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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금평 Oct 24. 2021

임팔 전투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끼리 대치했던 쓸쓸한 흔적을 기억하며

어처구니없는 작전     


마니뿌르, 나갈랜드 등 인도의 동북 7개 주는 지리적으로 중국, 미얀마와 방글라데시에 둘러싸여 있고, 인종적으로 몽골 계통에 가까워 인도 본토와는 다른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곳 주민들의 인도 주류문화에 대한 거부감 덕분에 한류가 인도에서 가장 먼저 뿌리를 내린 곳이기도 하다.        

(일본군 전몰자 위령비/ 인도 임팔 레드힐)

마니뿌르의 주도(州都) 임팔과 나갈랜드의 주도 코히마를 방문했을 때 2차 대전(이하 일본과 관련되어 있어 ‘태평양전쟁’이라 칭한다.)의 전쟁터 중 하나였던 ‘임팔 전투’의 현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임팔 전투(Battle of Imphal)는 1944.2월부터 7월까지 중국과 연결된 연합군의 보급 거점이었던 임팔을 확보하기 위해 미얀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15군단 3개 사단이 임팔과 고히마로 진출했다가 영국 중심의 연합군에게 대패했던 전투를 말한다. 임팔 전투를 일본 쪽에서는 '우'호 작전(임팔 작전명)이라고 부른다. 일본 육군은 공군의 지원 없이 1944년 2월 임팔을 향해 진격하면서 보급품이 부족하면 전리품이나 길가의 초목으로 해결하겠다는 무모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인도 땅을 밟았던 일본군 대부분은 결국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일본의 우호 작전 결재서류/"The battle of Imphal", NHK 다큐멘터리/ 2019)

4개월 이상 지속된 정글 전투에서 연합군 사상자는 17,500명이었던데 반해 일본군은 32,000여 명이 전사했으며, 그보다 많은 4만여 명이 전염병과 기아로 죽었다. 그도 그럴 것이 20일분의 보급품만을 가지고 출병했던 일본군은 연합군 수송기가 연합군 진지 근처에 떨어뜨린 보급품을 주어먹으려고 결사대를 꾸미기도 했다고 한다. 어처구니없는 전쟁터였던 것 같다. 임팔 전투 결과 일본군 병력의 90%가 죽거나 부상으로 전투력을 잃었으니 일본군 역사상 기록에 남을 만한 참패였다. 2019년에 방영된 NHK 다큐멘터리 “The battle of Imphal”에 출연했던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군은 후퇴하는 길에 무게를 줄이기 위해 총검은 물론 군복에 장식한 쇠붙이까지 떼어 냈다고 한다. 배고파 죽어가는 동료의 살을 베어내 연명하기도 하고 이를 서로 거래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인도와 미얀마의 접경인 친드윈 강을 건너지 못한 채 버려진 550여 명의 시체와 함께 전염병과 배고픔으로 죽어가던 100여 명의 일본군이 연합군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전염병을 우려한 연합군 측에 의해 산채로 화장되기도 했다.   

(영국군 전사자 묘지/인도 나갈랜드 코히마)

일본군 역사상 보기 드문 항명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코히마를 점령해 임팔의 후방에서 협공하기로 했던 사토 고토쿠 31 사단장은 식량은 물론 탄약도 없는 상태인지라 사단이 전멸하느니 항명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코히마를 눈앞에 둔 채 독단적으로 퇴각해버렸던 것이다. 후에 작전 실패의 일체가 드러날까 두려워 일본 군부는 고토쿠 사단장을 정신병자로 몰아 군사법정에도 서지 못하게 했다.  


배고파 죽어가는 전방의 부하들에게 오로지 ‘돌격’을 외쳤던 일본군의 임팔 작전 지휘관은 무타구치 렌야 중장이다. 중일전쟁을 촉발시켰던 노구교 사건의 주모자이자, 나중에 일본 내에서까지 ‘태평양전쟁 3대 얼간이’ 중 한 명으로 불리며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는 천수를 누리다 노환으로 죽었는데 죽을 때까지도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부하들이 잘못했다.”며 임팔 작전 참패의 책임을 회피했다고 한다.       

