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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아 Sep 20. 2023

광속의 이데아

오랜만에 에세이를 씁니다. 그동안 마음은 소설을 쓰는 일에 기울어 있었습니다. 다양한 이유 중 하나는 에세이는 누가 봐도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내 이야기를 꺼내놓는 순간 그 이야기는 누군가의 잣대 속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 세모, 빗금 표시가 될 테니까요.


그래서 겪은 사건을 장치로 심어놓고 나와 몇몇 사람들을 등장인물로 바꿔서 글을 쓰기도 하였지요. 이번에는 에세이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죽어도 남기고 싶은 말은 '스스로를 해방하라. 더 자유롭고 진실되게.'라는 말이니까요. 제 이야기를 저로써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깐요.


문득 선생님이 생각이 난 이유는 니체 때문이겠지요. 선생님은 그날 청록색 칠판에 하얀 분필로 대문짝만 하게 '신은 죽었다.'라고 쓰셨습니다. 그리고 니체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설명을 해주셨다면 고등학생 때 저는 이해를 하고 다른 삶을 살았을까요? 그러나 선생님의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성서의 이야기를 꺼내며 '선악과 사건'을 말씀하시며 정말 신은 없다고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의 저는 지금의 저와 매우 닮아있는 게 조금 신기합니다. 다양한 외부 자극이 있었음에도 사람의 본질이 안 변한다는 것이 이것이 자아인가 싶습니다. 종교가 있던 저는 선생님의 말이 교리에 비춰보았을 때 넘어 논리의 허점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러한 생각이 살점 표피에 들어와 있는 가시처럼 빠지질 않았지요.


그러나 저는 수업시간에 즉시 반박할 용기 따위는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선생님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항목별로 선생님이 왜 틀리셨는지를 써내려 나갔죠. 제 기억엔 A4용지 한 장 반 분량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습게도 지금의 제가 선생님에게 편지를 쓴다면 니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신이 죽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을 살아라.' 그리고 선생님 니체는 자유로움을 넘어 초인의 경지, 위버맨쉬를 주장했습니다.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던 니체는 말이 고통스럽게 맞는 모습을 보며 타자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며 미쳐버리고 말았다고 그러니 니체는 단지 종교의 교리를 짓누르려던 사람이 아니라고 적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답이 기대되는 측면이기도 하고요.


신기하게도 선생님과 몇 번의 편지를 주고받고 저희는 꽤나 치열하게 서로를 반박했던 것 같습니다. 각자의 여유시간을 소비하면서 적어 내려간 결말은 서로의 주장을 끝내 수용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꽤나 껄끄러울 것 같던 선생님은 저를 자신의 토론반에 청강을 시켜주시더니 이후에는 토론대회에 나가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후 일련의 활동들은 제 대학입시의 포트폴리오가 되었지요.


이 일이 잊히지 않는 거보니 꽤나 강렬했나 봅니다. 니체를 읽을 땐 항상 선생님과 그 시절이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제가 니체에 대한 호감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뭐랄까요. 선생님 저는 철학자들이 하는 말이 마음으로 이해가 됩니다. 제가 어떠한 시간을 살았기 때문이겠죠. 그건 어떤 철학자가 말한 솔리튜드의 시간일 수도 아님 규율과 권력에 억압된 시간일 수도 있겠습니다. 특히 시간에 대한 그들의 관점이 너무나도 이해가 갑니다. 유명한 광고 카피였던 것 같은데. <바보야 문제는 **이야>라는 카피가 있잖아요. 저는**을 시간이라고 고치고 싶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 사람들은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닌 게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있으면서도 부족한 것, 알면서도 낭비하는 것, 집중할수록 나눠 쓸 수 없는 것이 [시간]이란 사실이요.


그래서 '이데아'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요즘 제가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는 곳이 저만의 이데아입니다. 가끔은 이데아가 진짜인지 내가 일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진짜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왜냐면 저의 이데아에서 전 진심으로 행복하니깐요. 그곳에선 시간도 원하는 대로 쓸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원하는 꿈을 이루면서 지냅니다.


결국 플라톤의 이데아는 구운몽인 것입니다. 이데아 속 나의 연인은 현실에서 저와 맺어지지 않습니다. 이데아 속의 시간은 현실에서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 원하는 만큼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데아 속 나를 현실로 데려오기 위해 전 계속 기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투하는 동안 지루하면 전 잠시 이데아의 세계로 넘어갑니다. 그 순간 전 이데아에서 현실의 미래를 보고 올 때면 기투하는 흑백의 시간이 광속으로 달리며 무지개 빛으로 찬란해집니다.  


마지막으로 프롬입니다. 프롬은 광활한 우주에서 자연상태를 이겨나가지 못하는 고독을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청명한 밤하늘을 바라볼 땐 얼마나 높고 넓은지 끝이 어딘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사이를 둥둥 걸어 다니는 구름만이 그럼에도 괜찮다 안부를 건네는 것만 같습니다. 저는 이 광활한 우주에서 내가 아주 작은 존재라는 것이 너무 큰 위로가 됩니다. 최근 가을 햇살의 축복을 은은히 받아 누리는 오후에 삶이 너무 아름답다 느껴져 눈물이 나려 했습니다. 스스로를 해방하고 쪼개고 작아져 저도 언젠가 바람과 공기의 입자로 흩날리는 날이 오겠지요. 우주의 입자로서의 요소를 지닌 채로 흩어지길. 육신에서 해방되고 영혼에서 해방되길. 그날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랍니다.


말하고 나면 거창해 보이는 이러한 기분이 전 좀 낯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아마 에세이를 쓰지 않는 것 일수도 있겠습니다. 선생님도 여전히 자신답게 지내고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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