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에 가기까지 걸린 시간
피부가 녹아내릴 듯 더운 여름날이었다. 태양은 작열하고 아스팔트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계절에도 여전히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목에는 스카프를 두른 채였다. 일을 시작하면서 찾아온 관절 시림 증상은 휴직을 하고도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옆 사람의 들숨이 만드는 공기의 흐름에도 반응했다. 마지막 출근하는 날부터 킨츠기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자기소개 시간에는 휴직 사실은 쏙 빼놓고 반차를 쓰고 왔다는 사실만 말하고 그럼 앞으로도 쭉 수업시간에 반차를 쓰는 거냐는 질문에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평소 같았으면 남들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아는 직업의 세계와는 어떤 점이 다른지, 그 일을 하는 나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보았겠지만 이 시기의 나는 수동공격성이 최대치로 높아져있었으므로 말을 아꼈다. 원치 않아도 입만 열면 날 선 단어들이 툭툭 쏟아지던 시절이었다. 남이 하는 이야기라고 제대로 들렸을 리 없다. 남들의 자기소개 역시 들으나마나 하며 수업 장소로 쓰이는 책방의 도서목록을 눈으로 훑었고 수업내용에도 도통 집중하지 못했다.
내게는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대차게 그릇을 깨는 능력이 있다. 오죽하면 파리의 명품 의류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컵을 깨트렸다. 깨진 형태와 그릇의 종류가 다종 다양해서 깨트릴 때마다 사진으로 찍어 놓기만 했어도 꽤 방대한 기록이 되었으리라. 차라리 빌레로이 앤 보흐의 크리스마스 접시나 로얄 알버트 찻잔을 깨트리는 게 나았을 텐데 깨진 그릇들은 각자의 이야기가 있었다. 프랑스 어느 시골마을의 벼룩시장에서 구한 리모쥬 그릇이나, 지구 반대편 미국의 차고 세일에서 만난 고풍스러운 행남자기는 어디서 다시 구할 수도 없었다. 그릇을 깨트린 역사가 길어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하는 고민도 남들보다는 더 자주 했다. 옻 공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옻을 이용하여 깨진 도자기를 복원하는 기법은 여러 나라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위에 금가루를 뿌려 유명해진 것은 일본이다. 금(金) 자를 앞에 붙여 킨츠기,라고 하는데 금장식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옻으로만 깨진 조각들을 다시 붙여 사용할 수는 없으려나 하고 여기저기 기웃댔다. 수업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수선을 맡기려니 그릇보다 수선비가 더 많이 나올 터였다. 언젠가는 기회가 있겠거니 싶어 반으로 똑 잘라진 리모쥬 그릇을 선반 한 구석에 놓아두었으나 찬장을 열어 볼 때마다 날카롭게 잘린 단면에 마음을 베일 것 같았다.
손으로 하는 일이 대개 그렇듯 그릇을 되살리는 일도 마음 수련에 가깝다. 급한 마음에 옻과 밀가루를 섞은 반죽을 너무 두텁게 올리면 나중에 필요한 부분만 남겨두고 긁어내기가 쉽지 않다. 반죽을 붙인 부분이 자리를 잡기 전까지 적당히 힘을 주어 깨진 그릇이 더 단단하게 붙도록 돕는데, 그때도 너무 잘하려다가는 힘이 과하게 들어가면 각도가 미세하게 틀어진다. 옻은 곧 딱딱하게 굳어버릴 것이라 늑장 부릴 수는 없지만 눈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며 조급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수업을 진행하시는 분은 이런 마음을 알아챈 듯 수선을 의뢰받는 그릇들도 티브이 보면 쉬엄쉬엄 수선한다고 말했다. 몸에 힘을 빼고 한 조각 붙이고 한 숨 돌리는 식으로 슬슬 그릇을 붙여야 한다고. 반죽을 너무 많이 바르거나 깨진 조각들이 서로를 붙잡는 힘이 부족한 경우 옻으로 붙인 부분이 다시 꼭하고 떨어질 때가 있는데 그러면 어차피 다시 해야 하는 일, 천천히 제대로 시간을 들여 마무리하는 게 낫다는 거다. 머리로는 알아도 깨진 그릇의 단면을 손으로 쓸다 보면 그릇이 깨지던 순간으로 돌아갔다. ‘어이구, 네가 그럼 그렇지’하는 타박과 ‘저리 비켜있어!’하는 날카로운 꾸지람은 몇 번이고 반복 재생되어 혼자 있을 때에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나중에는 나를 혼낼 사람이 없어도 내가 나를 힐난했다. ‘내가 그러면 그렇지’, ‘정말 조심성이 없어’, ‘난 이래서 안돼’. 조용한 서점에서 사포로 깨진 그릇의 단면을 갈아내고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빈칸을 옻으로 메우는 중에도 마음은 이 말들로 시끄러웠다.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와 싸우느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데 잘하고 있어요,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하는 연단 칭찬에 불쑥 눈가가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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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마음의 문을 열었을까. 