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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 Dec 22. 2023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모든것이 무너졌다

  모든 일은 갑자기 다가온다





엄마.  이름만 들어도 가슴 한편이 뭉클해지고 눈물이 난다.  

일찍부터 엄마 곁을  떠나서 서울 생활을 하고 결혼 후엔  살기 바쁘단 핑계로 또 자주 못 뵈어 더욱더 엄마라는 존재가 그립기도 하고 애틋하다.  어떤  상황이 되어도 항상 나의 편이 되어 믿고 지지해 주는 엄마.   순간순간 선택의  흔들리는 길 위에서 나를 다시 일어 켜주는 긍정의 힘을 주는 엄마. 늘 자식을 위해 희생을 하는 고마운 엄마의 존재.

 비록 안타깝게도 나는 엄마가 되어 보지 못해서 자식을 낳고 기른 부모의 깊은 마음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지만 (아, 물론 현재는 뽀삐 엄마입니다) 엄마는 감히 설명이 불가능한  위대하고 큰 존재이다.


사랑하는 나의 엄마.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내가 6년간 본 시어머님의 모습은 아낌없이 모두 퍼주기는 곧은 나무였다. 자식을 위해서 매 순간 희생하고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다 내어주시는 그런 분이셨다.

특히 유독 큰 아들인  오빠에게  도련님과 비교될 정도로  더 많은 사랑을 주는 모습으로 기억이 된다.  그리고 오빠는 아들의 다양한 역할을 참 잘 해내는 아들이기도 했다.  딸 같은 아들, 친구 같은 아들. 다정한 남편 같은 아들.  여러 가지 역할을 적재적소에 참 잘하는 효자 아들이었다.


2021년 9월. 어머님은 67세의 젊은 나이로 1년간의 힘든 투병 생활 끝에 희귀병으로 돌아가셨다. 갑작스러운 병의 진단을 받고 한 달 내에 사망한다는 말은 가족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어머님의 병은 원인도 알 수 없고  한국, 외국에서도 모두 치료 방법도 없고  그저 죽음이 빨리 찾아오는  아주 무서운 병이었다.  

오빠는  치료를 해드릴 수 있는 어떠한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허망해했다.  몇만 명 중의 한 명인 확률의 병이 왜 하필 나에게, 우리  엄마에게 생긴  사실이 무척이나 억울하고 분해했다. 얼마 없는 정보와 해외 논문들을 찾으며 그 병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고 , 결과는 역시나 죽음이란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고 더 이상 우리 집에서 모실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요양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2020년 투병 기간이 한참 코로나 기간이라 면회조차도 어려웠고 혹시나 본인이 코로나가 걸려서 어머님의 마지막을 보지 못할까 봐 오빠는 굉장히 불안해하며 조심히 지냈다.

어머님은 아주 빠르게 모든 기능이 점점 사라져 갔고 가족들은 마음이 바빠졌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이 느껴졌다. 의식은 없으셨지만 면회가 주어질 때면 오빠는 가족 중 제일 많이 찾아뵈었다.  눈만 뜨고 의식이 없으신 어머님 귀에 눈물을 쏟아내며 하고 싶은 이야기, 못다 한 이야기를 전했다.


언제가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시간들이 하루하루 흘렀다. 요양병원에 계신 1년 동안 먼 거리는 이동도 하지 않고 매일을 긴장된 시간을 보냈다.  병원에서 전화가 오는 날이 어쩌면 제일 힘든 순간일지도 모르기에.. 그 전화만 제발 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한 달도 버티기 힘들다는 병원 측의 말이 무색하게 세상과의 끊을 놓고 싶어 하지 않으셨는지 아들의 외침을 들으셨는지  1년의 시간을 더 버티다 그해 아주아주 맑은  햇살이 가득한 날. 추석을 며칠 앞두고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님을 보내는 그날은 유난히도 하늘이 맑았다.







아마도 병의 진단을 받았던 순간부터였다 충격으로 인해. 몇 달 동안 오빠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모든 현실을  부정했다.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매일 밤 술을 마시고  맥주캔들은 방안을 뒹굴었다.  방을 치우지도, 씻지도 않고 밥도  거의 먹지도 않았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불은 모두 꺼져 있었고 내 인기척이 느껴져도  오빠는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연신 담배만 피우고 눈도 잘 마주치지 않았다. 집안은 내가 말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루 동안 일어난  나의 일상을 궁금해하며 내가 조잘조잘 말하는 걸 듣는 걸 좋아했지만 더 이상 아무런 물음이 없었다. 나와 마주하며 장난치며 노는 게 제일 재밌다던  오빠의 얼굴은 점점 무표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얼굴은 겁에 질린 눈빛을 한 어린 아이 같았다.

 즐거웠던 일상을 나눌 수도, 장난을 칠수도,  웃는 것도 어떤 것도 선뜻 하기가 어려워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망설이다 어렵게 말을 걸면 싸늘한 반응을 보일 때도 있었고 답을 하지 않을 때도 많았다.    나의 위로의 말들이 하루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큰 의미가 없어졌고  나는 점점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빠는 오빠의 세상속에서 슬픔을 이겨내고 있었고 나는 그 세상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친정 엄마와 전화로 도란도란 수다 떠는 것도 집 밖에서 해결하고 왔다.  오빠 앞에서 엄마와 친한 모습을 보이기가 왠지 모르게 미안했다.

함께 티비를 볼 때면 화면에서 어머님 또래의 분이 나오는 장면일 때는 오빠는 혼잣말로


'저렇게 엄마보다 늙은 사람도 건강히 잘 살고 있는데...'  

짜증 나..‘


점점  마음속에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함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화가 난다고 표현을 했다.

어떤 날은 갑자기 밥을 먹다가 왈칵 눈물을 쏟아내고 기분이 좋았다가 멈칫하며 웃고 있는 본인의 모습을 경멸했다. 또 아무런 것도 해주지 못한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길을 걷다 손을 잡고 나와 다정한 시간을 보내다가도 갑자기 엄마는 의식 없이 누워있는데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고  기분이 확 변화기도 했다.

나와 대화 중 어떤 단어에 꽂히면  어떤 날은 듣기가 싫었는지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해졌고 나는 어떤 포인트에 화가 나는지 좀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왜 화를 내냐고 뭐라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땐 그저  이해하고 받아주며  곁에서 묵묵하게  있어주는 게 나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힘든 시간의 연속인 과정에  장손인 오빠를 가장 사랑해 주었던 또 다른 나무. 할머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다. 그 시절 어른분들은 장손이 제일이며 특히 손주들 중에서 장손인 오빠가 할머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사랑을 어릴 때부터 듬뿍 받고 자란 오빠에겐 두 그루의 오래된 휴식처 같은 나무가 하루 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오빠는 어머님의 장례식을 마음속에 천천히 준비하다 생각조차도  못했던 할머님의 죽음까지 안아야 해서 슬픔과 절망감이 배로 커졌다


 내가 그 마음을 다 헤어릴 수 없었지만 오빠의 뒷모습에선 긴 방황의 시간들이 시작되었다.

마음속엔  슬픔, 우울, 분노, 죄책감, 상실감 등 다양한 감정의 변화가 일렁였다.


트라우마처럼 우리에게 남겨진 죽음을 기다리는 경험, 죽음을 맞이한 후의 경험. 모두 겪어보지 못했기에  둘 다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 같다.


그러는 동안 우리 집은 점점 고요해져 갔고 두 명이지만 꽉 찬 온기로 가득했던 집이 차가운 공기로  점점  채워지기 시작했다.


2019 여름날. 15일간 여행하며 하루종일 수다떨어도  모자랐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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