(임팔 전투 소개자료/ 임팔 전투 기념관/ 인도 임팔 코히마)

임팔 전투는 일본군이 허접한 작전을 수행한 결과 사실상 자멸을 초래했고 태평양전쟁 전세는 연합군 쪽으로 크게 기우는 전기가 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여느 전쟁에서나 있었을 법한 작전 실패와 그 희생자들 이야기에 그칠 수 있다. 그런데 이 전쟁터가 더 쓸쓸해 보이는 것은 양 진영 주변을 떠도는 조선인과 인도인 참전 흔적 때문이다. 정글에 버려져 유골조차 수습되지 못했던 일본군 중에는 분명 조선인 지원병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들의 땅에서 연합군과 일본군 편으로 나뉘어 조연으로 싸우다 희생된 수많은 인도 병사들의 자취는 말할 것도 없다.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와 조선인 일본군 지원병의 조우     

일본은 1944년부터 조선인을 징병하기 시작했는데 그전까지는 조선인에 대해 지원병 제도를 운영했다. 지원병 제도를 운영하던 시절에는 지원병에 선발되기 위해 혈서를 써가며 일본에 충성을 맹세했던 조선인도 없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사실상 강요에 의해 징발되었던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지원병으로 일본군에 편입된 조선인이 16,830명에 달한다. 총 지원자 80만여 명으로부터 선발되었으니 평균 45:1의 경쟁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 중 35% 정도가 자발적인 지원으로 보인다.(표영수, 일제강점기 조선인 지원병 제도 연구) 조선인 지원병들  일부는 이곳 임팔 전투부대에도 배치됐을 것이고, 그 대부분은 낯선 땅 인도의 정글에서 전사하거나 전염병과 배고픔으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일본군 조선인 지원병의 맞은편에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조선인들이 있었다. 1942년 겨울, 인도 주둔 영국군 총사령부는 대일 작전을 위해 조선민족혁명당에 공작대원 파견을 요청했다. 영국군 총사령부 대표 콜린 매켄지(Colin MacKenzie)와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김원봉은 영국군의 대일 작전을 협조하고 조선민족혁명당의 대일 투쟁을 원조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당시 한국광복군이 중국군사위원회의 지휘통솔을 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광복군 총사령부와 중국군사위원회의 승인 아래 영어와 일본어를 구사하는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隊) 대원 9명이 선발되어 1943년 8월 인도 켈커타에 도착했다. 이들 중 문응국, 김상준, 나동규, 박영진, 김성호, 한지성 등이 임팔 전선에 투입되어 영국군의 대일 작전에 참여했다. 인면전구공작대의 주요 임무는 일본군에 대한 선전활동으로서 귀순 방송, 전단 제작, 포로 신문, 일본 문서 번역, 통신감청, 정보수집 등을 담당함으로써 영국군의 대일 작전에 결정적인 기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임정 100년 고난의 3만 리,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참고)   

(인면전구공작대원들/임정 100년 고난의 3만 리/김용달)

찌는 더위 속에서 하루 전투를 마친 조선인 지원병들은 피땀으로 범벅된 군복을 벗지도 못한 채 주린 배를 달래며 별을 보았을 것이다. 반대편 진영 쪽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투항 권유 일본어 방송을 들으며 그들은 ‘아! 저쪽에도 조선인이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사람 특유의 일본어 발음 습관 때문에 몇 마디 일본어 만으로도 조선인임을 미루어 짐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방송을 하던 광복군 대원들도 저쪽에 적지 않은 조선인 지원병들이 듣고 있을 것이라고 의식했을 것이다.      


