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다섯 살 조카 생일선물을 산다고 하길래, 별생각 없이 백화점 아동복 매장을 따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내 눈에 들어온 풍경은 온통 아기들로 가득한 작은 세계였다. 갓난아기부터 초등학생까지 뛰노는 풍경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기분이 들떴다. 근처에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기 한 명이 있었다. 내가 “안녕~” 하고 손을 흔들자, 아기 아빠가 “인사해야지~”라고 말했고, 아이는 아장아장 몇 걸음 걸어오더니 자기 몸만큼 큰 머리를 푹 숙여 꾸벅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눈물이 고였다. 오버 같지만 진짜다.
그러고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나가자... 나 여기 오래 있으면 큰일 날 것 같아. 아기가 너무 갖고 싶어질 것 같아.”
그 층을 벗어나자마자 들뜬 마음은 가라앉고, 질문이 남았다.
“나는… 정말 아기를 낳을 수 있을까?”
돈도, 집도, 안정적인 직장도 없는 나. 기후 위기, 범죄, 사회적 불안정처럼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위험들. 그리고 정치에 들어온 뒤 겪어야 했던 또 다른 현실. 내 이름이 알려지고, 내 말과 행동 하나하나 공격받고, 가족까지 타격을 입는 상황 속에서 과연 내가 아이를 낳는 것이 안전한 일인지 스스로 여러 번 묻기도 했다. “내가 살아온 선택들이 언젠가 내 아이에게 상처로 돌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이런 막연하고도 어려운 고민을 3년 전부터 해왔다. 그런데 이 막막함을 덮을 만큼 나는 여전히 아기를 갖고 싶다. 현실적인 조건들이 나를 주저하게 만들지만, 가족의 시선도 한 몫했다. 언니는 애초에 출산 계획이 없고, 부모님도 언니에게는 애초에 기대를 내려놓았다. 당연히 부모님의 기대는 나에게로 향했고, 내가 정치인이 된 뒤로는 부모님도 내가 결혼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인 것 같다. 하지만 아빠는 최근에도 내게 “카톡 프로필에 손주 사진을 넣고 싶다, 상견례를 해보고 싶다”라고 말한 걸 보면, 여전히 그 기대를 품고 있는 것 같다.
엄마 친구는 얼마 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현이는 며느리감으로 참 좋은데, 아무래도 좀 부담스러워…” 떡 줄 사람 생각도 안 하는데 왜 벌써 부담스러워하냐고 웃어넘기면서도, 사회가 바라보는 ‘정상 가정’이라는 틀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둘 다는 욕심일까? 나는 정치도 계속하고 싶고, 아이도 갖고 싶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당연한 두 바람은 서로 충돌하는 선택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정치의 본래 목적은 결국 이 시대에 태어날 아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일이다. 그렇다면 정작 나는 왜 내 아이를 품을 용기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걸까.
결국 질문은 여기로 향한다. 정상가정을 꾸린다는 것, 이것이 지금의 나에게 가능한 일일까?
아니, 지금의 청년들 중 과연 몇 명에게나 가능한 일일까? 집값, 일자리, 돌봄 공백, 불안정한 사회, 정치·경제·환경적 불확실성. 이 시대 청년에게 부모가 된다는 선택은 ‘자연스러운 삶의 단계’가 아니라 큰 결단과 모험이 되어버렸다. 아이를 낳으려면 살 수 있는 집이 필요하고, 집을 얻으려면 버틸 수 있는 노동이 필요하며, 노동을 계속하려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모두 오랫동안 개인에게만 맡겨져 왔다. 돌봄은 여전히 가족에게 집중되어 있고, 여성에게는 ‘전담 돌봄’, 남성에게는 ‘경제 책임’이라는 오래된 역할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 구조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세대이기에, 부모가 되는 선택은 더욱 무거워졌다.
‘정상가정’이라는 낡은 기준은 청년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한국 사회가 말하는 정상가정은 대략 이런 기준을 전제로 한다.
- 안정된 정규직
- 일정 수준의 소득
- 적정 나이
- 결혼
- 사회적으로 무난한 이미지
그러나 이 조건들은 이제 청년 대다수에게 사실상 달성하기 어려운 스펙처럼 되어버렸다. 부모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현실과 맞닿는 순간 좌절로 변한다.
친구들은 내가 아기를 낳고 싶다고 말하면 보통 웃거나, 그런 나를 신기해한다. 지금의 내 현실에서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내 주변의 모든 청년들이 아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여러 현실적인 조건을 고려해 결혼을 했어도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한 부부들도 있다.
아이를 낳을지 말지는 각자 선택일 수 있지만 적어도 지금의 청년들이 사회 구조 때문에 원치 않는 포기를 하도록 내몰려서는 안 된다. 개인이 모든 걸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주거·노동·돌봄 구조가 갖춰져야 비로소 부모가 되어보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다는 것, 정치권에 청년들에게 출산을 독려하기에 앞서, 아이를 원한다는 마음이 조용히 사라지는 이유를 직시하는 것. 그리고 청년이 가족을 꾸리고 싶어질 때 그것이 무모한 도전이 아니라 ‘가능한 선택’이 되도록 사회를 바꾸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가 먼저 만들어야 할 배경이다.
이 변화가 시작될 때 비로소 우리 모두는 다음 세대를 꿈꿀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