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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아 Oct 22. 2023

여왕의 품위

단편소설

서기 2022년, 제국의 여왕이 즉위하였다.


거대한 문이 열리고 양옆에 도열한 인원을 지나쳐 왕좌에 우뚝 선 그녀의 머리에 왕관이 씌워졌다. 이후 여왕에게 사제와의 문답이 이뤄지고 공표된다.


이 문답은 사전 준비 없이 진행되며 여왕의 대답을 들은 자들 각자의 판단 하에 여왕의 정당성을 부여해 줄 것이다. 옆에 서 있던 사제가 여왕의 정면으로 걸어와 선 뒤 두루마기를 펼치며 적혀있는 질문을 읽어 내려간다. 

사제 : 무엇이 여왕을 이루는가? 

여왕 : 그것은 품위이며, 품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을 수 있는 초연한 마음입니다. 

사제 : 품위를 얻기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여왕 : 무너지지 않는 마음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키워왔습니다. 이는 끈기라 표현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 알량해 보일 수 있으나 변질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여왕의 제1 덕목이라 생각합니다. 

사제 : 여왕은 즉위 후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왕 : 첫째, 흔들리지 않는 권좌의 위엄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은 여왕의 흔들림 없는 미소가 되겠지요. 강인한 왕권만이 왕권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자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줄 수 있으며 저 자신과 제 왕국의 백성을 보호할 것입니다. 둘째, 왕관을 내려놓는 순간까지 왕국의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자신의 것을 일구어 나가는 자들의 발길을 응원하며 기뻐할 일에 축복을 더하는 일. 즉, 나의 백성의 희로애락을 함께 살아내는 것입니다. 

사제 : 사자와 같은 울부짖음과 같은 질투를 품은 검은 군단의 우두머리가 여왕의 심장을 노릴 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왕 : 그들이 원하는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들의 불행을 읽을 것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이 사실은 화(火) 검이 되어 제가 아닌 그들의 심장을 노릴 것입니다. 자신조차 돌보지 않았던 불행의 어둠 속 굶주린 사자는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왕으로서 권위를 인정하여 빼앗으려는 것을 증명할 뿐이지요. 새어 나오는 실소를 참지 않은 채 시니컬한 발걸음으로 내려간 여왕은 사자의 귓전에 다가가 말할 것입니다.


“인자한 여왕이 자비를 베풀어 주노니 나의 왕국의 시녀로 살지 말고 가서 네 삶을 살아라. 작은 것이라도 내게 없는 것이 그대에게 있다. 그것이 비록 어두웠던 돌일지라도 그것은 네 왕국에 훌륭한 주춧돌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면 자비 없는 여왕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미소를 잃지 않는 여왕만큼 어려운 상대는 없다는 것을 몸소 느끼게 할 것입니다. 

사제 : 여왕으로서 감당해야 할 독배는 무엇입니까? 

여왕 : 그것은 조급함이 나의 일을 그르치지 않게 사색하는 일이며, 여왕으로서 고독과 불안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실패하더라도 그것을 교훈 삼아 한 발 더 내딛는 일입니다. 

사제 : 이상 문답을 마치노니 여왕의 앞길에 지혜로운 이들이 함께하여 태평성대하길 원하노라. 

여왕은 사제의 말이 마치자 그 앞에 몸을 낮추었고 사제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했다.


성대한 즉위식 행렬을 끝으로 성으로 돌아온 여왕이 사제 뵙기를 청했다. 사제는 매무새를 점검한 후 여왕이 기다리고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여왕님을 뵈옵니다.” 

여왕은 주변을 물리라는 듯한 신호를 주었고, 무리는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을 만큼의 거리로 멀어졌다. 그때 여왕이 사제에게 말했다. 

“스승님을 뵈옵니다. 성장할 때 뵙고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남쪽 지역에서 성장하는 왕가의 자제를 가르치신다는 들은 지 3년 만이지요. 둘 뿐이니 말 편하게 하시지요. 스승님” 

사제가 웃으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보는데 많이 성장했더구나. 왕국에 당도하니 권좌에 오르기까지 숱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어려움을 통해 타인을 비추고자 한다는 소식에 뿌듯함을 감출 수 없었다.” 

“다 스승님 덕분입니다. 즉위가 가까워져 오자 일련의 사건들은 마치 계시를 주는 것과 같았고 그 과정에서 사제님의 오래전 가르침이 선명히 기억났습니다.” 

