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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노 Oct 07. 2023

피렌체의 고요

시간이 멈춘

이탈리아 피렌체는 수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었지만 피렌체에 잠시 머물면서 내가 받은 느낌은 '고요함'이다.

정신없이 이리저리 밀려나디는  -각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관광객들과는 상반되게 느긋하게 자리를 잡고 이젤 앞에 앉아 있던 거리의 화가들이며 갈래갈래 나눠진 좁은 골목길사이로 정돈된 듯 자리 잡은 상점들도 불과 한 블록밖의 소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듯 보인 때문이다.




몇백 년이 훌쩍 지난 건축물들은 더 이상 세월의 흔적을 이겨내지 못한 채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관광객들로 벌어들인 수입의 대부분을 고건축물들의 보수비용으로 쓰고 있고 그 이유가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함이 아니라 새로운 건물들의 건축을 지양하고 오래된 유적지의 틀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하니 그들의 생각이 조금은 멋져 보이기도 한다.

이런 이유들 때문인지 피렌체의 많은 건물들은 몇백 년을 지나고도 그 원래의 모습들이 남아있는데 특히 두오모성당은 건축을 시작한 지 7백여 년의 시간을 지나고도 힘찬 웅장함과 여리한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닌 조화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두오모의 쿠폴라를 올려다보면서 나와 쿠폴라 사이에는 꺼내볼만큼 쌓아놓은 추억이 없음을 실감하며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연출에 의해 만들어진 한 장면을 떠올릴 수밖에 없음이 아쉽다.

두오모 성당 광장에서 몇 블록만 돌아가면 (확실한 기억은 아니지만) 역시나 그 영화에서 무대가 되었던 '재키'라는 화방이 있다.

구입했던 물감 케이스 뚜껑에 '1915년 피렌체 재키'라고 표기되어 있는 걸 보면 그때부터 존재했었던 화방이었나 보다.

한적한 화방 안을 아저씨들 두어 명이 지키고 있었고 영어도 미흡하고 시간에 쫓겨 급하게 물감이며 붓을 찾는 내게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은 무심한 표정으로 안내를 해주는 제스처에서는 이탈리아 사람 특유의 여유로움과 나른함이 엿보인다.


피렌체 골목


오래전 캐나다 밴쿠버 Stanley Park에서 길을 잃을 뻔한 적이 있었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그 공원은 자전거를 타고 돌아도 세 시간은 족히 걸린다고 하는데 은빛 비늘 머금은 듯한 잔잔한 호수를 끼고 걸으며 다람쥐도 만나고 깊어진 가을에 사그락거리는 낙엽을 밟는 재미에 푹 빠져서 한참을 걷다가 문득 멈춰보니 방향감각 어두운 나로서는 도저히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방이 조용하고 한가로이 지저귀던 새들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대기의 공기마저 부유함을 멈춘 그 순간, 말할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하여 아주 작은 움직임의 미세함마저도 확장되어 느껴지던 그때 나이 지긋한, 자신을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웃으며 다가오는 남자를 만났다.

60이 넘은 듯한 그는 외형에서도 감춰지지 않는 여유롭고 자유로운 영혼의 색채가 온몸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었던 듯하다.

어떠한 얘기들을 나눴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만난 그 는 나와 동행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편안하게 나누었고 그동안 이탈리아 남자들은 바람둥이가 많다고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던 증명되지 않은 편견을 깰 수 있었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오래된 도시 피렌체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의 준세이의 직업이 '복원가'인 것처럼 피렌체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복원시키고 있는 중이다.

'죽어가는 생명을 되살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리는 유일한 직업'이 복원 가라고 말했던 준세이처럼 피렌체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등 메디치 가문의 후원에 힘입어 많은 예술활동을 했던 작가들의 작품들을 전시하며 그 작품들이 시간을 거슬러 미래로 나아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그 시대를 느끼고 위대한 과거의 탄생이 현재로 이어지는 형언할 수 없는 세대 간의 간극을 체험하게 하고 싶은 듯 도 하다.

이런 이유로 나는 피렌체가 주는 '고요함'이 좋았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마저도 내가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 있는 듯 착각하게 만들고  어느 골목길에서도 몇백 년 전 과거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그렇게 만난 사람들에게서 마저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것 같은 거리의 모습을 가진 곳이 피렌체다.




그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인파로 분주했던 유적지의 모습만을 기억하지 않기를 바란다.

숨 가쁜 하루하루가 일상이 되어버린 그곳에서 유유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그곳의 사람들.

천성이 바쁜, 그래서 주말이면 아침부터 밤까지의 시간을 계산하여 쓰는 나는, 그곳에 머무는 잠깐동안 침잠의 세계에서 그곳의 사람들처럼 유유하게 흘려보내는 시간 역시 내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나누어야 할 소중한 것 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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