 지내면서 당분간 주말 부부를 제안했다.

나는 평일보다 주말이 바쁜 직업이라 평일에 쉬는 날 가끔 부모님 댁에 내려오기로 했다. 그동안 나는 운영 시스템을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게끔 만들어 놓고 집이 다 지어지면  몇 개월 동안 내려가 지내기로 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이사 온 새집!  집은 전세를 주고 나가자고 했다. 서울과 지방을 왔다 갔다 할 거라 굳이 큰집이 필요하지 않으니 세를 주고 시내가 아닌 조용한 곳으로 집을 옮기자고 했다.

그 대신 위치는 내가 원하는 곳 어디든지 상관없으니 가고 싶은 곳으로 정하라고 했다. 이왕이면 덜 답답하고 탁 트인 곳이면 좋겠다고  했다.

분명 그는 마음이 여전히 답답했던 것이 맞았다.


나는 정해진 일상에서  변화를 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지만 지금 당장 일어날 일은 아니라 생각하고 긍정의 뉘앙스를 전달하며 이사의 문제를 그렇게 말을 마무리 지었다.


오빠는 나의  오케이가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단 듯이 바로바로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다음 날부터  정말 그는 부모님을 통해 땅을 알아보고 부동산에 집을 내놓았다.

그리고 진짜!! 집을 지을 준비를 시작했다.  


뽀삐야!! 우리 이사 간데!!




이사를 오자마자 이사를 가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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