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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Sep 17. 2024

언제였을까? 내가 흔한 사람 중 하나란 걸 깨달은 건

나의 초라함을 깨닫고 만 20에게 ; <피프티 피플>로 보내는 응원


어렸을 적 나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내가 잠들면 세상도 움직임을 멈추는 줄 알았다.
세상은 나를 위해 움직였고
나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 시절, 세상 모든 것은
나를 사랑하기 위해 존재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나 없는 곳에서도 세상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더 이상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그저 수많은 사람 중에 하나란 것을 진심으로 깨닫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다른 사람을 내 세상의 중심에 놓기 시작한 것은.

드라마 '청춘시대2' 7화 中


 스무 살이 되고 서울로 상경한 후, 문득 떠오르는 대사가 있다. 2017년에 방영한 드라마 '청춘시대 2'의 한 장면이다. 중학교 3학년이었던 꼬마 시절, 그 대사는 그저 어리석고 이기적인 사람을 위한 말이라고 여겼고,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지나쳤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내가 세상 속에 던져진 지금, 그 대사가 자꾸만 떠오른다.

 서울에 올 때만 해도 나는 나름 스스로를 인재라고 생각했다. 빛나는 존재라 믿었고, 그 믿음 하나로 이 도시에서 더 큰 무언가를 이룰 거라 자부했다. 하지만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알게 되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이곳에서는 나조차도 그저 흔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지삐까리라는 말처럼 말이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튀지도 않고 빛나지도 않는, 그저 애매모호한 미색에 불과하다는 걸. 빨간색도 주황색도, 맑은 하얀색도 아닌, 그냥 미색. 그렇게 수많은 색들 속에 섞여 있는 나를 발견했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20대가 이러한 혼란을 겪는다. 자신이 빛날 것이라 확신했던 순간이 무너지고, 그토록 믿었던 자신의 재능이 그리 특별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그 순간은 우리를 철저히 무너뜨린다. 우리가 가진 세상이 깨지고, 마치 내 삶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미색의 삶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가? 책의 속지를 떠올려볼 수 있겠다. 책의 속지는 눈부신 백색이 아닌 미색의 종이로 만들어진다. 하얀색 종이는 오랫동안 보기에는 너무 피로한 색이기 때문이다. 우리 눈이 가장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색은 미색이다. 또, 흔히 아이보리라고 부르는 이 색은 어느 곳에나 잘 어울리는 패셔너블한 색이기도 하다. 비록 눈에 띄는 색은 아니지만, 그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흐리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은 이러한 흐린 사람들에게 감히 당신도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여기서 주인공은 수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슈퍼스타가 아니다. 매일을 벅차게 살아가고, 때로는 큰일을 겪는 듯하지만 사실은 별일 아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를 준다.

 이 책에는 무려 50명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각 인물의 이야기가 2~5장 정도로 구성되며, 그들의 삶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어떻게 50명을 다 기억하지?’라는 걱정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다. 화자의 이름만 기억하면 충분하다.

 책을 읽다 보면 처음에 스쳐 갔던 이름들이 하나하나 마음에 남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마치 우리 삶처럼 말이다. 멀리서 보면 우리는 그저 흔한 미색의 사람들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가까이서 보면 각각이 붉은빛, 주황빛을 띠며 각자의 빛을 발하는 존재임을 알게 된다. 심지어 그 사람이 얼마나 우수한가와 상관없이, 어떤 사람은 이유 없이 마음에 남기도 한다.

 결국 <피프티 피플>은 삶의 가치는 ‘잘났는가’에 있지 않음을 알려준다. 50명의 사람이 있다면 50개의 가치 기준이 있다는 것. 애초에 타인의 기준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이 책에서 화자는 이야기가 끝나면 곧바로 마이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 이야기가 끝났는지 끝나지 않았는지 상관없이, 다음 사람의 차례가 오면 그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다. 이때 화자의 이야기는 그리 대단하지 않을지라도 모두가 그에게 집중한다. 그렇게 그 순간만큼은 그가 주인공이 된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주인공인 삶에서 내가 가장 귀 기울여야 할 사람은 결국 나 자신임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어째서 우리는 스스로가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에게 이야기의 중심을 넘겨주려 하는가. 이제는 나의 기준으로 돌아와, 나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주인공이다.


- 참고 : 정세랑 <피프티 피플>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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