지금의 눈으로도 양쪽 조선인들을 바라보는 것이 불편한데 당시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서로를 대했을까....... 왠지 그들 생각의 파편들은 아직까지도 의미를 찾아 임팔과 코히마 언저리를  허허로이 떠돌고 있을 것만 같다. 연합군과 일본군 편으로 나뉘어 싸웠던 조선인들은 아직 두쪽 모두 우리에게 이방인들이다. 조선인 지원병은 물론 광복군 참전병에 대한 평가도 아직 정리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인 지원병은 대부분이 사실상 강제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으로 참전했던 사람들인 만큼 죽어서도 일본인으로 남아있다. 다른 쪽에 섰던 인면전구공작대원들의 항일투쟁 행적도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김원봉이 친북인사로 분류되고 있기 때문에 아직 우리의 역사가 아니다. 언젠가 남북 간 종전이 되고, 통일이 되고, 국력에서 우리가 일본을 앞서는 날까지, 아니 그 이후까지도 친일과 항일, 친북과 반공의 역사적 화해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일본 시민운동가 우에다 게이시(上田慶司,62)씨는 한국의 시민단체와 함께 태평양전쟁에 끌려가 숨진 조선인들의 유골을 한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운동을 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16년 3월 ‘전몰자 유골 수집 추진법’을 제정해 유골을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작업을 벌이고 있는데 한반도 출신자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의 ‘구체적인 제안’이 있으면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게이시 씨는 한국 정부가 ‘구체적인 제안’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피력한 바 있다. 요즘 한일관계가 별로 좋지 않은 데다가 조선인 지원병 중에는 강제 동원되었던 사람들 뿐 만 아니라  일본에 충성을 맹세했던 열혈 친일파들이 일부 섞여있기 때문에 우리 정부에서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조선인 지원병을 바라본 외국인들의 시선은 어땠을까. 싱가포르 초대 총리 리콴유는 태평양전쟁 당시의 조선인 지원병에 대해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한국인은 일본 군복을 입고 싱가포르를 함락시킨 침략의 협력자였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에서 연합군 포로들을 잔인하게 핍박했던 일본군이 사실은 대부분 조선인 지원병이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을 경험했던 우리 선조들은 일본인들에 대해 ‘옷을 깨끗이 입고, 거짓말하지 않고, 시간을 잘 지키며, 공정했던 사람들’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반면에 조선인들의 원성을 샀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일본인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조선인들이었다. 당시 일본에 협력했던 조선인들은 어디를 가나 주로 궂은일에 동원됨으써 ‘욕받이’ 역할에 이용되었던 모양이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일본인들이 ‘한 오랑캐를 이용해 다른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옛 중국의 전략을 구사하면서 조선인들을 활용한 셈이다. 조선인 지원병과 일본 앞잡이에게도 ‘우리에게는 나라가 없었다’는 나름의 명분과 기나긴 사연이 있을 것이다.       


몬순 기면 2,000mm 남짓 하는 비가 몰아서 오는 임팔의 축축한 전쟁터에서 시신도 제대로 수습되지 못한 채 죽어간 조선인 지원병 생각을 하니 문득 교토(京都)의 귀무덤(耳塚)이 떠올랐다. 30여 년 전 일본 연수 중 일본 소주 한잔을 올리며 멍청한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다가 차마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렸던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공을 확인받기 위해 전사한 조선병사는 물론 살아있는 백성들의 코와 귀를 베어서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 12만 여 조선인들의 코와 귀가 묻혀있는 곳이 귀무덤(당초 코무덤)이다. 일본에는 당시 조선에서 온 사람의 코와 귀가 실재했다는 증거가 남아있고, 우리에게는 ‘눈감으면 코 베어가는 세상’이나 ‘에비(耳鼻)!’와 같이 세상의 험악함을 일컬을 때나 아이들의 울음을 뚝 그치게 할 때 쓰는 두려움의 표현으로 남아있다.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부산에서 한양까지 한걸음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도 지름길을 안내했던 조선 출신 왜군들 덕분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열혈 조선인 지원병들의 원조였던 셈이다.                                                        

(귀무덤/ 일본 교토/ 위키백과)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에 손을 내밀면서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한국과 일본이 협력하자”라고 제의했다. 당시 일본은 우리의 제의를 환영했다. 국내에서는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었고 일본에서는 한류가 싹트기 시작했다. ‘2002 FIFA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는 ‘한-일 교류협력사업의 모델’로 남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한일관계는 진흙탕 길로 되돌아왔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서로의 과거를 민낯으로 직시’하는 일이 그만큼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남한이, 남한을 ‘미제의 앞잡이’라고 호도하는 북한과 화해하는 길이 멀고도 험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들에게 힘과 여유가 생기기를 기다리지 말고 우선 낯선 땅에 흩어져 있는 일본군 지원병들의 유골과, 친북 광복군들의 영혼은 물론 귀무덤 같은 굴욕의 흔적까지도 다 데려다 우리 땅에 묻어주었으면 좋겠다. 우리 후손들이 가끔 애잔한 그곳에 가서 술 한 잔 올리며 쓰라리고 불편한 우리의 과거를 ‘직시’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현재와 미래의 우리'가 ‘과거의 우리'와 화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도 독립을 위해 서로 싸운 인도인들       


인도인들도 한쪽은 연합군의 편에서 한쪽은 일본군 편에서 임팔 전투에 참가했다. 1차 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2차 대전 때에도 영국 통치를 받고 있던 인도인들은 공식적으로 영국 편에 가담했다. 국민회의를 이끌던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가 영국 측의 인도 독립에 대한 약속을 믿고 인도인들을 파병했던 것이다. 임팔 전투에서 일본군을 맞이한 4개 사단과 2개 여단 규모의 연합군은 영국군과 인도인, 그리고 일부 네팔 용병으로 구성되어있었다.  