다음 순간 나는 정신과 의원의 접수대 앞에 서있었다. 접수 마감 시간인 네시 반을 이미 넘긴 시각이었지만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줄줄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고는 간호사가 한숨을 쉬며 여기 이름 쓰고 잠깐 기다리세요, 하고 말했다. 지하철에서도 흐르던 눈물은 대기실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있는 동안에도 그칠 줄을 몰랐다. 전에 없이 두려운 마음이 들고 지금이라도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저 문으로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면서 왼쪽에 열려있는 병원의 유리문을 보다가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스스로 물으면서 오른편에 위치한 진료실의 나무무늬 시트지 붙인 문을 바라보았다. 실제로 그냥 되돌아가려고 몇 번이나 엉덩이 근육이 들락 말락 하던 차에 이름이 불렸다. 진료실 역시 따뜻한 나무색으로 꾸며져 있었고 이곳에도 낮은 이인용 소파가 놓여있었다. 창이 커서 환하고 아파트 단지의 조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중년의 남자 의사는 어떻게 오셨어요, 하고 차트에서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보았다. 꽉 막혀있던 성대에서 드문드문 끊긴 음절이 겨우 밖으로 나왔다. “동생이, 성폭행을, 당했어요.” 안경을 끌어올리며 의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언제 있었던 일이지요?”. “2018년 1월 1일이요.” 이후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 앞으로 휴지 산이 쌓였고 홍수처럼 흐르는 눈물 사이로 의사가 하는 질문에 답할 때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팔을 이리저리로 뻗어 단어를 찾던 이미지뿐이다. 나는 3일 치 약봉투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진이 빠져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는 아빠 이후로 내가 동생의 성폭행 피해사실을 고한 두 번째 남성이었고, 지금은 2021년 7월이었다.
3년 7개월 동안 몇 번이나 정신과를 가려고 했다. 우울증은 햇빛을 쬐며 걷거나 긍정적인 사고 회로를 돌리는 것만으로 치료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상담이든 약물치료든 의사의 처방에 따라야 치료를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어떤 병원에 가기에도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누구의 손을 붙잡을 힘도 내게는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숨을 쉬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낮에는 죽은 듯이 일을 하고 밤이면 울면서 일기를 썼다. 해가 지면 눈물이 날 힘은 생겨도 눈물을 닦을 힘은 없어서 볼을 타고 흐른 우울이 턱에서 뚝뚝 떨어져 종이를 적셨다. 내일은 꼭 정신과에 가야지. 진짜로 정신과에 가야지. 더 이상 눈물을 짜낼 힘이 없어지면 침대에 웅크려서 잠에 들었다. 선잠을 자면서 자주 가위와 악몽에 시달렸다. 옆에서 동생이 헉, 하거나 소리를 지르며 깨면 괜찮아, 언니 여기 있어,라고 말하고 동생의 손을 주무르다가 다시 얕은 잠에 들었다. 차가운 새벽에 다시 든 잠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들을 임신과 출산의 용도로 공공재로 삼은 사회에서 사는 꿈이나 네 명의 남성들이 한 명의 여성을 오크 통 위에 올려놓고 차례대로 범하는 꿈을 꾸었다. 그런 날이면 아침에 일어날 때 뒷목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손발에 피가 돌지 않아 흰 천장을 바라보면서 출근시간이 될 때까지 가만히 누워있었다. 그렇게 다짐하던 내일의 해가 떴건만 낮이 되면 나는 바싹 마른 황태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빛도, 공기의 흐름도, 소리도 내게는 너무 과한 자극이었다. 암막 커튼을 치고 있어도 빛 때문에 살갗이 따가웠다. 거실에서 방으로 흘러들어오는 공기가 날카로워 관절이 베이는 것 같았다. 이중창 밖에서 들려오는 도로를 달리는 차들의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재택이 가능한 것이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모르겠다. 랩탑의 전원 버튼을 누르는 것부터가 버거웠으나 출퇴근에 사용할 에너지가 아껴진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일을 했다. 화상회의가 있을 때는 얼굴에 흰 분을 바르고 입술에 빨간 립밤을 아무렇게나 발랐다. 컴퓨터 화면은 상기되어있는 볼 정도는 가려줄 수 있는 화질을 가지고 있었고, 울음 때문에 생긴 코맹맹이 소리는 감기 기운이 떨어질 기미가 없네요, 하면서 넘기면 되었다.
