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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래 Aug 18. 2022

세월이 참 야속합니다

친정어머니의 치매

원주-뮤지엄 산 미술관에서


당신은 큰 산이었습니다

우리 앞에 늘 우뚝 서 있었습니다

그늘도 되어주고

바람도 막아주고

따뜻한 햇살도 나눠주며

세상 속에서 내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든든하게 지켜주었습니다


긴 세월

우린 당신의 그늘 속에서

근심 걱정 없이 세상을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당신은 산이 아니라 허허벌판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그늘을 만들어 주지

바람을 막아주지도 못했습니다

당신을 지킬 힘조차 없어

작은 바위에 몸을 숨깁니다


세월이 참 야속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가고 싶은 곳도 혼자 갈 수 없습니다

지팡이가 너무 약해

보행기에 몸을 의지합니다


그 옛날

아름다웠던 날들을 가끔 이야기합니다

예쁜 처녀로 돌아가

널뛰기하던 그날을 기억합니다

젊은 날 아버지와 냇가로 소풍 갔던 추억도 생각해냅니다


한라산을 완주던 건강한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주민번호를 자랑스럽게 외우던 똑똑한 당신은 어디 있나요

서울에도 있는 삼겹살이 맛있다며

바리바리 싸가지고 고속버스로 올라오던 정 많은 당신은 어디 있나요

그런 당신이 그립습니다


제 고작 여든여섯

백 살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아무것도 몰라도 우리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어느 날 작별인사도 못하고

갑자기 떠날까 봐 겁이 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어떤 것도 생각이 안 나도 우리 곁을 떠나지만 말아주세요

오래오래 우리 곁에 남아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도록

산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 주세요

꼭 그렇게 해주세요


내 나이 이제 예순넷

당신이 지나온 세월을 따라갈까 봐

매일매일 정신을 바짝 차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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