반면에, 민족주의 좌파 계열의 인도인들은 영국에 대한 무장투쟁을 강조했다. 그 선봉에 섰던 사람이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as Chandra Bose)다. 인도 내 반영 투쟁에 한계를 느꼈던 찬드라 보스는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인도를 탈출해 독일의 히틀러를 만났다. 인도와 독일이 힘을 합쳐 영국에 대항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는 다시 히틀러의 도움으로 일본 군부를 이끌고 있던 도조 히데끼를 만났다. 영미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와 인도의 해방을 주장하던 일본에게 타도 영국을 주창하는 찬드라 보스는 반가운 동반자였다. 찬드라 보스는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일본군의 포로로 잡혀있던 인도군 출신 4만 3천여 명에 대한 지휘권을 양도받아 인도 국민군(Indian National Army)이라 명명하고 1개 여단 규모로 임팔 전투에 참전했다. 인도 국민군은 1944년 4월 14일, 임팔 남쪽 45km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 ‘모이랑’을 점령하고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땅에 최초로 인도 국기(삼색기)를 꽂았다. 인도에서는 찬드라 보스가 인도 국민군을 이끌고 인도 해방을 위해 본토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 소식에 고무되었던 인도 전역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환호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인도 수복지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는 찬드라 보스/ 인도 임팔 수바스 찬드라 보스 기념관)

그러나 일본군 주력부대가 식량과 탄약 부족으로 지리멸렬했던 상태에서 일본군의 “꼭두각시”로 불렸던 주변부의  인도 국민군이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릴 리 만무했다. 결국 인도 국민군은 임팔 전투에서 수많은 병력을 잃었고, 살아남은 이들도 대부분 도주하거나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일본군을 등에 업고 인도를 영국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했던  찬드라 보스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직후 찬드라 보스는 도피 중 의문사했으며, 포로가 된 인도 국민군 장병들은 반역자로서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들은 인도가 독립된 후에도 인도의 정규군에 편입되지 못했다. 네루 가문 중심의 국민회의당 집권 기간 동안 인도 정부의 인도 국민군에 대한 입장은 공식적으로 변함이 없었다. 2014년, 국민회의와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있던,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인도인민당(BJP) 정부가 집권하면서부터 수바스 찬드라 보스와 인도 국민군에 대한 재평가가 점차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임팔 전투를 기억하는 사람들          

                                                                                                                                                       

(영군군 전사자 묘비/ 인도 나갈랜드 코히마)

임팔 일원은 영국군의 입장에서 대승했던 곳이고, 일본군의 입장에서 대패했던 곳이다. 우리나라 임시정부의 입장에서는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공식 참전해 일본군에 대승한 전승지이고, 일본의 편에 섰던 일부 조선인들에게는 패전지이다. 연합군 측 인도병들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인도 침략을 물리쳤던 전승지이고, 영국에 대항했던 인도 국민군의 입장에서는 잠시나마 영국 치하의 인도를 무력으로 탈환했던 전승지이자 인도 해방의 꿈이 무산된 패전지이기도 하다.

(일본군 전몰자 위령 비문/인도 임팔 레드힐)

코히마의 ‘테니스장의 전투’라고 일컬어지는 격전지에는 영국인 전사자 묘지가 있다. 스무 살 전후의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부모와 부인들의 가슴 아픈 기억들이 함께 새겨져 있다. 임팔의 격전지 레드힐에는 일본 정부가 조성해 놓은 작은 ‘평화의 공원’과 기념관, 현지 주민들의 이름을 빌려 세워놓은 일본군 전몰자 위령비가 한때 격전지였음을 알리고 있다. 비문에는 “붉은 언덕에서 우리의 내일을 위해 뼈를 묻은 일본 남아들을 오늘(1977.12)에야 받들다.”라고 일본어로 쓰여 있다. 일본의 기념물은 ‘진출’을 기념하는 것 같기도 하고 히로시마 원폭 현장의 ‘평화공원’처럼 ‘피해’를 기억하는 것 같기도 하다. 코히마와 임팔(모이랑)에는 인도 정부에 의해 임팔 전투 기념관과 인도 국민군 전쟁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조선인들의 흔적은 그저 쓸쓸함으로 먼지와 함께 흩어져 있을 뿐이다.               


참고

 1. "The battle of Imphal", NHK 다큐멘터리 (2019)

 2. “임정 100년 고난의 3만 리”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임팔 등서 항일 작전 ‘활약’, 국방일보(2019.3.15.)

 3. 일제강점기 조선인 지원병 제도 연구, 표영수

 4. “Platinum Jubilee- Celebration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Free India", Department of Art and Culture, Government of Manipur(2018.10)

 5. "Battle of Imphal", Wikipedia(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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