2019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나는 유난히 죽음을 자주 생각했다. 지속적인 자살사고나 구체적인 자살 계획을 세우는 것이 꽤나 위험한 자살 지표라는 것을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과, 스스로를 죽이는 것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행동은 ㅇㅇ과 ㅇㅇ 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죽음을 생각하면 모든 짐을 내려놓은 듯 가뿐하게 느껴졌다. 날짜를 정하지 않았을 뿐, 몇 푼 안 되는 예적금을 동생 앞으로 옮겨두고 세상에서 나의 흔적을 지울 방법을 구체적으로 생각했다. 눈동자에 잠시 빛이 돌면 옷장 정리를 하거나, 더 이상 읽지 않는 책을 골라내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오랫동안 누워있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만 이 모든 고통이 끝날 것이라 생각은 달콤했다. 일에 집중하고 있다가도 불쑥불쑥 한강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나는 점점 더 죽음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누가 봐도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으나 병원에 가려는 발목을 잡은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보험이 걱정이 되었다. 당시의 나는 이렇게 일하다간 삼십 대가 되어 암에 걸려 회사를 조용히 떠나는 동료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암 걸릴 것 같다’는 표현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것을 아는 것과는 별개로 모니터 앞에서 타이핑을 하고 있노라면 정말로 몸 안의 세포가 이 형성되는 것처럼 불쾌한 감각이 느껴졌다.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이성적인 선택이었겠지만 그만두는 것도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다. 내게는 삶이 이미 굴러가고 있는 관성을 멈출 수 있는 힘이 없었으므로 남은 선택지는 암보험에 가입하는 것뿐이었다. 악성이든 양성이든 이 상태로라면 정말로 신생물이 생길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으나 정신과 진료기록이 신규 보험 가입에 미치는 영향을 알 수가 없어 병원에 가는 일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물론 ‘괜찮은’ 보험을 알아볼 에너지도 없었기 때문에 병원을 가는 것도, 보험을 드는 것도 무기한으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는 의료인 면허증이 취소될까 봐 두려웠다. 스스로의 상태를 명확히 사정할 수 없으니 이 우울감이 치료 가능한 수준인지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나에게 맞는 정신과 약을 한 번에 찾는 일은 기적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어차피 병원에 가도 나아지지 않을 거야,라고 되뇌었다. 이렇게 일어나지 않은 부정적인 미래를 단정하는 것 역시 전형적인 우울 증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내게는 맞지 않는 약을 시도할 만큼의 에너지가 없었다. 겨우 힘을 내서 발을 내디뎠는데 그 걸음이 뒤로 밀린다면 벼랑에서 다시는 올라오지 못할 것 같았다. 삶을 끝내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했다고 썼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필요한 진료를 받지 않은 채 방에 눈물이 고이는 동안 사실은 누구보다도 살고 싶다고 울부짖는 중이었다. 암보험을 들고자 하는 이유와 면허를 유지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가정은 삶에 대한 의지 아닌가.