여왕이 벅찬 듯 말하자 사제는 변함없는 미소로 답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기가 이를 데 없구나.” 

“사제님은 늘 그러셨지요. 제 이야기를 경청해 주셨고, 필요 이상의 조언을 하지 않으셨지요. 제가 사제 후보로 올랐을 때도 사제께서만 반대했다 들었습니다. 신의 뜻을 따르는 자보다는 저 아이는 세상에 나가야 한다고 하셨다지요. 저는 그런 사제의 선택을 제 선택보다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신의]라 부르더군요. 그런 스승님이 있었기에 오늘에 와있습니다.” 

“사제인 나는 여전히 고민하는 자인데 네 말을 들으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드는구나. 왕국 내 수신인이 없는 편지가 오간다던데…” 

여왕은 눈짓으로 그것을 가져오라고 말하였고, 그들이 가져온 것은 여왕의 보석함이었다. 여왕은 보석함을 열어 사제에게 보이며 말했다. 

“제게 전하고 싶은 마음들이 아니겠습니까. 수신인이 적혀 있지 않지만 제 앞으로 온 마음을 추출하여 원석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제 보석함에 넣어두지요. 저도 수신인을 지운 채로 편지를 띄우기도 합니다. 

꿈을 꾸었다고 피아노 선율이 퍼지는 공간에서 같이 책을 읽고 속도를 늦춘 발걸음에 맞추어 걷는 꿈 말이지요. 그 꿈은 종종 가끔 나의 현실보다 앞서서 마중 나갔다고.


그저 사람으로서 시간의 길이에 상관없이 진실했다고, 받아들이지 못한 마음도 땅에 떨어뜨리진 않았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스승님 이제는 압니다. 시간과 마음의 간극은 순연히 받아들여야 함을 말이죠.” 

“왕관의 무게를 견딜 준비를 하고 있나 보구나.” 사제는 덤덤히 말했다. 

“그저 왕국을 좀 더 보살피고자 합니다. 사제도 알다시피 저희 왕국은 모든 사람이 각자의 제국 속 왕과 여왕으로 구성된 연방 아닙니까. 그들의 제국에선 저도 일원이나 백성일뿐이지요.


가까웠던 어떤 이의 왕국이 검은 군단의 공격으로 많이 무너졌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는 왕국을 살리고자 성곽을 고치는 이를 찾아갔더군요. 페인트처럼 보이는 약을 들고 와 자신의 왕국에 덧바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마음이 아팠습니다. 

누구보다 선민이라 칭함 받던 이었으니깐요. 그래서 밤이 깊도록 그를 만나기 위해 기다렸습니다. 달이 떠서야 그는 문을 열고 나오더군요. 성곽을 고치기 위해 정비소에 가고 약은 누구나 탈 수 있지만 당신을 그렇게까지 아프게 한 검은 군단에게 함께 분노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버티지 못했다는 기분은 당신은 패배자라는 사실을 증명함이 아니라고. 잘 지나갈 테지만 당신의 충동이 발현될까 나는 두렵다고 전하였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탈을 쓴 검은 군단을 이해하지도 속지도 말라고.” 

“늘 왕국과 대치를 해오던 검은 군단이 세력을 점차 확장해가고 있구나. 그래서 아까 즉위식의 답도 그러하였고, 너도 이미 만난 것 같구나.” 

“네. 스승님. 그러나 저는 제 왕국과 왕국 일원의 국가들이 무너지게 두지 않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막아볼 생각입니다. 여왕 실록은 이들의 행적은 망각시키지 않고 낱낱이 기록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검은 군단들과 함께 심판대에 설 것입니다. 경고하였으나 듣지 않은 자들이 아이히만처럼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라고 변명하게 두지 않을 것입니다.” 

여왕은 결연한 눈빛에 차서 말했다. 

“나는 해가 지기 전에 다시 떠나야 한다. 마지막으로 부탁할 것이 있으면 말해보아라.” 

“사제께서 항상 건강하셔서 멀리 계셔도 나아갈 방향을 알리는 등대처럼 계셔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 작은 손으론 원대한 포부처럼 이뤄내지 못할 수도 있음을 알지만 다만 신념대로 남아있는 나날을 잘 마치길 축복해 주십시오.” 

사제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미소를 짓고 돌아섰다. 하지만 여왕은 미소의 뜻을 알았기에 똑같은 미소로 화답한 뒤 사제를 향해 무릎을 굽혀 경의를 표했다.


서기 2022년 가을 초하루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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