어쩌면 가장 무서운 것은 동생의 성폭행 피해 사실을 인정하는 그 자체였을 것이다. 동생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건으부터 나도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 훼손되었다는 것, 사실은 사는 게 하나도 괜찮지 않고 죽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나 역시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이 기정사실이 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앞에서 말한 이유는 모두 핑계였다. 성폭행 피해 신고와 함께 만나야 하는 해바라기 센터의 상담사, 야간 당직을 서는 산부인과 레지던트, 경찰관, 담당 수사관, 변호사와 판사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내 입으로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남들이 알게 되면 이 일이 진짜가 될까 봐 겁이 났다. 차라리 내가 미쳐버렸고 없는 일을 상상해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혀 위에서 떨어지지 않는 말을 겨우 뱉어내고 렉사프로 5mg을 3일 치 처방받았다. 약을 먹으면 숙취가 있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밥을 먹을 수 없고 자꾸 헛구역질이 났다. 약효 덕분인지 부작용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속이 울렁거리는 동안 죽음에 대한 생각을 피할 수는 있었다. 삼 일 후 울렁거림 증상을 토로하자 렉사프로 5mg을 반 알씩 먹는 것으로 용량을 감량했으나 속이 울렁거리는 부작용은 여전해서 나는 그냥 계속 죽음을 생각하기를 택했다. 그게 속이 울렁거리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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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으로 정신과를 찾은 건 같은 해 12월, 갑작스레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였다. 동생이 두 번째 성폭행 피해를 입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상담을 받고 나서 집에 가는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숨 쉬기가 어렵다고 느꼈다. 주말 동안 총 세 번 이런 증상이 나타났는데 잠을 자다가 깼을 때 가장 극심하게 느껴졌고 과호흡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정신과적 치료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트리거와 빈도에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고 맥박과 호흡 수에도 큰 문제가 없었으나 공기가 희박한 느낌이 들어 누워서 숨을 쉬는 것에만 집중했다. 평일 아침이 되자마자 지난번에 방문했던 정신과를 찾았다. 성폭행이라는 끔찍한 일이 삶을 살면서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충격이었으나, 지난번 진료를 받은 후 4개월 동안 나를 이루는 부분들이 많이 달라졌다. 그 사이 나는 명상원에서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었으며, 칼리 신당에서 마음의 위로를 찾았고, 죽음이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내밀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이 붙었다. 종이봉투에 대고 숨을 쉬어도 돌아오지 않는 가쁜 호흡을 바라보며 나는 얼마 전 잘 맞는 정신과를 찾았다는 오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지금 숨을 쉬는 게 좀 어려운데 혼자 있고 응급실을 갈 정도는 아니라 별 말하지 않더라도 그냥 이렇게 통화만 켜 둬도 될까?” 친구가 화장을 지우고, 잠시 다른 방에서 엄마와 대화를 하고,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려 문을 닫았다 여는 소리와 흥얼거리는 소리를 수화기 너머로 들으며 핸드폰을 내려둔 침대 시트가 아주 뜨거워질 때까지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누워있었다. 다시 숨이 돌아온 후 친구와 직접 건강사정을 해서 메모장에 적었다. 오리엔테이션 있음, 셀프케어 가능함, 자살 사고 없음과 같이 몇 가지 정신과적인 잣대로 스스로의 행동을 평가하면서 알 수 있었다. 이 치료는 성공적일 것이라는 걸. 내게는 이 상황에서 나아지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사가 있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나의 삶을 열심히 살고 있었다.
동생에게 첫 번째 성폭행과 두 번째 성폭행 피해가 달랐듯 나의 정신과 방문 경험도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달랐다. 같은 병원이었지만 이번에는 여자 의사를 만났고, 이 의사는 성폭행 사건을 호랑이에 물린 것으로 비유하지 않았다(길거리에 호랑이가 널려있는데 호랑이에 물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호랑이에 물려보지 않은, 호랑이만 할 수 있는 정말 멍청한 비유다). 병원의 대기실은 코로나 시국의 이비인후과만큼이나 꽉 차있어서 대기 시간은 훨씬 길어졌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위로가 되었다. 정도를 가늠하기 어려운 우울감보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는 통용되는 증상이 나타났다는 점이 오히려 편하기도 했다. 다행히 이번에 처방받은 약은 큰 부작용 없이 잘 맞았다. 파록세틴 20mg짜리 1/4을 숨 쉬기 어려운 증상을 조절하기 위해 처방받았고, 이후에 삶에 활기를 더하기 위해 아빌리파이 2mg의 1/4을 처방받았다. 의사 역시 나의 예후를 아주 긍정적으로 판단했다. 내가 걷고 있는 터널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면 잠깐씩 표정이 어두워지다가도 ‘이미 할 수 있는 걸 다 하고 계시네요!’ 라거나 ‘아주 훌륭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적당히 유지가 되고는 있네요, 그죠?’라고 뒤끝을 올려 경쾌하게 진료를 마무리 지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이주, 혹은 삼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정신과를 방문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긴 것이다. 동생의 첫 피해로부터 3년 11개월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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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죽음을 생각한다. 써내는 글은 모두 쓰레기 조각에 다름없고 내가 세상에 온 이유는 따로 없으며 삶을 살면서 대단한 업적을 이루지도 못할 것이라는 사실과 동생이 입은 피해가 없었던 일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면서 종종 죽음을 그린다. 그러다가 죽음과 우울과 세상의 끔찍함에 대해 글이 술술 써지면 삶이 전에 없던 궤도에 오른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운동을 잠시라도 쉬면 숨이 안 쉬어지는 증상이 돌아오거나 어지러운 증상이 찾아온다. 그러면 약을 감량하고, 증량하기를 반복하면서 때때로 가벼운 혹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정신과 문 앞에 선다. 한 때 그렇게도 도망치고 싶었던 곳에서 이제는 더러 동생의 성폭행 피해사실에 대해 얼마만큼이나 말했는지 헷갈려하면서 (‘지난겨울에 동생이 두 번째로 성폭행을 당했다고 제가 말했던가요?’) 나의 증상의 호전과 악화를 알리고, 스스로의 상태를 확인한다. 종종 자살사고가 뻗어나가는 와중에도 죽음에 대해 정립한 내용을 되새긴다. 다음은 <할머니의 팡도르>를 읽고 남긴 평이다; 생명의 시작을 여성으로 상정하면 죽음은 쉽게 남성으로 치부됩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이 하나라면 어떨까요. 할머니가 또 다른 할머니에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하는 이유는 삶을 일주일 더 연장하기 위함이 앱니다. 자신이 아는 삶의 기쁨(팡도르와 누가, 스폰가타)을 다른 이들에게도 나눠주기 위함이지요. 이 덕분에 사신도 임무 이외의 것을 경험하게 되고, 이탈리아에는 추운 계절에도 대대손손 달콤함이 전해지게 됩니다. 삶이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시작되었듯 죽음도 그러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요. 삶에 더 이상 남은 것이 없다고 죽음을 재촉 말아요. 하얗게 덮인 눈밭을 들치고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 팡도르를 구워요.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일 거예요. 그러다가도 죽음이 그리워진다면 상상해보아요. 두 여인이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는 흰 빛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요.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한다.
우울이 파도처럼 덮칠 때면 애써 땜질해 둔 그릇은 그대로 찬장 안에서 잠을 잔다. 매 끼니 식사를 챙기고 그릇에 밥을 담고, 그릇을 씻는 것은 건강한 사람들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다만 시리얼 봉투 하나로 며칠이 지나가는 동안에도 나는 잊지 않는다. 갖가지 모양으로 깨진 그릇들이 모여있고, 옻과 밀가루, 흙가루, 나무가루가 유리판 위에 아주 조금씩 덜어져 있는 장면을. 옻은 꼭 천 번 저어 만든 달고나 커피 같은 색깔이었다가, 산화가 되면 점점 색이 짙어져서 나중에는 초콜릿 같은 색깔이 되었다. 여기에 용도에 따라 밀가루, 흙가루, 나무가루를 섞어 사용하는데 밀가루와 흙가루는 깨진 조각을 붙이는데, 나무가루는 떨어져 나간 틈새를 메꾸는 데 사용한다. 조각조각으로 깨진 그릇이 두 동강 난 조각보다 옻을 이용해 붙이기 쉽다. 옻이 닿는 면적이 넓고, 옆에서 지지해주기 훨씬 수월하니까. 유약 안쪽에서 금이 간 그릇들은 조각도 같은 칼로 파서 상처를 먼저 드러내야 한다. 이러다 그릇이 깨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의 힘으로 상처를 따라 파내면 유약을 바를 수 있는 선이 만들어진다. 조각조각난 사회에 대한 신뢰도, 부모님의 무책임 함에 벌겋게 드러난 상처도 그릇처럼 붙고, 다시 밥 지어먹을 수 있는 날을 그리면서 오늘도 오늘치의 약을 입에 털어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